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티야의 여름
트리베니언 지음, 최필원 옮김 / 펄스 / 2016년 8월
평점 :
절판


내놓은 소설마다 히트 쳤다는 그레이트한 작가라는데 나는 전혀 모르고 있다가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스릴러 작가로 유명하시드만 어째 이 책은 순문학과 고전소설의 분위기를 더 띄고 있다. 그래서 다들 읽어보면 현대판 고전을 보는 기분이 들어 어리둥절해한다. 그러나 후반부로 가면 쏟아내는 반전에 반전으로 독자들을 쥐락펴락하는 것을 볼 것이다. 이 분도 애거사 크리스티처럼 전반전과 후반전의 온도차가 심한 작가 같다. 이런 걸 볼 때면 확실히 옛날 작가들이 내공도 스케일도 발상도 훨씬 더 끝내줬던 것 같음. 현대작가들은 뭐랄까, 맛은 얼추 맞추지만 깊은 맛이 부족해서 아쉬울 때가 많다. 짠 거 먹으면 단거 땡기듯이 가끔은 이렇게 노장들의 묵직함이 확 땡기곤 한다. 그래서 지금 나 기분 좋아져쓰.


작은 마을의 의사로 일하는 주인공에게 카티야가 찾아온다. 그녀를 따라가 다친 쌍둥이 남동생을 치료해주면서 그녀의 가족과 인연을 맺는 주인공. 당시 품위 있고 고상한 프랑스 숙녀들과 달리 당돌하면서도 어딘가 몽환적인 그녀의 매력에 푹 빠져버린다. 그는 일과가 끝나면 매일 그녀의 집으로 출첵하며 카티야 가족들과 시간을 보낸다. 그런데 무례한 동생 놈이 절대 누나와 썸 타지 말라고 핏대 세우며 경고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오직 사랑, 오직 카티야였던 의사는 구애 활동을 멈추지 않았고, 집안 사정으로 발목 잡힌 그녀를 구제해주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죽어도 사정을 밝힐 수 없다는 이 집안은 일주일 뒤에 이 동네를 뜨기로 한다. 의사는 완강한 동생을 말려보지만 떠날 수밖에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대체 그들은 어떤 사정이 있기에 쫓기듯 떠나야 하는가. 정말 이대로 첫사랑 카티야를 보내야만 하는 걸까.


타고난 이야기꾼을 만난 기념으로 삼삼칠 기립박수를 쳐주었다. 이 정도로 짧고 굵게 임팩트 때리는 작품을 거의 본 적이 없다. 한 남자의 순애보를 잔잔하게 그려나가다 갑자기 장르를 전환하여 미친 듯이 단타를 날리는 플롯이라니. 이런 게 왜 치명적이냐면 방금 전까지도 소풍 날씨였는데 갑자기 천둥 번개 우박 태풍이 한꺼번에 몰아치는 듯한 당황함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물론 몇몇 가지의 떡밥은 대놓고 보여주었지만 딱히 그것들이 별 의미도 없어 보였기에 독자들은 스릴러라는 장르를 망각하고 느긋하게 읽으며 방심하게 되는 것이다. 읽어보면 아실 텐데 이 작품은 시간도 짧고 장소도 한정되고 인물도 아주 적다. 그런 최소한의 조건만으로도 이 정도의 퀄리티를 뽑아냈다는 사실에 놀랐다. 진짜 그레이트한 작가였음.


일단 몇 없는 등장인물의 뚜렷한 캐릭터성이 매우 훌륭했다. 카티야부터 말하자면 교양 있는 척하지 않았고 자연에 동화되어 즐거워했다가 갑자기 몽상에 빠져 저만의 세상에 노닐던 살짝 사차원 끼를 보여주는 여자였다. 동생을 의지하면서도 멋대로 행동하는 철부지 같은 면모도 보여주는 그녀. 요즘 남자들이 환장할만한 미를 골고루 갖춘 그녀를 흠모하는 주인공 몽장. 그는 신사다움, 허세, 윤리, 정의로움, 낭만이 약간씩 들어있는 어중간한 순진남이다. 이런 캐릭터가 요즘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자주 보이는 이유는 여러 상황에 써먹을 데가 많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 역시 사랑에 울부짖고 답답함에 울분을 표했다가 간혹 허당 미도 보여주는 다채로운 매력을 발산한다. 그런 의사를 견제하는 카티야의 남동생 폴은 까칠함과 무례함의 아이콘으로 프랑스 버전의 나쁜 남자라 할 수 있다. 툴툴대면서도 가족을 끔찍이 챙기는 동생은 이 책에서 가장 비중 높고 존재감 있는 캐릭터이다. 누나에게 흑심을 품는 주인공을 경고할 때 자신이 킥복싱 선수였다고 으름장 놓는 게 어찌나 웃기던지. 유치하게 굴면서도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려는 폴이 밉상이라기보단 그저 귀여웠다. 동생보다 더 매력 있는 아버지와 의사 어르신이 더 있지만 이건 패스한다. 아무튼 인물 설정은 정말 칭찬해줘야 함.


카티야 집안사람들은 말도 생각도 전부 일방통행이다. 집안의 가장 역할을 맡은 동생은 권위적인 말을 자주 뱉고, 부친은 아무도 관심 없는 역사에 대해서 늘어놓고, 카티야는 백일몽에 계속 빠져있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 이런 독특한 가족에게 계속 정붙이는 주인공을 봐서라도 집안의 비밀을 말해주거나 귀띔이라도 해줄 줄 알았는데 끝까지 안 알려주려고 하데? 그래서 분명 범죄에 연루되었다고 생각은 했지만 내막은 예상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어쩌다 그 집의 비극을 알게 된 몽장은 왜 그들이 쫓기는 신세가 되었으며, 동생은 왜 그따위로 삐딱해졌으며, 왜 카티야를 사랑하면 안 되었는지 모두 알게 된다. 처음엔 동생의 과도한 경고가 일종의 질투심에서 비롯된 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앞전에 그녀를 사랑한 남자에게 성폭행당한 카티야를 보호하기 위함이었고, 그러면 동생이 과잉보호할만하다며 납득 중이었는데 그보다 더한 비밀과 반전이 준비되어있었다. 마치 바나나 껍질을 벗겨보니 후랑크소세지가 들어있는 정도의 당황스러움과 충격이랄까.


사랑을 시작할 때는 상대방에 대한 내 감정만 생각하다가 사랑이 한참 진행되면 그 사람의 배경을 안 볼 수가 없게 된다. 제아무리 낭만파에 로맨티스트 사랑꾼이라도 현실을 부딪힐 때가 오고 부담을 안고 갈지 말지를 고민하는 시기가 찾아온다. 상대방을 아무리 사랑해도 나 자신이 다치는 걸 방치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주인공도 첫사랑의 복잡한 사정을 듣고 나자 뜨거운 여름 같았던 마음이 점점 찬바람 부는 겨울로 바뀌어간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어떻게든 불행 속에 갇힌 그녀를 꺼내주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준다. 안타깝게도 새드엔딩이지만. 이 책이 스릴러 소설이긴 해도 나는 하나의 고전문학처럼 읽었다. 특히 주인공의 순애보가 고전 속의 여러 사랑꾼들과 닮아있었고, 금지된 사랑 속에 담긴 페이소스도 현대문학 스타일과는 다르게 보여서 신선했다. 이 작가도 관심 작가 명단에 추가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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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9-08-25 19: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관심 작가 발견을 축하합니다. 제가 요즘 두 번 읽을 수 있는 책을 고르려고 하거든요. 관심 작품을 찾는 거죠.
다작보다 두 번 이상 읽는 정독을 하고자 합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나 책을 만나는 건 행운인 것 같습니다.

물감 2019-08-26 08:29   좋아요 1 | URL
자신과 맞는 작가를 만나면 정말 기분좋죠. 이제 저는 ‘나중에 다시 읽을‘ 책만 구매합니다. 한번 읽고 끝날 책은 소장할 필요를 못느껴서요. 저도 이웃분들처럼 벽 한면을 책으로 꽉 채워보고 싶은데 그만큼 소장하고 싶은 책이 별로 없어서 아쉬워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