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 그리고 한 인생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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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아끼던 개가 차에 치였고, 동네 아저씨가 총살로 생을 마감시켜주었다. 멘탈이 나간 주인공은 그 아저씨의 어린 아들을 고의 같은 실수로 때려죽인다. 정신 차려보니 벌어진 사태에 어찌할 바 모르다가 숲속 구덩이에 시체를 밀어 넣고 나 몰라라 해본다지만 살인자가 된 이 어린 친구는 죄책감으로 하루하루 피가 마른다.

작가의 필력은 여전히 흠잡을 데가 없지만 이번 플롯은 너무 단순해서 사실 의외였다. ‘오르부아르‘에서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캐릭터들과 종잡을 수 없는 흐름이 나의 전두엽을 들었다 놨다 했었는데 이 책은 전혀 흥분되지 않았단 말이다. 오히려 주인공이 그냥 잡히길 바라는 마음이었는데 그래서였을까, 소년의 모든 불안들이 그렇게 확 와닿지는 않더라.

전에 읽었던 야쿠마루 가쿠의 ‘돌이킬 수 없는 약속‘과도 같은 심정이었다. 주인공이 범죄자 입장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개과천선하더라도 응원하긴 뭐 하고, 충분히 고통받고 괴로워하는데 욕하기도 애매한 어중간한 기분으로 읽게 된다. 아무튼 자수할까 말까를 계속 고뇌하느라 12살 소년의 심정은 120년을 산 것처럼 늙고 초췌해져버린다.

중반부터는 도시에 큰 태풍이 불어닥쳐 온 집안과 동네가 난장판이 되는 장면이 나온다. 실종된 아이를 찾는 내용과, 주인공이 두려워하는 내용만으론 분량이 부족해서 이런 자연재해라도 집어넣은 걸까 하고 불만이 생길 즘에 재난으로 사상자와 피해자가 속출하여 아이를 수색하는 일이 중단된다. 이런 영화 같은 상황 연출에 무릎을 치면서 다시는 의심하지 않을 것을 맹세한다.

이후 고향을 떠나 타지에 가서도 주인공의 공황감은 좀처럼 나아지질 않는다. 어릴 적 좋아하던 여학생과 딱 한번 저지른 불장난이 원치 않는 임신이 되어버렸고, 죽은 아이를 묻었던 숲이 재개발 들어간다고 해서 시체가 발견될까 걱정되는 와중에 어머니까지 교통사고를 크게 당해 그의 정신은 극한에 다다른다.

이쯤부터는 나도 주인공이 슬슬 불쌍하게 느껴지긴 했다. 이런 것도 다 인과응보라 하긴 좀 그러니까, 작가가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각각의 시련들이 다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닌가. 역시 이 작가는 기막힌 설계자였다. ‘오르부아르‘ 후속편도 있다는데 국내에도 어서 어서 출간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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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08-31 15: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기막힌 설계를 한 고전 문학을 읽다 보면 그때의 작가들이 다 천재가 아니었을까 추측하게 됩니다.
컴퓨터 자판 없이 펜으로 글을 쓰고 - 대단한 육체적 노동이겠죠.
인터넷 검색도 없이 그것도 길게 장편소설을 쓰다니...
두꺼운 <죄와 벌>을 읽고도 도스토예프스키는 천재야, 라고 생각했죠.

물감 2018-08-31 15:43   좋아요 1 | URL
전에 어떤 리뷰에 쓴 내용인데요, 세계의 거장들은 이미 옛시기에 다 쏟아져나온거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천재는 이미 과거에 품절되버린게 아닐까 해요. 그래서인지 요즘은 천재적 재능을 가진 작가를 발견하면 너무 놀랍니다. 요즘도 있긴 하구나 하고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