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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75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15년 9월
평점 :
가즈오 이시구로도 도장깨기 중인데, 이번 작품은 막 찌리릿한 느낌이 안 오더란 말이제. 타 작품과 동일하게 내내 잔잔하고 담백하게 진행하면서 야금야금 지난날의 과오를 곱씹고 반성하는 패턴이었다. 그러나 여운이 남지는 않았는데, 옛 잘잘못에 어떤 후회나 미련을 담아두지 않는, 제법 쿨워터 향을 풍기는 주인공 때문이다. 신념대로 살았으므로 결과야 어떻든 만족한다는 건데, 나 역시도 이런 마인드를 좋아하지만 어쩐지 이번 작품과는 좀 안 맞는다고 해야 하나. 다 읽고 나서야 의도를 알게 되었지만 솔직히 흐리멍덩한 잔잔바리 느낌뿐이어서, 그냥 쉬어가는 페이지처럼 쓰련다.
둘째 딸의 혼사가 파토난 뒤로 큰 딸의 조언을 따라 옛 인맥들을 만나러 가는 오노. 과거 일본은 결혼할 집안을 조사하러 다닌다는 관례가 있었다나. 그니까 이미지 세탁을 위해 미리 손 써둔다고 보면 될 듯. 아무튼 현역 시절 대단한 화가였던 주인공은 친했던 동료나 제자들의 배타적인 태도 앞에 당황한다. 그뿐만 아니라 두 딸과 사위도 묘하게 무시하는 듯했다. 아무런 트러블 없이 겸손하게 살았거늘, 어째서 하나같이 감정을 품고 있는 건가. 딱히 사이가 틀어질만한 일은 없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
사실 이 모든 건 독자가 어리둥절하게끔 의도한 장치라는 것. 오노의 나이 듦을 앞세워 계속 기억이 가물가물하다는 식으로 회상들이 전개되고 있다. 그렇기에 진실의 여부와 상관없이 주인공한테 유리한 내용들만 독자에게 입력되는 셈이다. 결과적으로 오노의 잘못은 같은 예술이라는 이름하에 전쟁을 부추기고 지지하는 그림을 그린 것이다. 그것으로 부와 명성을 거머쥔 오노는 더 이상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가 아니었다. 그의 순수한 신념 때문에 주변 화가들은 뭐라 말도 못 하고 그저 조용히 손절하는 수밖에 없었다. 대책 없이 순진하다는 옛 동료의, 허를 찌른 팩트만이 맴돌았다.
그러나 대인배 쿨가이 주인공은 이제 누가 맞고 틀리고를 따지긴커녕 스스로를 굽히며 잘못을 인정하고 비난도 수긍한다. 자신의 신념과 사상이 과거엔 옳았을지라도 지금 시대는 맞지 않을 수 있다며 상대의 주장과 의견을 모두 시인한다. 그래서 더더욱 이상한 기류가 흐른다. 예나 지금이나 오노는 온화하고 선량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혹여 그가 전범에 일조했대도, 그의 말대로 지나간 잘못은 어쩔 수 없는 걸지도 모른다. 게다가 저자세로 나오니 오히려 비난하는 쪽만 못나 보이는 아이러니함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다행히도 작은딸의 두 번째 혼사는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발품 팔아준 부친에게 감사는커녕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면서 한발 뒤로 빼는 두 딸들. 자식들에게 오노는 전범자가 아니었던 건지, 아니면 이제야 전범자가 아니게 된 건지는 알 수 없다. 작중에서 딸들의 사사건건 반항하고 거부하는 태도가 나는 가장 이해가 안 간다. 여하간 총평하자면 다른 서평가의 말대로 시대와 이념이 바뀐 데에서 오는 모순이며, 여기에는 선과 악의 개념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고 본다. 이렇게 내 기억들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무엇이 보정되었는지를 따져 묻는 작품이 많은 걸 보면, 인간이란 동물은 왜곡된 기억의 터널을 걷게 되는 존재로 태어난 건가 싶다. 1세대를 욕하는 2세대들도 곧 다음 세대에게 비난받을 텐데, 과연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 말라는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깨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