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번째 카드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2-6 링컨 라임 시리즈 6
제프리 디버 지음, 유소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근무지가 바뀌어서 이제 책 읽을 시간이 대폭 줄어들게 되었다. 꽃이 지고서야 봄인 줄 알았다는 말이 어떤 뜻인지 이해될 것도 같고. 아무튼 굉장히 오랜만에 쓰는 글인데 어쩐지 손가락도 잘 안 움직이고 전두엽도 잘 안 돌아가는 기분이다. 그래서 감을 좀 찾고자 그동안 썼던 내 글들을 역주행하면서 읽어봤는데 원래 내가 추구하는 방향과 달리 너무 무겁고 딱딱하고 어두운 글의 방향으로 치우쳐진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다시 초심을 찾아 원래의 나로 되돌아갈 필요성을 느꼈다. 글쓰기 실력을 늘리려면 남의 글을 많이 읽고 공부하기에 앞서 자신의 글들을 읽으며 단점을 보완하는 게 더 급선무가 아닐까 싶다. 여하튼 독서는 힘들지언정 글쓰기는 즐거운 마음으로 써야 한다고 생각하여 겸사겸사 애정 하는 제프리 디버의 책을 골랐는데 세상에나, 이제껏 읽은 이 분의 작품 중에 가장 재미가 없었던 것이다. 원래대로 돌아가자는 결심을 하자마자 이런 책이라니. 아무리 애정 작가라도 내 안에 날뛰는 흑염룡을 말릴 순 없을거라규. 대체 그 엄청난 속도감의 스릴은 어디로 가고, 예리하던 법과학 추리도 왜 갑자기 영구와 공룡 쭈쭈처럼 돼버린거여? 엔간히 답답해서 산소호흡기로도 모자라 셀프 심폐소생술까지 해가면서 읽었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읽냐고요? 난 의리의리한 남자니깐요.


한 흑인 소녀가 괴한의 공격을 피해 도망친 뒤 경찰의 보호를 받는다. 이 사건을 담당 맡은 링컨 일행은 소녀가 조사 중이던 자신의 조상 이야기를 듣게 된다. 140년 전 해방 노예였던 소녀의 조상은 거액의 돈을 훔친 죄목으로 쫓기는 신세였었고, 당시 가족에게 여러 차례 썼던 편지에서 조상이 차마 말 못했던 일급비밀에 관심을 가진다. 어쩌면 그것이 소녀가 노려진 이유라고 생각하여 범인과 함께 140년 전의 비밀을 파헤치기로 한다. 또한 이번 범인은 지극히 평범함을 자랑하여 뚜렷한 특징이 없어서 애를 먹었고, 수사진의 방향을 틀기 위해 무고한 시민들도 가차 없이 죽이는 등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었다. 그는 할렘가에 사는 소녀에게 접근하기 위해 할렘에 능통한 자들을 섭외한다. 반면 할렘에 대해 무지했던 링컨은 예측불허한 범인의 지뢰를 수차례 밟는다. 고생 끝에 범인은 붙잡히고 소녀가 죽어야 했던 이유 또한 공개된다. 과연 편지 속 140년 전의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이번 편은 어딘가 제프리 디버 답지 않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새로운 시도를 한 것이라 봐야 하나, 것도 아니면 그 두 사이 어디쯤에 있는 건가 싶은 아리까리한 전개 방식을 보여준다. 일단 사건이 터지면 늘 그렇듯 현장에서 증거물을 찾고 법과학으로 범인을 물색한다. 여기까지는 기본적으로 똑같은데 별 내용도 긴장감도 없는 장면들로 3부까지 싹 날려버려서 어리둥절하다 못해 살짝 걱정되기까지 한다. 실컷 증거물 분석하다가 갑자기 번뜩하더니 모든 건 범인의 연출이었다며 김전일 코스프레를 시전하는 링컨의 연기력은 송강호도 울고 가겠던데? 그래 뭐 링컨도 사람인데 헛다리 짚을 수도 있지. 그런데 한두 번도 아니고 이 헛다리를 왜 자꾸 짚으시는 거야. 똑같은 패턴을 너무 울궈먹어서 뼈가 다 삭을 지경이던데? 정말이지 이건 디버답지 못한 행동이었슴돠.


작가가 새로운 시도를 한 것 같다고 느낀 데에는 불필요한 대화 장면이 늘어난 것도 한몫한다. 원래 이 시리즈가 인물보단 사건에 더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불필요한 대화 씬은 굉장히 보기 힘들었다. 근데 이번 편은 그런 장면이 유독 많아, 분량을 늘리기 위함인지 아님 새로운 변화를 주려함인지 작가를 직접 인터뷰해보고 싶어지더군. 여튼 조금도 분량을 허투루 날리는 법이 없는 양반께서 왜 갑자기 루즈해졌는지 알 턱이 없으나 그래도 명색이 스릴러 거장인 만큼 그레이트한 포텐은 빵빵 터뜨려주신다. 다만 그것이 후반전도 아니고 연장전에 나와서 지루해 죽을뻔했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당이 떨어질 대로 떨어질 즈음 초콜릿 비를 내려주시는 밀당 작가의 불친절함을 그래도 용서해주고자 한다. 중박 좀 치면 어떠랴, 슬럼프만 아니면 됐지.


이번 범인은 경찰의 시선을 계속 돌려대는 연출의 달인이었다. 어쩐지 전편의 ‘사라진 마술사‘에서 범인이 자주 쓰던 미스디렉션과 비슷한가 싶지만 약간 다르다. 마술사 범인은 눈앞에 A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B를 진행하는 패턴이고, 이번 범인은 현장을 조작하여 완전히 잘못된 방향으로 추리하게끔 만드는 패턴이다. 오로지 증거물만으로 프로파일링을 하는 링컨에게 있어 이렇게 혼선을 주는 범인은 그야말로 링컨과 상극인 셈이었다. 그러다 보니 링컨이 자꾸 영구 같은 모습을 보여줘서 그동안의 위엄이 폭삭 가라앉아 부렀지. 그래도 여러 번의 뻘짓 끝에 꼬리가 잡히고 아 드디어 수사 속도가 좀 붙으려나 기대하던 차에 그마저도 범인의 계획이었다며 통수를 친다. 진심 이 정도라면 범인이 엄청난 캐릭터라야 하는데, 이제껏 등장한 악역 중에 가장 평범하고 밋밋한 설정이라서 그것이 많은 반전 중 베스트 반전이 아닐까 싶다. 혹시 이것마저 작가의 새로운 시도였을까나.


디버는 책을 낼 때마다 배경이든 직업이든 한 특정 분야를 전문적으로 깊게 다룬다. 이번 편은 흑인 문화의 고장, 할렘이다. 나는 이 할렘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네이버에 검색해보니 1차 대전 이후 흑인들이 맨해튼 북부에 자릴 잡았으며 노후화된 주택과 가족관계가 엉망인 사람들이 가득한 빈민가의 상징이자, 반사회적인 사람들의 은신처라고 나온다. 이 책에서도 인간으로서 존중받지 못하는 흑인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사회에 불만을 표출했는데 DJ, 랩, 브레이킹 댄스, 그래피티 같은 흑인 문화운동이 바로 그것이었고, 그나마 할렘에서는 그들만의 자유를 마음껏 드러낼 수 있었다. 그런데 흑인 문화들은 차츰차츰 변질되어 할렘 거리는 힘을 잃었다. 소녀 조상이 살던 노예 시절이나 지금이나 흑인들이 받는 대우는 여전했다. 과거엔 육체를 뺏겼다면 현재는 그들의 정신을 뺏기고 있다. 겨우 이 책 한 권으로 할렘의 역사를 다 알 순 없으나 이렇게라도 관심을 갖도록 해준 작가에게 감사드린다.


솔직히 이번 편은 링컨의 추리도 엉망이고, 색스의 액션도 거의 없고, 악역도 평범하고, 동료 간에 멤버십도 거의 없어서 등장인물에게 볼거리가 전혀 없었다. 하나같이 노잼이었지만 특히 사건의 중심이었던 흑인 소녀의 땡깡 때문에 몰입이 계속 틀어져서 힘들었다. 범인이 학교까지 찾아왔는데 그래도 남아서 시험 쳐야 한다며 우기는 게 너무 어이없어서 이 정도면 제대로 설정 미스라고 생각했었다. 근데 소녀의 고집이 그렇게나 완고했던 건 하루빨리 졸업해서 할렘을 뜨고자 했던 것이며, 이번 사건으로 자신의 큰 그림이 틀어짐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소녀의 그 간절함은 어쩌면 할렘가 빈민들의 희망이 응축된 게 아닐까. 뭐가 됐건 이번 작품은 메시지 면에서는 좋았지만 재미 면에서는 진짜 영 아니었다. 성대결절이 온 김경호 언니의 무대를 보는 듯했거든. 쉬지 않고 콘서트하면 목 나가듯이, 너무 다작해서 뇌에 과부하가 온 걸 거야. 그니까 힘들 땐 시험시험 하세요. 아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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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9-09-09 16: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디버는 책을 낼 때마다 배경이든 직업이든 한 특정 분야를 전문적으로 깊게 다룬다.˝
- 저는 직업이 나오는 소설이 흥미롭더라고요. 특히 어떤 분야의 전문가는 더욱.
알랭 드 보통이 그런 말을 한 것 같아요. 독자들은 의외로 직업 세계가 나오는 소설을 좋아한다고요. 화가가 나오는 소설 <달과 6펜스>가 생각나는군요. ㅋ

물감 2019-09-09 16:33   좋아요 1 | URL
문학의 장점중 하나가 그거라고 생각해요. 새로운 직업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는거요. 어쩌면 평생동안 관심조차 못가질 직업에 대해서 약간이나마 알게 해주니까요. 물론 그것이 얕고 넓은 지식에 그칠지라도 새로운것을 알아간다는건 기쁜일이죠ㅎㅎ
달과 6펜스는 아직 못읽었는데 한번 봐야겠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