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스의 상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6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이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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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셰익스피어 문학을 읽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이게 다 독서모임 덕분이다. 이상하게도 고전문학은 읽고 나면 내가 지성인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래서 난 지금 스스로가 너무 대견스럽고 기특하다. 가끔은 이런 자화자찬도 필요하다고 합리화해본다. 셰익스피어가 어떤 사람인지는 모른대도 그 이름을 못 들어본 사람은 없지 않을까. 간단히 소개하면 수많은 시와 극을 쓴 영국의 극작가인데, 천오백 년대에 발표한 그의 작품들이 지금까지도 연극과 뮤지컬로 재탄생하는 걸 보면 거장 중에 거장이 틀림없는 듯. 이 책은 극단 배우들의 대본집이다. 그래서 인물들의 대사 외에는 기타 문장이 없다. 극을 공연이 아닌 대본으로 읽는 게 얼마나 재밌겠나 싶어 큰 기대를 안 했는데 의외로 재미있게 읽혔다. 역자에 말에 따르면 셰익스피어 작품은 번역의 레벨이 매우 높다고 한다. 그럼에도 읽기 수월하게 번역해준 덕분에 어려움 없이 읽었다.


내용은 크게 두 가지이다. 베니스의 상인이 친구의 보증을 서주고 친구가 유대인에게 돈을 빌린다. 그러나 상인이 갚지 못하게 되자 유대인은 차용증서대로 상인의 살을 1파운드 가져가기로 한다. 친구가 돈을 두세 배로 갚겠다고 해도 유대인의 마음은 강경하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상인에게 받았던 멸시와 천대를 드디어 갚아줄 기회가 왔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인 상인과 친구들은 유대인의 무자비와 잔인성을 비난했다. 분명 절대 봐줄 생각이 없는 유대인의 태도는 냉혈하고 비열하다. 하지만 그를 이렇게 만든 건 기독교인들이었다. 그들은 성경 말씀을 인용하면서까지 유대인을 욕했지만 정작 자신들은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았다. 모두가 악이라 칭하는 유대인이 기독교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자칭 선이라 믿는 기독교인이 죄를 뉘우칠 줄 모르는 이 모순은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 선과 악의 입장은 정해져있지만 그 경계가 모호하므로 어느 한쪽만 손을 들어줄 수가 없는 상황이다. 이렇게 무너진 선과 악은 주위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가해자는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는 가해자가 되는 뉴스가 매일 보도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법보다 빠른 주먹을 시행하는 조폭의 편을 들기도 하고, 어처구니없는 판결로 배신감 들게 하는 판사를 욕하기도 한다. 이게 다 잘못된 행동일까.


다른 내용은 벨몬트의 상속녀가 공개 구혼 자리를 마련한 것. 부친의 유언에 따라 복불복 상자 고르기에서 당첨된 자에게 운명을 맡겨야 한다. 그렇게 신세한탄하며 좌절하는 그녀를 쟁취한 용사님은 어이없게도 상인의 친구였다. 아니, 상인이 그토록 경멸하던 유대인에게 사채를 쓰게 해놓고 지는 여자를 만나러 가? 지 때문에 누구는 몸에 바람구멍 나게 생겼는데? 당장 손절해도 모자랄 놈이지만 사랑만큼이나 우정을 중요시했던 셰익스피어는 상인과 친구의 막장 브로맨스를 가지고 시청률을 최대한 뽑아내셨다. 상인에 대한 친구의 우정은 법정에서 절정을 찍는다. 아내보다도 친구가 더 중요하다고 하질 않나, 아내의 절대반지를 망설임 없이 판사에게 바치질 않나. 그 광경을 다 보고도 넘어가 준 상속녀는 진정 대인배가 아니라 지지리도 남편 복 없는 콩깍지녀에 가까웠다. 하긴, 그 어려운 복불복 테스트를 멋지게 풀었으니 반할 만도 하겠지. 어쩐지 이 작품은 사랑도 그렇고 우정도 그렇고 전혀 낭만적이지가 않다.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겠지만요.


결국 재판에서 유대인은 자멸하고 상인은 살아났다. 처음부터 정해진 결말이었지만 찝찝함이 남는 승리였다. 판사가 준 기회들을 죄다 뿌리쳤으니 자업자득 아니냐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교도 취급을 받아온 유대인의 사정을 생각한다면 그의 태도가 마냥 미련하다고 볼 수만은 없다. 오히려 그동안 당한 게 얼마나 억울하면 저럴까 싶었다. 그리고 아무리 해피엔딩이라지만 유대인의 증오가 베이스인 이 작품이 희극으로 분류되는 게 맞는지도 의문이다. 아무튼 짧은 분량이지만 셰익스피어의 철학도, 도덕관도, 스타일도 충분히 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 가장 위대한 극작가라는 타이틀이 괜히 붙은 건 아닌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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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종 2020-06-14 20: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전문학은 종갓집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씨간장 같은 이미지가 그려져요. 여러 가지 응용 버젼이 펼쳐질 수 있기도 하지만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느껴진다고나 할까요. 이게 바로 원조 클라쓰다~! 이런 거요.ㅎㅎ

잠깐, 딴지! 베니스의 상인이 친구의 보증을 서준 건 맞지만 유대인에게 돈을 빌린 건 친구라. 두 번째 단락의 두 번째 문장은 ‘베니스의 상인이 유대인에게 돈을 빌리는 친구의 보증을 서준다.‘라 쓰는 게 적합할 것 같습니다.^^;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대립을 보면서 물감님 말씀대로 모순점을 느꼈습니다. 절대선과 절대악은 존재하지 않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선과 악이 실은 매우 주관적일 수 있다는 점도 생각했습니다. 대다수에게 선이 되는 것을 선이라 칭하지만 그게 반드시 100% 옳은 것이라고 말하지는 못할 것 같아서요.

바람구멍 ㅋㅋㅋ 빵 터졌습니다~ ‘막장 브로맨스, 시청률, 절대반지, 지지리도 남편 복 없는 콩깍지녀‘ 물감님 글의 매력이 세 번째 단락에 듬뿍 담겨있네요. 글을 읽다 오랜만에 웃어보았습니다.ㅎㅎ
근데 복불복에서 은이 안되는 이유, 납득이 가시는지요? 제 리뷰에도 썼는데 정확하게 잘 모르겠어서요.^^;;

저도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이게 과연 희극일까 하구요. ‘역사‘의 서술에 대한 관점이 생각났습니다. 역사란 강자의 기록이죠. 강자에게는 정복이지만, 약자에게는 약탈당하여 기록에서조차 찾아볼 수 없다는 점입니다. 신대륙의 발견과 선주민의 피바다 뭐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뭔가를 판단하는게 조심스러워져요. 우린 너무 쉽게 판단하고 단정지어버리는 게 아닌가 해서요.^^

물감 2020-06-14 22:01   좋아요 1 | URL
원조 클라쓰! 적절한 표현입니다 ㅎㅎㅎ 지적해주신 내용도 수정했어요!
어쩌면 선과 악은 동전의 양면이나 다름 없지 않을까요. 우리가 바라보는 공산주의도 그 나라들에겐 선이고 정의일테니까요. 말씀대로 절대선, 절대악은 없을지도 모르겠어요.

사실 저는 세 상자의 대한 해석이 잘 와닿지 않아서 휙 넘겼어요 ㅋㅋㅋㅋㅋ 이 자리에서 은에 대해 생각좀 해볼까요? ‘나를 선택하는 자는 얻기에 합당한 만큼의 것을 얻으리라.‘ 여기서 키포인트는 합당하다는 건데, 귀족들은 그녀를 얻으러 왔다기 보다 그녀의 빽을 보고 왔으므로 합당치 못한게 아닌가 합니다. 그렇기에 얻을 것도 없다는 결론이 제 생각입니다. ^^

그런 말 있잖아요?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그래서 이 작품은 비극도 되고 희극도 되는 게 아닐까요? 약자로 살아온 유대인이 단 한 번 강자가 된 것인데, 만약 그의 승리로 끝났다면 이 책은 강자의 기록이 되는 걸까요? 이 역시도 쉽게 판단하기 어렵네요... ㅎㅎ

여튼 6월은 가뿐히 클리어한 것 같아 기분이 좋네요. 올해는 어쩐지 휴가다운 휴가도 못 즐길거 같아요. 여유가 많이 생기면 실컷 독서할 수 있겠네 싶지만 막상 그렇게는 안되네요. 그냥 원래 페이스나 유지해야겠어요 ^^

나비종 2020-06-14 22:20   좋아요 1 | URL
아!!! 물감님의 ‘그녀의 빽을 보고 왔으므로‘ 덕분에 ‘그림자‘의 의미를 이제야 정확하게 알겠네요ㅎㅎ
‘그림자에 입 맞추는 자들은 그림자의 축복만을 받는다.‘의 의미요. 그림자란 배경이었군요~^^

물감 2020-06-14 22:35   좋아요 1 | URL
그렇죠. 부친은 ‘상속녀‘가 아닌 ‘딸‘을 바라봐주는 남편감을 찾아주기위해 상자의 글들을 남겼을거에요. 딸에게 대시하는 사람들은 다 잘난 신분일테니 걱정이 들었겠죠. 어쩌면 포오셔의 지혜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게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