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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그말리온 ㅣ 범우희곡선 24
조지 버나드 쇼 지음, 신정옥 옮김 / 종합출판범우 / 2009년 8월
평점 :
품절
처음 읽는 버나드 쇼의 희곡인데 정말 술술 잘 읽힌다. 셰익스피어보다도 많은 작품을 냈다던 극작가라는데 나는 전혀 몰랐다. 제목의 ‘피그말리온‘은 그리스 신화의 키프로스 왕의 이름이라는데 이것도 지금 알았고, 그가 사랑했던 여인의 조각상이 아프로디테에 의해 생명체가 되었다는 내용에서 따온 작품이란다. 하여 열렬한 사랑 이야기겠거니 했는데 각도를 확 틀어서 어딘가 닮은 듯 닮지 않은 이야기로 창조해냈다. 참신하기는 해도 지금 와서 보기엔 그냥저냥이라 좋았다 나빴다 말하기가 어렵다. 낫배드와 쏘쏘의 중간쯤.
음성학 교수 히긴스는 빈민가 출신의 소녀를 공작부인으로 탈바꿈하는 실험을 강행한다. 걸걸한 언행과 까칠한 성품의 소녀는 교수의 친구인 대령의 전폭 지원하에 6개월간 숙녀 수업을 받게 된다. 그렇게 대성공한 귀부인 프로젝트의 종료로 이별을 앞둔 소녀는, 교수에게 배운 음성학을 남들에게 써먹겠노라고 선언한다. 이에 히긴스는 자신의 무기를 가지고 협박해오는 소녀에게 쩔쩔맨다는 뭐 그런 얘기.
거리의 부랑아가 귀부인이 된다는, 이것도 전형적인 신데렐라 내용이다. 사회적 신분이 전혀 다른 교수와 소녀는 각자의 이익 때문에 동맹 관계가 된다. 비혼 주의에다 인간미가 요만큼도 없는 히긴스 교수는 소녀를 한낱 실험체로만 대했고, 그래서 더욱 강성 민원 고객처럼 나오는 소녀와의 케미가 참 볼만하다. 이런 쌈닭 같은 성질을 죽여서 숙녀로 거듭났다는 것도 대단한데, 그녀에게 죽어도 마음 주지 않는 히긴스도 대단하긴 했다. 소녀의 본판이 꽤 괜찮았다는 설명과, 6개월 동안 그의 업무들을 봐줄 만큼 가깝던 걸로 봐서는 히긴스가 나름대로 선을 그었다고 생각된다. 여자 보기를 돌같이 하는 공감 제로의 로봇으로 묘사되긴 했지만 내 생각은 그렇다.
귀부인 수업을 자처한 히긴스도 기품 있는 신사랑은 거리가 멀었다. 상스러운 말도 자주 내뱉고, 불쾌한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기도 다반사였으니. 하녀와 모친에게 지적받는 게 일상이라 그런지 소녀의 생떼와 사자후도 잘만 받아주는 괴짜 그 자체였다. 그렇게 으르렁대던 소녀도 막상 헤어진다고 하니 서운함이 북받쳐올라 울분을 토한다. 어째서 당신은 나에게 다정히 대해주지 않느냐면서. 원래대로라면 여기서 얼레리꼴레리 하고 해피엔딩이라야 하건만 저자는 히긴스의 캐릭터를 끝까지 밀고 나갔다. 여튼 거듭난 그녀가 상류사회로 진출할지, 벽에 부딪혀 다시 예전 삶으로 돌아갈지는 알 수 없다. 허나 돌아간다면 그의 실험은 실패로 끝난 것일 테다. 남들이 소녀를 귀부인으로 착각하는 선에서 끝이 아니라, 앞으로의 삶을 대하는 관점과 태도의 변화까지가 실험 성공의 척도라고 생각된다.
이 외에도 소녀의 부친, 소녀에게 구혼하는 남자 등의 이야기가 있는데 하나같이 히긴스의 병맛을 조명하는 느낌이라서 생략했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설명 안 해도 뭐 다들 아실 거고. 오히려 평을 남기는 게 민망한 수준. 가볍게 읽기는 좋았다만 희곡을 썩 즐기질 않아서 저자의 작품을 더 읽게 될지는 모르겠다. 이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