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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양
대프니 듀 모리에 지음, 이상원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4월
평점 :
뮤지컬 <레베카>의 원작자인 대프니 듀 모리에의 작품을 드디어 접했다. 장르문학을 즐겨 썼다던 1907년 생의 여성 작가라는 것도 놀라운데, 내놓는 작품마다 히트였다고 하니 이 분도 진정 타고난 이야기꾼인 갑다. 장르소설은 싫다면서도 모리에는 좋아한다던 독자가 은근히 많더라고. 그 때문에 나도 참 궁금했던 작가였는데 겨우 이 한 권 만으로도 궁금증이 풀렸다. 그리고 고딕소설의 매력이 뭔지를 제대로 느꼈다. <희생양>은 모리에 작품 중 하위권이라 더만, 그럼 다른 작품들은 얼마나 재미있다는 말이냐. <레베카>도 얼른 읽어봐야겠다.
제목만으로는 감도 안 오는 이 작품은 도플갱어에 대한 내용이다. <왕자와 거지>의 현대판으로써 거지의 일인칭시점으로만 진행되며 언제 정체가 탄로 날지 모를 아슬아슬함이 작품의 액기스라 보면 된다. 프랑스에서 도플갱어를 만난 영국인 교수. 이것도 인연이라며 방을 잡고 술자리를 함께한 두 사람. 다음날 아침, 상대방은 보이질 않고 교수의 옷과 짐들도 없어졌다. 그렇게 타인의 신분이 된 교수를 찾아온 누군가에게 붙들려 어떤 성으로 인도를 받는다. 알고 보니 어제 그 남자는 이 성의 주인이자 귀족이었고, 교수는 낯선 이들 앞에서 영혼을 다해 연기를 펼친다. 어색한 성주인 노릇에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고, 까짓것 제대로 해보자며 연기파 배우로 거듭난 교수. 단 한 명도 의심치 않았다는 억지스러운 설정만 눈감아주면 나쁘지 않은 몰입감을 보여주므로 관대함을 가져주시기를.
도플갱어 장 드게는 무너져가는 집안을 버리고 도망친 인간 말종이었다. 가족관계도 엉망인데다 위태로운 사업에도 관심이 없는 본래의 성주인에겐 문제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이런 지긋지긋한 환경에서 탈출한 그가 싸지른 똥 치우기에 급급한 교수였지만, 장 드게와 자신의 스타일을 적절히 섞어서 하나둘씩 사태를 바로잡는다. 이렇게 원래의 자신도, 장 드게도 아닌 제3의 인물을 연기하며 지난날의 슬픔과 근심에서 멀어져 가는 교수. 여태껏 가족 없이 살아왔던 그는, 어느덧 장 드게의 온전치 못한 가족들이 친가족처럼 느껴졌다. 한편 성의 가족들은 망나니였던 성주의 의젓함에 놀라다가도 금방 적응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등장인물들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차분히 정돈해가는 작가의 클라스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고딕소설 특유의 분위기는 좋았지만 메인 테마도 없이 자잘한 사건들로만 흘러간다는 건 역시나 아쉽다. 이토록 깔끔한 완급조절을 보여주는데도 밋밋하다는 인상은 지워지지가 않는다. 어쩌면 작가의 의도 같기도 하고 사실 잘 모르겠다. 여튼 모리에는 이 작품에서 최소한의 긴장감으로 독자의 시선을 붙들고 있다. 눈치 못 챈 독자들도 많을 텐데, 전혀 딴판으로 장 드게를 행세하는 교수가 지닌 뭔지 모를 불안감이 바로 그것이다. 어느 지점에 가서 들통날 거라는 내 예상과 달리 끝까지 들키지 않고 돌아가는 톱니바퀴와, 그속에서 가냘픈 긴장의 끈을 부여잡고 따라가는 독자들은 자신이 기대한 반전의 부재로 허탈과 동시에 안도를 느끼게 된다. 이런 게 바로 문학이 가진 매력이지 싶다.
그나저나 제목은 좀 아니라고 생각했다. 입장이 바뀐 교수는 여러 번 총대를 메긴 했어도 이 연극을 끝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가져보지 못했던 가족도 얻었고 신분도 누리면서 잘만 적응했으니, 대체 어딜 봐서 희생양이냐 싶었다. 그런데 역자의 글을 통해 보지 못했던 희생양들을 알고 나자 정신이 멍해지는 게 아닌가. 또 개인적으로 열린 결말을 싫어하는데 이 작품의 결말은 전혀 싫지가 않았다. 참 여러번 놀라게 만드는 작가다. 이 책은 대단한 반전이나 임팩트는 없었지만 작품성 면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이게 하위권이라니. 아무튼 모리에 입문용으로는 그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