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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도살장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0
커트 보니것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평점 :
커트 보니것은 내가 가장 취약한 SF를 즐겨 쓰는 작가이다. 그런고로 이번 책은 절반도 이해하지 못한 채 읽었다는 데에 의의를 두기로 한다. 2차 세계대전을 겪은 저자가 쓴 전쟁 소설인데 솔직히 전쟁 테마의 작품들은 커다란 틀 안에서 스토리만 살짝씩 다를 뿐이라 대단한 감동을 입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저 이제는 다 알려진 역사를 이 사람은 어떻게 각색했을지가 궁금할 따름. <제5도살장>은 전쟁소설이면서 참혹함이 느껴지지 않는 특이 케이스다. 불규칙하게 과거와 미래를 이동하는데다, 시공간을 벗어난 사차원의 배경까지 다루며, 나사가 몇 군데 빠진듯한 문체를 써서 결코 읽기가 쉽지 않다. 전쟁 영화나 책들이 끝없는 전쟁을 부추긴다는 말에, 그런 생각이 안 드는 글을 쓰다 보니 이런 정신 사나운 작품이 탄생한 게 아닌가 한다. 여튼 읽노라면 전쟁은커녕 전의를 상실케 하므로 반전 소설답다고 하겠다.
워낙 시점이 뒤죽박죽이고 별별 내용이 다 나오지만 생각보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대학을 다니다 군인으로 차출된 주인공은 전쟁터에서 독일군에 잡혀간다. 이후 독일 드레스덴의 수용소에서 머물던 중 폭격이 쏟아진다. 운 좋게 생존해서 어찌어찌 잘 살다가 훗날에 정신착란을 일으킨다. 이야기에 두서가 없는 것은 아마도 트라우마 설정 때문일 듯. 그는 작중에서 외계인들에게 잡혀간 뒤로부터 인생의 어느 시점들을 랜덤으로 시간여행한다. 결혼 직후로 갔다가 대학시절로 오고, 수용소에 있다가 전쟁터로 오는 등. 그렇게 한 개인의 길고 긴 삶을 순환하며 소개해준다. 나는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는 구성을 좋아하지 않아서 대체 언제 끝나나 하면서 읽었다. 후딱 끝내고 얼른 작품 해설이나 읽고 싶었다. 근데 해설도 딱히 볼 건 없었다. 뭐 그런 거지.
평소 보니것의 글은 풍자와 유머로 유명하단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도 유머 코드가 곳곳에 튀어나온다. 저자는 무수히 많은 죽음 앞에서 연민으로 화답하지 않았다. 배고프면 냉장고 문을 여는 것처럼 죽음이 다 그런 거라며 자연스럽게 넘긴다. 살육과 사망이 난무하는 전쟁소설에서 유머라니, 쪼까 대단하기도 하고 조심스럽기도 하고. 지금은 몰라도 출간 당시에는 욕 꽤나 먹었을 거 같은디.
살고자 하는 의지가 결여된 주인공. 시간순의 작품이 아니므로 자세히는 모르지만 전쟁이 터지고 나서가 아니라 원래 그런 사람이었던 듯하다. 시공간을 수차례 이동하면서 자신의 미래를 바꿔볼 법도 한데 어떤 시도조차 안 했다는 것은 그런 거다. 정해진 결말대로 흘러간다는 인생의 진리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가 외계인에게 잡혀갔을 때 왜 하필 자신이냐고 묻자, 외계인은 호박 안에 갇힌 벌처럼 아무 이유가 없다고 답했다. 모든 건 그저 일어난 상황이고 그 순간 그 자리에 내가 있었을 뿐. 따라서 죽으면 죽은 거고 살았으면 그저 생존한 것이니, 생존의 의지가 있고 없고는 중요치 않다는 뜻일 터. 역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분들의 세계관은 범접할 수가 없다. 난 그냥 모르고 살란다.
이 작품의 핵심과 의도가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타 전쟁소설과 다를 바 없는 대답만 나올 것 같다. 심지어 읽기도 어려운 방식을 택했으니 전쟁의 교훈을 말하려는 건 아닐 테다. 단순히 반 전쟁과 반 영웅주의를 주장함에도 어딘가 알 수 없는 시시함이 있다. 가해자의 국가란 이유로 죄 없는 독일 시민을 몰살한 비인간적인 행위도 그 당시에는 충분히 그럴 수 있었으리라고 본다. 암튼 이 작품의 참 목적을 알고 싶어 많은 리뷰를 읽다가 딱 꽂힌 평을 발견했다. 서두에서는 이 내용들이 실제 일어났다지만 외계인이나 시간여행에 대한 내용은 누가 봐도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진짜 말도 안 되는 건 왜 치러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전쟁‘이라는 것. 세계대전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인생도 하나의 전쟁이고, 그것 또한 말도 안 되는 일들의 연속이다. 내가 개미로 살든 베짱이로 살든 정해진 결말대로 가고 있는 중이라면 좀 허무할 것 같다. 하긴 인생의 허무함은 우리 집 고영희들도 다 아는 사실인데 뭐. 아무튼 전쟁은 내 취향이 아니지만 SF는 더더욱 아니올시다. 커트 보니것을 다시 볼 날이 올지는 잘 모르겄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