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터 카멘친트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53
헤르만 헤세 지음, 박종서 옮김 / 문예출판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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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적해질 때면 헤르만 헤세를 읽는다. 헤세 작품도 거의 다 읽어가는데 그다음엔 누구를 읽어야 하나. 헤세와 흡사한 기질을 지닌 나님은 이지러진 톱니바퀴 같아서, 잘 짜여진 세상의 틈바구니 가운데 쉽사리 염증을 느끼곤 한다. 스스로 방랑자라 일컫는 헤세처럼 나 역시 어느 한 곳에 마음을 정착시키지 못하는 병 아닌 병이 있다. 여러 번 옮겨 다닌 학교와 직장, 그 밖에 활동했던 단체와 각종 소모임들. 타고난 내향인임에도 남들과 어울리고 소통하길 반복했고, 어렵지 않게 사람들을 사귀긴 했지만 나와 맞지 않는 타입이 대부분이고, 정말 친해지고 싶은 이들은 나만큼 마음을 내어주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해 주는 건 기적이라더니 정말 맞는 말이다.


대체 뭐가 문제일까 오랜 시간 고민한 결과, 저들은 즐거운 사람을 원하고 나는 편안한 사람을 원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내가 마음이 가는 부류는 대개 온화하고 예의 있고 품성이 바른 면을 가진 쪽이었는데, 얼핏 노잼같아 보이는 타입들도 얼마든지 유머러스하고 핑퐁이 잘 되는 걸 봐온 터라, 나는 정반대에 끌리기보다 나와 비슷한 코드에게 끌리곤 했다. 하지만 뭐랄까, 그런 희귀종을 보기도 힘들뿐더러, 서로 간에 우정과 믿음이 돈독해지는 걸 가로막는 방해 요소가 너무도 많은 현대사회의 장벽을 자주 느꼈다. 차라리 나도 재능을 발휘하여 거기에 매달린다거나, 돈 버는 일에 보람을 느낀다거나 했으면 좋겠는데 당최 그런 의욕이 들지를 않으니 어쩔 땐 스스로도 참 못나 보이고, 남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조바심도 들고, 돌고 돌아 결국 혼자라는 생각에 다 부질없다 싶고, 또 누군가 내민 친절에 사르르 녹아내리고. 나나 헤세 같은 부류는 절망 속에 내린 한줄기 빛을 발견할 때까지 평생 떠돌다가 운명할 팔자려니 한다.


헤세의 첫 장편인 <페터 카멘친트>는 시인 출신답게, 온통 시적 묘사로 수놓은 문장의 연속이었다. 아름다운 글도 좋지만 이처럼 정도가 과하면 나는 쉽게 물려버린다. 마치 한 가지 반찬만 여러 그릇에 담겨 내오는 식당에 간 기분이랄까. 이래서 나는 글보다 이야기를 더 우선시하는 편이다. 일단 첫 소설답게 자전적 경험들이 실려있지만 이후에 쓴 차기작들처럼 특정한 고뇌나 어떤 경험, 통찰에 대하여 깊게 파고든 게 아닌, 20대까지의 헤세의 일대기를 프리뷰했다고나 할까. 산골마을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페터 카멘친트는, 외국을 여행하며 시와 소설을 쓰고 우정과 사랑도 경험한다. 고향에서는 좀처럼 마음 맞는 사람이 없어 사람보다 자연을 벗 삼아 살았지만, 외국 땅에서는 친절하고 잘 통하는 이웃들이 많았고, 그렇게 어울리다 보니 고향과 가족은 점점 뒷전이 된다. 이래저래 바쁜 청춘을 보내던 중 하나뿐인 친구가 죽고, 얼마 뒤에 모친도 운명한다. 그 후 다시 여행하다 머문 집의 어린 딸이 병으로 죽자, 홀로 남은 부친이 걱정되어 고향에 돌아간다. 이렇게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면서 들게 된 생각은, 어떻게 살아본들 죽음뿐이라면 대체 무엇을 위한 삶이어야 하는가였다.


죽음이 반복되지만 오히려 희망을 노래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삶에 갈피를 잡지 못하던 청년이 학업에 몸을 던지고, 처음으로 통하는 친구를 사귀고, 이뤄지진 못했지만 사랑에도 빠져보고, 자신 없던 글재주로 밥벌이도 해보고, 타지에 가서 환대를 받는 등 먹구름 가득한 내면을 비집고 들어오는 빛줄기가 주인공을 매번 일으켜주고 있었다. 비록 기쁨의 수명은 짧았고, 그 때문인지 거처를 계속 옮겨 다녔지만 도중에 만났던 인연들로 상처를 치유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이 같은 방랑자들은 남들과 같이 보내는 시간이 짧기 때문에, 남아도는 혼자의 시간들을 추억거리로 채워 넣지 않으면 안 된다. 잠깐이었지만 행복했던 찰나의 기억들로, 그 순간이 주었던 고마운 감정들로 밀려드는 외로움을 막을 수 있기 때문에.


겨우 생긴 ‘내 사람‘들은 다 죽거나 멀어졌으니 불행하다고 해야 할까.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헤세 작품의 주인공들은 온통 번민에 잠겨있고 허무와 씨름하며 결핍에 허덕인다. 하여 헤세의 삶은 불행했을지라도 이 작품만으로는 그렇게 보기 어려운 게 죄다 살짝 맛보기 식으로 다루고 있거든. 하지만 반대로 헤세의 전 작품을 아우르는 주제가 무엇인지를 알게 한다. 후반부에 절친이 된 꼽추는 페터에게 없었던 관점을 갖추고 있었으며, 그처럼 자신 또한 고통과 절망을 다각도에서 보고 접근하는 법을 배운다. 그리하여 자연으로 회피하기 바빴던 주인공과 헤세는, 이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자기와의 싸움을 계속해나가기로 한다. 이 책을 냈을 때가 27세였으니 그쯤이면 자신의 십자가를 인정하고도 남았을 테지. 나도 그걸 알아서 이 글 쓰는 행위를 멈추지 못하고 있다. 사실 나의 글들은 서평의 형식을 하고 있는 자기 치유의 산물이다. 이렇게 또 한 번 외로움을 달래주고 불행을 견딘다고나 할까. 그 결핍 덕분에 꾸준한 글쟁이가 되었으니 고마워해야 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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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6-17 12: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사춘기 때 헷세의 작품 몇권 읽었는데 다시 읽으면 어떤 느낌일까
싶다가도 읽을 자신이 없더라고요.
모르긴 해도 헷세가 요즘 사람이었으면 소수의 독자들만 좋아했을 것 같아요.ㅋ

물감 2024-06-17 14:36   좋아요 1 | URL
요즘 작가였다면 과하다 못해 쎄하죠 ㅋㅋㅋㅋ
헤세가 극소수 유형인지라, 헤세 좋아하는 독자들도 극소수이지 않나 싶어요. 그래서인지 헤세 좋아하는 사람들끼리는 금방 친해지고 끈끈해지는 그런게 있습니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