학대받은 사람들 동서문화사 월드북 219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채수동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바쁜 일들이 거의 지나가서 요즘에는 부지런히 독서를 하고 있다. 그런데 반대로 글쓰기는 거의 내려놓다시피 하고 있다. 애써 여름 탓을 해보지만 그냥 게을러진 것뿐이다. 세월이 갈수록 읽기와 쓰기의 병행이 쉽지가 않다. 글쟁이들의 예고 없는 활동 중단을 볼 때마다 내심 안타까웠는데 이젠 알 것도 같다. 이대로 계속 가면 나님도 곧 절필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단 생각마저 들었다. 못다 읽은 책은 너무 많고, 글쓰기가 주는 재미는 이미 볼 만큼 봤다. 무엇보다도 전두엽이 고장 났는지 더 이상 참신한 문장이 안 나온다. 올해 들어 쓴 글들을 둘러보면 하나같이 평범한 인상밖에 못 주고 있다. 따라서 좋은 글이 나오려면 좋은 책을 읽어야 한다며 도스토옙스키를 읽었건만 똑같이 막막할 따름.


주인공이라기보다는 화자에 가까운 바냐는 시골 귀족인 니콜라이 집안에서 자라난다. 커서는 소설가가 되어 나날이 명성을 더해가는 행운을 얻었으나, 니콜라이의 딸인 나타샤의 마음을 얻는 데엔 실패한다. 뭐 그런갑다 하고 평생 친구나 먹자 했더니, 곧바로 웬 놈팽이와 사랑의 도주를 해버린 그녀였다. 그것도 제 부친의 철천지원수요, 둘도 없는 악마인 어느 공작의 아들놈과 말이다. 오호라, 이것은 나님이 좋아하는 금지된 사랑 얘기인가 했더니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다. 나타샤는 제 사랑을 반대하는 부모를 떠나와 남남처럼 살아간다. 그녀가 사랑한 공작의 아들은 요즘 말로 하면 뇌순남이었는데, 이런 놈에게 밀린 것도 모자라 그의 친구가 되면서까지 이 커플을 응원해 주고 있는 바냐도 참, 호구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더라.


바냐는 한 노인의 장례를 치러주고, 그 노인이 살던 방을 계약한다. 그리고 얼마 뒤에 그 집을 찾아온 노인의 손녀 넬리와 어찌어찌해서 같이 살게 된다. 바냐는 이 소녀를 달래서 니콜라이 부부의 양녀가 되게끔 할 계획이었다. 그렇게 되면 부부는 딸의 부재를 메꿔줄 사람이 생기고, 가족이 생긴 넬리는 생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그러나 많은 학대와 압제 속에 자라온 넬리는 바냐 외에 마음을 열지 않았고, 의사는 소녀가 조만간 질병으로 죽을 거라 했다. 치료해 주고 싶어도 손쓸 방법이 없었고, 바냐 또한 겨우 입에 풀칠하는 수준이라 그냥 데리고만 있을 뿐이었다. 묵언수행하던 소녀는 나타샤를 둘러싼 이야기를 듣고, 나중엔 그들 부녀관계를 화해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런 큰 그림을 위해 초반부터 빌드 업을 쌓아 올린 저자의 내공에 그저 감탄만 나온다.


이 대서사의 중심에는 모두를 쥐락펴락하는 공작이 있다. 바냐 일행들과 앙숙관계인 것처럼 묘사되지만 공작은 꽤나 신사답게 행동하는 편이다. 또 서로에게 윈윈하는 제안과 해답을 제시하기도 하는, 그렇게 막돼먹은 캐릭터가 아니다 보니 오히려 바냐와 주변인들이 과잉반응을 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물론 공작의 꿍꿍이를 알아채서 그랬겠지만, 나였다면 그냥 공작이 하자는 대로 좋게좋게 넘겼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물리적인 학대를 받았던 넬리와 달리, 바냐 일행은 공작에게 정신적인 학대를 받았다고 하겠다. 자세히 말 안 해도 대강 느낌이 올 것이다. 근데 한 편으로는, 이 작품에서 멀쩡한 사람은 공작밖에 없다는 생각도 든다. 이게 무슨 말인지 알고 싶으면 읽어보시라.


좀 더 길고 성의 있는 리뷰를 쓰고 싶은데 그만한 여력이 없다. 아무래도 샘물이 막혔거나 고갈된 듯하다. 슬프지도 않은 걸 보면 정말 할 만큼 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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