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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5월
평점 :
또 이런다. 이 작가의 책은 리뷰를 쓸 때마다 머릿속이 매번 백지가 되곤 한다. 그녀의 작품은 기승전결도 확실하고 이야기에 힘도 있고 재미마저 보장한다. 그렇다면 할 말이 글로 술술 써져야 정상인데 도대체 어떻게 건드려야 할지를 모르겠단 말이다. 나는 웬만하면 리뷰를 쉽게 쓰자는 편인데 이 분의 책은 그게 잘 안된다. 여하튼 유정 누님의 스릴러 3종 세트 중 하나인 이 작품은 ‘악‘이 태어나는 배경을 다룬 작품으로 소개되어있다. ‘7년의 밤‘이나 ‘28‘의 하드한 맛에 비하면 나름 소프트한 맛이므로 이전작들보단 부담이 덜 할 것이다. 반면 정유정표 고유의 서늘함을 기대했던 나에겐 매우 순한 맛으로 느껴져 살짝 심심하기까지 했다. 전에도 했던 말이지만 필력보다는 분위기로 승부하는 작가이기 때문에 이번처럼 잔잔한 긴장감 정도로는 독자의 시선을 잡아두기가 어려울 듯싶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모든 작품 중에서 이 책의 평점이 가장 낮더군. 정유정 치고 구멍이 많긴 했지만 작품성은 인정할만하다.
스토리 요약은 생략하겠다. 아무래도 일인칭 작품이라 텐션도 높지 않고 템포도 느긋한 편이다. 인간의 악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던 작가는 마침내 사이코패스가 주인공인 이 책을 써냄으로써 집착에 가까운 연구에 종지부를 찍은 듯하다. 그리하여 더 이상 스릴러를 쓰지 않을까 봐 걱정도 된다. 안 그래도 한국의 스티븐 킹이니, 스릴러 여제니 하는 수식어에 잔뜩 부담스러워 하시더만. 아무튼 작가가 보여주려는 ‘순수한 악‘은 기대보단 우려에 더 가까웠다. 이유에 대하여는 나중에 말하겠다. 일단 초반에 등장한 엄마의 죽음은 우발적인 사고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엄마의 감시 속에 살아온 주인공은 두려움과 해방감에 몸을 떨었고, 사태 수습과 함께 플랜 B를 짠다. 이제는 고삐 풀린 괴물이 되었으면서도 같이 사는 친구에게는 거짓이 아닌 진심으로 대하려 하는 게 참 아이러니했다. 엄마와 몸싸움이 있기 좀 전에도 밖에서 살인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캐릭터의 갈피를 못 잡고 비틀대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다양한 양념을 버무려 캐릭터의 완성도를 높여주었다. 길잡이 역할을 하는 머릿속의 청군과 백군, 어린 시절 수영선수 생활, 죽은 형과 하던 서바이벌 게임 등등. 지금의 인격이 형성되기까지 있었던 과거들이 그나마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만들어주어 몰입하기에는 지장이 없었다.
초반부터 죽은 엄마였지만 그녀의 존재감은 끝나지 않았다. 어찌나 시달렸던 건지 어딜 가도 엄마가 나타나 말을 걸어왔다. 그것이 주인공을 제어하든가 불을 지피든가 했어야 하는데 유진의 성격변화에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았다. 이것이 두 번째 문제였다. 악에 눈을 떠서 생각은 엄청 많이 하는데도 사고 회로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그렇게 흐름에서 멈춰버린 유진을 움직여준 것이 절친인 해진과 또 다른 감시자 이모였다. 엄마의 행방과 실종을 의심하는 두 사람 덕에 바퀴 빠진 스토리가 어떻게든 굴러간다. 유진의 진실과 마주하여 머리가 하얘지는 이모와, 슬픔과 분노가 들끓는 해진. 결국 두 사람도 유진에게 죽는다. 다만 해진을 죽게 한건 악감정으로 비롯된 게 아니어서 더 난감했다. 이렇게 감정이 많은 주인공이 상위 1% 사이코패스라니, 내 감정은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줘야 하는 거요?
엄마가 써오던 일기장을 발견하면서 수많은 의문이 차례차례 풀려나간다. 엄마의 삼엄한 감시와, 수영을 그만두게 한 이유와, 자신이 먹던 약의 정체, 엄마와 이모의 관계 등등. 그리고 아빠와 형의 죽음에 대한 기록으로 이야기는 절정을 찍는다. 형이 절벽에서 바다로 떨어지고, 형을 구하려던 아빠까지 죽었던 그날. 유진이 형을 밀어서 죽인 것으로 오해 한 엄마는 그에게 분노를 품고서 차갑게 대해왔던 것이다. 엄마의 태도가 겨우 납득이 된 주인공은 생각한다. 나를 보통 자식처럼 키워줬다면 지금의 악은 존재하지 않았을 거라고. 근데 이 대목에서 독자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일기장에는 유진의 잠재된 악이 싹트고 있다는 게 여러 번 증명돼있었다. 따라서 멀쩡한 사람이 하루아침에 악마가 된 건 아닌데, 작가가 계속 그쪽 길로 가려고 해서 뜯어말리고 싶더라. 중전마마, 뜻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이런 일인칭시점의 소설들은 흐름도 시각도 제한되어있어 지루하거나 갑갑한 인상을 준다. 주인공들도 대부분 정상인이 아닌 데다 회상씬도 많아서 때로는 인내심 테스트하는 기분도 든다. 그렇지만 이런 플롯의 작품성은 작가가 직접 주인공의 입장이 되어 글을 썼다는 데에 주목해야 한다. 혹자는 문체의 부자연스러움을 지적하는데 글쎄, 오히려 난 그것이 더 현장감 있고 좋았다. 확실히 이 책의 문체는 부자연스럽지만 그래서 더 불안정한 유진의 정신 상태를 볼 수 있지 않았나 한다. 악에 근접하기 위해 사이코패스에 빙의되어 쓴 글이라고 생각해본다면 문체나 문법의 부자연스러움도 하나의 기교가 된다. 그리고 그것이 정유정만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고 생각한다.
암튼 정유정의 글은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편인데 그래도 나랑은 잘 맞는 편이다. 여러 리뷰들을 종합해본 결과 이 책이 욕을 먹는 가장 큰 이유는 부실한 악의 통찰이다. 어쩌면 독자들이 원한 건 단순한 사이코패스의 심리가 아니라 악이 탄생하게 된 기원이나 유래를 보고 싶어 했던 게 아닌가 한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제목부터가 기원이니까. 선이 악으로 바뀌는 과정이 궁금했는데 날 때부터 포식자 DNA가 있었다는 설정에 김이 새 버렸다. 우유만 빨던 사자 새끼가 커서 사냥 본능에 눈뜨는 건 당연한 건데 여기에 별다른 이유가 있을까. 그것처럼 원래부터 포식자였던 주인공의 살인은 당연해 보였고, 이 과정에서 악의 기원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작가의 의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막막했다. 이 대목에서 아마도 많은 독자들이 별점 테러를 한 게 아닌가 싶은데, 차라리 억눌려왔던 분노를 포효하는 괴물로 변했다면 어땠을까나? 이것저것 코멘트를 달긴 했지만 재밌게 잘 읽었답니다. 갑자기 급 포장하는 느낌이 든다면 기분 탓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