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버지들의 마지막 나날
조엘 디케르 지음, 윤진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랜 독서생활을 하다 보면 본인의 취향이 어떤지 잘 알게 된다. 그것은 분야와 장르를 가리지 않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책이 좋을 수가 없고 세상만사가 관심사일 수도 없기 때문에 결국에는 편협한 독서를 하도록 되어있다. 이것을 알기 전의 나는 편협한 독서에 대한 선입견이 좀 있었는데, 지금은 스스로를 잘 아는 사람으로 보여져 말 그대로 취향 존중을 하게 되었다. 설령 야설 광이라도 다 이해한다. 한때는 나도 스릴러소설만을 고집했었으나 이제는 좀 더 다양한 장르에도 도전해보고 시각이 넓어져 다행이라 느낀다. 그리고 나 역시 확고해진 취향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역사소설하고는 맞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 있었던 사건을 아무리 각색한들 알려진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아 신선함도 없고 흥미도 생기질 않는다. 그런데 좋아하는 작가가 쓴 작품이라면 내 취향과 상관없이 읽어주는 게 의리 아닌가. 더군다나 이번 신간은 조엘 디케르의 데뷔작이라고 하니 안 읽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역시나 실망시키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주인공 폴에밀은 아버지를 홀로 두고 군에 자원입대를 한다. 여차여차해서 영국 첩보요원이 된 그는 전쟁터로 간다. 작전이 실패할 때마다 동기들이 죽었으며, 남은 사람도 죽음을 각오해야 했다. 전쟁이 길어지자 아버지가 걱정되어 찾아간 주인공은 독일군에 붙잡히고, 아버지는 아무것도 모른 채 아들을 하염없이 기다린다.


요원들을 육성하는 과정은 영화 <킹스맨>을 생각나게 한다. 고된 훈련을 받으며 동기들 간에 트러블도 겪고 낙오자도 생기는 장면들을 상세히 다루어서 저절로 몰입하게 된다. 초반에는 서로 삐걱거리다가 나중에는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사이가 된 동기들. 비록 뿔뿔이 흩어졌지만 지겹고 괴로운 전쟁을 버틸 수 있던 것은 함께 했던 동기들 덕분이었다. 어쩌다가 서로 만나거나 혹은 소식을 전해 듣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곤 했다. 그러나 긴긴 전시상황으로 육체는 지쳐가고 정신은 병들어버린다. 정상의 삶을 잃어버린 동기들은 서서히 두 그룹으로 나뉜다. 존재의 의미를 전쟁 속에서 찾으려는 무리와, 인류애와 인간다움을 포기하지 않는 무리로. 전자는 과거의 나로 돌아갈 수 없단 생각에 갇혀있었고, 후자는 전쟁이 끝난 후의 삶을 그리고 있었다. 여기서 주인공은 전자의 입장에서 후자의 입장으로 넘어간 케이스였다.


주인공 폴에밀은 요원으로나 인간으로나 백 점이었다. 특히 온화한 성품으로 모두가 그를 좋아했다. 그러나 군의 방침을 어기고 적에게 발각된 것도 그 온화함 때문이었다. 입대 후 한 번도 뵙지 못한 아버지가 너무 그리웠고, 홀로 힘겹게 지낼 아버지가 너무 걱정되었다. 그는 자신의 계급과 신망을 이용해서 아버지에게 안부편지를 보낸다. 해서는 안될 일임을 알았지만 터져버린 감정은 멈출 줄을 몰랐다. 결국 꼬리가 길어져 잡히게 된 그는 동료를 밀고하고 아버지를 살리는 길을 택한다. 국가의 안전보다 아버지의 안전이 중요했던 폴에밀의 선택은 비난받아 마땅한 것일까. 대를 위해 소의 희생이 최선책이라곤 하나 그게 반드시 정답일 수는 없다. 여튼 이런 내막을 모르는 남은 동기들이 주인공의 죽음을 알리려 아버지를 찾아갔지만 차마 사실대로 말하지 못한다. 아버지의 남은 날들을 슬픔으로 지새우게 할 수는 없으니까.


제목만 보면 아버지에 관한 작품 같은데 알맹이는 전쟁으로만 가득해서 많이 아쉬웠다. 아버지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 데다 주인공을 기다리며 발 동동 하는 장면이 전부였다. 아무리 봐도 아버지들에게 바치는 작품으로 보여지지 않는데 왜 제목을 그렇게 지었을까. 그보다 더 아쉬운 것은 주인공의 너무 이른 퇴장이었다. 한번 끊어진 맥은 복구가 불가했고, 동기들만으로는 남은 분량을 채우기에 역부족이었다. 왜 공들여 쌓은 탑을 갑자기 무너뜨리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 첫 작인데 그럴 수도 있지 뭐. 그나저나 좋아하는 장르가 아니라 그런지 리뷰도 참 재미없게 써지는군. 퍽이나 아름다운 밤이에요.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파랑 2021-06-07 00:1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목과 표지의 괴리인가요? ㅎㅎ 물감님 리뷰 너무 재미있게 읽었어요. 완전 날카로운~!! 물감님은 역사소설하고 안맞는다고 하시는데 저는 중국소설하고 SF가 잘 안맞더라구요. 손이 잘 안감 ㅜㅜ

물감 2021-06-07 08:04   좋아요 3 | URL
ㅋㅋㅋ의미심장한 제목이 내용과는 크게 연관이 없어보였어요.
그러고보니 저는 중국소설을 아예 안읽었네요. SF도 그렇게 좋아하지 않고요. 저랑 새파랑님은 문과쪽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