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초 후 원더그라운드
윌리엄 R. 포르스첸 지음, 전미영 옮김 / 오픈하우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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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19는 우리 일상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고 사회의 시스템을 바꿔놓았다. 전 세계를 골고루 강타한 이번 재앙이 주는 여러 가지 교훈 중에서 나는 개인적으로 사전 대비의 중요성을 꼽는다. 인간의 힘으로 재앙 자체를 차단하는 건 불가하나 대비만 잘해도 피해가 줄어들 테니.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상 징조를 보고도 안일하게 생각하여 대처하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먹구름을 보고도 소나기일 뿐이라며 우산 없이 나갔다가 비를 쫄딱 맞은 미련한 자와도 같다. 왜 리뷰 시작부터 이런 말을 하냐면, 이 책 역시도 아무런 대비 없이 대재앙을 직면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내가 읽었던 재난 소설 중에서 이 작품의 재난이 역대 최악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지금의 코로나 사태는 이 내용에 비벼보지도 못한다. 자, 이제 젖과 꿀이 흐르던 땅이 1초 후에 황폐한 지옥으로 뒤바뀐 천조국의 이야기를 들어보시라.


갑자기 찾아온 정전으로 미국의 일상은 정지해버렸다. 거리의 자동차들이 멈추었고, 전자기기들도 먹통이었으며, 비상 전력과 배터리들도 무반응이었다. 이 모든 상황은 전자기 충격파(emp)로 발생한 재난의 시작이었다. 공중에서 터진 핵폭발로 감마선 에너지가 방출하고 전자기의 회로가 파괴되어 모든 전자 시스템이 마비된 것이다. 이제 생계에 위협을 감지한 사람들은 사재기를 하고 약탈과 폭동을 시작한다. 그렇게 고립된 미국의 소도시는 구멍 난 배처럼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장르가 장르인 만큼 시종일관 분위기가 어둡다. 전기를 못 쓴다는 게 이렇게까지 힘들 줄 상상도 못했다. 전기의 부재는 인류의 문명을 청동기 시대로 되돌려놓았고, 현대인들은 갑자기 들이닥친 위기에 손도 못써보고 죽어갔다. 죽음에 가장 가까운 건 역시 환자들이다. 맨 먼저 의료시설에 의존하는 노인들의 죽음부터 시작되었다. 병원과 약국이 전부 강도 맞은 탓에 병자들도 줄줄이 죽었다. 술 담배가 끊어지자 중독자들은 정신 질환을 일으키고, 물과 식량 부족으로 성직자마저 이성을 잃기 시작한다. 이윽고 계엄령이 내려졌지만 붕괴 중인 사회 앞에서 아무 소용이 없었다. 통제불능인 사람들로 기관 및 시설들은 제구실이 불가할뿐더러 직원들도 전부 달아나 수습할 수도 없었다. 이것만으로도 벅찬데 피난 오는 외지인도 막아야 하고, 구호물품 거래도 해야 했다. 또한 질병 보균자가 있다면 전염병이 퍼질 것도 계산해야 한다. 그리고 굶주린 개들이 언제 맹수로 돌변할지 몰라 사전에 죽이자는 제안도 나왔다. 하나부터 열까지 미국 답지 않은 생각과 정책들로 미칠 지경이었지만 감정적인 판단은 전혀 도움 되지 않았다. 이 순간에도 사람들은 죽어가고, 식량과 약품은 바닥치고, 외지인은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으니까.


지도자들 간에 의견 충돌에서 주인공은 길잡이가 되고 나침반 역할을 해준다. 작가는 주인공에게 역사학자라는 타이틀을 주어서 과거에 있었던 실수를 반복하지 말자는 교훈을 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시한부 인생의 딸 걱정으로 이기적인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는 아버지의 설정도 주었다. 겉사람은 모두를 살리기 위한 지도자의 입장이었지만, 속사람은 가족을 먼저 살리려는 한 아버지의 입장이었다. 가족이 우선인 게 당연하나,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이 혼돈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며, 언젠가 회복될 미국의 역사 속에 수치스러운 오점을 남길 것이었다. 그래서 당장의 존망을 해결하기도 숨 막혔지만 지도자로써 먼 훗날의 비전도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실체가 없는 적과의 싸움은 이 얼마나 소모적인가. 승리에 대한 기쁨도 없었고, 어디가 끝인지도 알 수 없었다.


이쪽에서는 사이비 신흥교가 일어나 지구 종말을 외치고, 저쪽에서는 인간 말종들이 강도 짓을 하고 다닌다. 미쳐돌아가는 세상이었고, 다들 죽지 못해 사는 꼴이었다. 반려동물마저 잡아먹어야 하는 악몽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미국 전역을 파괴하고 다니는 단체가 쳐들어와 전쟁을 치른다. 운 좋게 이겼다지만 대다수가 사망했고 부상자들도 치료약이 없어 서서히 죽음을 맞이했다. 같은 미국인들과의 살육전이라니, 참담한 현실이었다. 적들은 겨우 EMP 하나 터뜨렸을 뿐인데, 미국은 서로 싸우고 자멸한 것이다. 전자기 펄스 폭발은 식량난에서 민족 전쟁으로, 마침내는 전염병으로 이어졌다. 거리에 방치된 수많은 시체와, 오랫동안 치료받지 못한 질병 보균자들로 인해 면역이 약해진 사람들은 치료제 없이 병마와 싸우다 죽는다. 사랑하는 이가 눈앞에서 죽어가는데 최소한의 존엄마저도 지켜줄 수 없다는 게 얼마나 비참한지.


게임에서만 보던 EMP 충격파가 현실에서는 이렇게나 위험한 것이었다니. 이 모든 시나리오는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작가는 말하였다. 읽어보시면 이 책의 재난이 핵 전쟁이나 코로나보다도 훨씬 더 심각하다는 내 말이 이해될 것이다. 약이 없어 죽고, 굶어죽고, 강도 맞아 죽고, 전쟁으로 죽고, 역병으로 죽고, 또다시 아사하고... 그렇게 죽음은 당장이라도 산 자를 데려갈 준비가 되어있었다. 보통의 재난 소설들이 디스토피아로 바뀌는 과정에서 많은 내용을 생략하고, 몰락한 시점부터 본격적인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그러나 이 책은 시민들이 공황상태가 되고 사회가 붕괴되는 과정을 매우 디테일하게 설명하고 있다. 오늘이 지나면 이런 일이, 내일이 지나면 저런 일이 발생하는 연쇄 사건들을 자연스럽게 연결하여 정말 철저히 준비했다는 인상을 받았고, 의도한 대로 독자에게 충분한 경각심을 갖게 한다. 문학적인 시각에서 보면 부자연스러운 설정이 다소 있지만 크게 문제 될 정도는 아니다. 과학소설이 다 그렇지 뭐, 잘 알잖소? 


사막에서는 금보다 물이 귀하다는 말이 있다. 작중에서는 굶주림 끝에 인육까지 먹는 자들도 등장한다. 그런 괴물이 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사람이 현실에서는 몇이나 될까. 디스토피아 문학이 다루는 인간 군상을 보면 완전히 타락하여 짐승의 탈을 쓴 자도 있고, 아싸리 다 포기하여 추악할 대로 추악해진 자도 있고, 생존을 위해 더럽고 꺼림칙한 것도 다 받아들인 자도 있다. 우리는 인간다움을 잃어버린 이들을 마냥 혐오하고, 가족을 위해 남을 헤치는 자들을 욕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그들처럼 되지 않겠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물론 작가가 인간의 존엄성을 설명하기 위해 이 책을 쓴 것도 아니고,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준 현대 시스템에 감사하라고 쓴 것도 아니다. 언제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이 재난의 경고를 무시했다가는 우리도 청동기 시대를 맞게 될 것이다. 그러니 비 맞기 전에 우산은 미리미리 준비해두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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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04-25 13: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굶주림이 너무 고통스러우면 인육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극한의 상황에 몰리면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지키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물감 2020-04-25 23:03   좋아요 0 | URL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니 뭐니 하지만 재앙 앞에서는 들판의 짐승들과 다름이 없음을 느낍니다. 오히려 어떤 법도 규정도 없는 미물들의 세계가 인간보다 더 질서있으니까요. 비관주의를 말하는 건 아니지만 메시지가 워낙 강렬해서 말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