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시리즈의 비밀
J.M. 에르 지음, 이상해 옮김 / 작가정신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이번에도 풍겨대는 병맛 냄새에 끌려서 골랐건만 이건 뭐 순한 맛도 아니고 맹맛에 가까웠다. 그러니까 냄새와 맛이 절대 비례하지 않는 델리만쥬같은 작품이랄까. 나는 B급 갬성을 정말 좋아하는데 어째 읽는 책마다 항상 실망하게 된다. 이왕 코믹 작을 쓸 거면 좀 제대로 망가져주고 해야 작품이 사는데, 늘 보면 적당히 웃겨주고 슬그머니 뒤로 내뺀다. 이렇게 수많은 B급 문학 작가들이 체면 생각해서인지 제대로 된 똘끼를 보여주지 못하더라. 그 바닥 사람들만의 고질병인가. 하여간 그 증상이 이 책에서는 유독 심했는데 이유는 뒤에 가서 설명하기로 하고, 일단 줄거리부터 적어본다.


주인공 펠릭스는 하루 세 편의 아류 영화를 보고 글을 쓰는 블로거이다. 직업도 없이 방구석에서 취미생활만 전념하는 그는 오늘도 가족들의 무시 대상을 담당중이다. 어느 날 그의 시나리오를 영화화하자는 제작자를 만나고서 시궁창 탈출 예정에 들뜬 주인공. 기쁨도 잠시, 웬 형사가 찾아와 그를 살인범으로 지목한다. 놀랍게도 그의 시나리오가 실제로 일어난 살인사건이란다. 썩은 동아줄에 매달려 부들거리는 펠릭스는 이대로 추락할 것인가.


영화계에서는 저급한 아류 영화들을 Z 시리즈라 부른다. 그런 영화의 광인 1급 루저 펠릭스는 본인의 남다른 취향을 자부한다. 한데 그 자부심이 불씨가 되어 타인의 시나리오를 뺏고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게 된다. 이런 소설들은 대부분 비슷한 컨셉과 방식으로 인생을 말아먹는 듯하다. 여튼 초반까지는 작가의 B급 갬성이 나름 잘 먹혔다. 적당한 유머와 적절한 연출, 그리고 독자와의 소통 시도까지 다 좋았다. 그런데 사건이 진행되면서 비굴한 작가 멘트가 중간중간에 계속 등장한다. 재미없어도 이해해달라느니, 딴 길로 새서 죄송하다느니. 스스로를 깎아내리고 독자에게 굽신거리는 게 정말 보기 싫었다. 미리 경고했으니까 독자들 실망에 본인은 잘못 없다 말하고 싶은 건가? 작품의 퀄리티에 실망하는 것보다, 자신의 작품을 싸구려로 만드는 그 태도가 더 실망스러웠다. 어차피 작품성으로 승부할 것도 아닌데 그냥 손가락 가는 대로 즐기면 되지, 왜 자꾸 돌 던지라는 강요 아닌 강요를 하시능교?


그의 영화 시나리오에는 요양원에서 실종된 노인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 내용은 이내 현실이 되었고, 노인들이 하나씩 사라진다. 그러나 형사가 말하길, 연쇄살인범을 잡기 위해 살인사건을 실종사건으로 공개했단다. 죽은 노인들은 영화 속 한 장면을 연출한 채로 죽어있었고, 범인은 병원 관계자이며 영화광으로 판단했다. 하여 주인공은 영화광의 시각으로 단서를 잡아달라는 수사 협조를 부탁받는데, 사실은 의심스러운 주인공을 같은 편으로 만들어서 꼬리를 잡으려는 속셈이었다. 형사의 속셈도 모르고 미끼를 물어버린 주인공은 계속 내빼다가 점점 추리에 집착하여 형사를 난처하게 만든다. 이 정도면 진짜 괜찮은 플롯 아닌가? 그냥 추리소설로 갔어도 좋았을 것 같은데 대체 왜 살리지도 못할 코믹물을 고집하시능교? 


몇 없는 캐릭터들이 전부 매력 넘친다. 먼저 늘 무게 잡는 형사의 허당 미가 눈에 띈다. 항상 탐정소설의 수사 법칙을 따라 하지만 건지는 게 없어 수사기록은 점점 유머 모음집이 된다. 그의 파트너이자 아들은 약간 모지리인데, 아들의 수사 일지는 부친보다도 더하다. 미행하다 삼천포로 빠지고, 길을 잃어 타국으로 가게 되는 등 전혀 형사답지 못한 모습들로 독자를 웃겨준다. 그리고 주인공을 무시하고 깔보는 아내와 친누나는 요양원에 직접 찾아가 노인협회 행세까지 해가며 범인을 잡으려 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발연기는 정체를 감출 수 없었고, 노인들의 원성만 산다. 이렇듯 정신 산만한 인물들로 구성돼있지만 어떻게든 이야기가 굴러간다. 매력적인 캐릭터들로 얼마든지 화끈한 플레이를 보여줄 수 있겠고만, 작가님은 뭐가 그리 겁나서 MSG를 넣었다 말다 하시능교? 


사실 이 작품의 주연은 노인들이다. 대부분 나사가 풀려있지만 프라이드만큼은 대단한 요양원 노인들이 대거 등장한다. 이들은 살인사건과는 별 상관이 없는데도 분량이 제법 많다. 이유는 작가 후기를 통해서 알게 되었는데, 작가는 이 작품을 빌려 오늘날의 노인문제를 말하고 싶어 했다. 그들도 한때는 열정 가득한 청년이었으나 은퇴하면서 열정까지 강제로 밀려났다. 늙었다는 이유로 사회에 설자리를 잃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뜨거운 노인들. 이 책은 그런 노인들이 무능력, 무 쓸모가 아님을 다양하게 보여준다. 나름 건재한 신체능력과 생식기능과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과... 아무튼 작가는 버려지고 소외된 노인이 갈수록 느는데 이대로도 괜찮은가 하는 화두를 유쾌함 속에 담아냈다. 메시지는 진중하지만 작품은 절대 그렇지 않기 때문에 눈치 못 채고 그냥 넘어가는 사람이 태반일 듯. 언젠가 나도 나이 들면 버려질 텐데 그 소외감을 견뎌낼 수 있을까 싶네. 그때도 지금처럼 독서하고 글 쓰고 있겠지 뭐. 그거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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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0-12-31 22: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감님 2021년 새해 연하장 서재에 놓고 가여 ㅋㅋ

새해 행복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2021년 신축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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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복많이 받으세요

물감 2020-12-31 22:52   좋아요 1 | URL
ㅎㅎㅎ감사합니다. 새해 복많이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