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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 지음, 공보경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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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삼대 욕구는 식욕, 성욕, 수면욕이지만 이게 부족하다 해서 욕구불만이 생기진 않는다. 그럼 언제 욕구불만이 생기느냐. 집 없고, 직장 없고, 자신이 쓸모없을 때다. 적어도 내가 사는 현대에서는 그렇다. 이 중에 하나라도 가지기 어려워 N포세대가 생겨났고 포기하면 편하다는 관념에 지배되기 시작했다. 이미 수 년 전에 시작된 과도기가 해마다 갱신되는 한국은 참 어메이징한 국가이다. 서두에 이런 우울한 얘기를 꺼낸 것은 이번에 나온 스티븐 킹의 신작이 한 사람의 인생 파탄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어서이다. 인생은 외로운 원맨쇼라 했던가. 과연 그 말이 딱이었다. 


남자의 집과 직장이 있는 지역은 고속도로 확장공사가 들어설 예정이다. 회사 건물도, 집도 다른 지역으로 옮겨야 하는 상황. 긴 시간을 함께한 남자는 회사도 집도 비켜줄 생각이 없다. 결국 회사에 사표 내고 아내와도 갈라섰지만 절대 마음은 꺾이지 않는다. 불행을 지긋지긋하게 겪어온 주인공의 불행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모든 불행을 끌어안으며 현실과의 타협을 거부한 그는 혼자서 세상을 왕따시키기로 결심한다.


이 작품은 주인공의 자기 연민, 자기혐오가 너무나 강렬해서 그것만 보다가 진짜 핵심을 놓치기 딱 좋다. 과연 작가가 한 개인의 불행을 보여주려고 이런 장편의 글을 썼을까. 흔한 내용일수록 심드렁하기보다 작가의 숨은 의도를 파악하려는 시도가 필요하다. 나는 이 책의 포인트를 크게 두 가지로 간추렸다. 첫 번째는 인생의 굴레이다. 사춘기가 뭔지 모르는 친구들도 세상의 불공정함을 잘 안다. 인맥과 관계, 경험과 직감, 운과 노력, 하다못해 타이밍까지 내 뜻대로 되는 게 없다. 이 세상은 우리가 불행에 빠질 수밖에 없는 시스템으로 만들어진 SF 영화 세트장 같은 것이다. 따라서 왜 나는 불행할까,가 아니라 원래 인생의 사이클은 불행한 게 정상이다. 심지어 잘 살고 멀쩡한 사람도 불행하다고 말하거든. 하물며 이 책의 주인공은 어떤가. 직장을 잃고, 가족과 멀어지고, 터전도 뺏기게 생겼다. 철저하게 고립된 그는 술과 약에 의존하며 살아간다. 작가가 너무 진흙탕에 쑤셔 넣는 기분도 들지만 그보다도 정제되지 않은 삶의 날것을 골고루 먹여주려는 시도가 눈에 띈다. 마치 세상은 원래 시궁창이고, 인간은 발버둥 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강조하는 듯하다. 사실 이 같은 메시지는 타 작품들 속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지만 이 작품에서 더 크게 와닿는 이유는 주인공이 스스로 고립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같은 남자로서 참 마음 찢어진다.


두 번째로는 주인공의 부성애이다. 오래된 집에 온갖 추억이 깃들어서 차마 떠날 수 없다는 마음은 이해한다. 그런데 직장도 관두고 아내와 헤어지면서까지 해서 집을 지키려는 그의 행동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화염병 던지고 총질하는 무법자가 되어 정부와 싸우려는 건 누가 봐도 제정신이 아니다. 그런데 관점을 달리하면 이 남자의 외로운 투쟁이 옳지는 않아도 납득은 된다. 사람은 누구나 제 목숨만큼 중하게 여기는 것들이 있다. 주인공처럼 소중한 기억일 수도 있고, 굳건한 신념이 될 수도 있고, 나를 살려준 은사의 말 한마디가 될 때도 있다. 반대로 그것들이 당사자의 발작 버튼이라서 건들었다간 눈에 뵈는 게 없어진다. 평소 조용한 사람이 빡 돌면 더 무섭듯이 말이다. 그럼 다시 작품 얘기로 돌아와서, 남자가 지키려던 건 병으로 떠나버린 자식과의 시간들이었다. 아들을 지키지 못하고 그렇게 보냈는데, 이제는 집까지 못 지키고 떠나보내게 생겼다. 그에게 집은 곧 자식이나 다름없으며, 집을 지키는 건 곧 아들을 지킨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자식을 빼앗으려는 정부를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그의 저항은 당연한 거였다. 이걸 캐치하지 못하면 주인공을 그저 정신 나간 사람으로만 보게 될 테니 주의하시길.


놓치면 안 될 또 한 가지는 바로 아내에 대한 애정이 식어가는 과정이다. 별거 중에도 식을 줄 모르던 아내 사랑이 갑자기 확 식은 건 아내가 아들에 대한 미련을 접었기 때문이었다. 아들의 모습이 지금도 선명한데 아내는 벌써 아들을 보내줄 준비가 끝나있었다. 아내는 이만 아픔을 정리하려고 집을 나간 거지만 그에게는 자식을 내다 버린 무정한 여자나 다름없었다. 이제는 아내가 다른 누굴 만나서 새 출발을 한다 해도 아무렇지가 않아졌다. 그리고 드디어 자살할 생각도 품게 된다. 어쩌면 그의 발작 버튼을 누른 건 아내였는지도 모른다. 과연 주인공의 말대로 삶이란 그저 지옥으로 가기 전의 준비 장소에 불과한 것일까.


킹 슨생은 본인만의 확고한 철칙과 철학을 가진 글쓰기로 유명하다. 하루키는 ‘문장의 울림‘을 중요시하는 듯하고, 스티븐 킹은 ‘문단의 개연성‘을 더 신경 쓰는 듯하다. 그래서 하루키의 세련된 글은 담백한 순문학에 어울리고, 킹의 계산된 글은 치고 빠지는 장르문학에 적절하다. 그런데 이번 작품은 재밌게도 장르소설에 순문학 감성을 입혀놓았다. 정말 스티븐 킹이 괜히 천재 작가 소리를 듣는 게 아니다. 장르소설이 다루는 휴머니즘은 독특한 맛이 있는데, 이런 게 세상을 다른 관점으로 보게 해준다고나 할까. 부디 당신도 이 거칠고 퍽퍽한 작품 속에 숨겨진 따스함을 꼭 발견하길 바란다.



※ 출판사에서 지원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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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4-17 23:3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하루키는 ‘문장의 울림‘을 중요시하는 듯하고, 스티븐 킹은 ‘문단의 개연성‘을 더 신경 쓰는 듯하다. 그래서 하루키의 세련된 글은 담백한 순문학에 어울리고, 킹의 계산된 글은 치고 빠지는 장르문학에 적절하다]우와! 물감님 두 작가 비교가 정확! 하루키옹은 음악에서 글쓰기를 배웠고 킹슨생은 그야말로 대중들에게 널리 읽혀지는 글이 뭔지 잘 아는 영리한 ㅎㅎ 물감님 리뷰 읽고 난후 곧바로 킨들에서 로드워크 구매 완료 함 ^ㅎ^

물감 2021-04-17 23:50   좋아요 2 | URL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필력으로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은 확실히 연구하고 분석하는 재미가 있어요ㅎㅎ
어깨너머로 공부를 배우는 기분이랄까요? 단점은 필력 구경하느라 작품에 집중이 잘 안될때가 있어요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