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터 2016.5
샘터 편집부 엮음 / 샘터사(잡지) / 2016년 4월
평점 :
품절


강렬한 붉은 색의 표지가 눈길을 끈다. 생각지 못하고 그저 그냥 넘겨 왔는데 이번 년도의 표지는 김상구 판화작가의 작품으로 꾸며진다는 소개글을 보았다. 새삼스럽게 표지가 다시 보아진다. 지난 호들도 모아서 다시 들여다본다. 하나의 작품이라고 생각하니 그냥 넘겼을 때보다 더 잘 보아진다. 멀리서도 보고 가까이서도 본다. 그림을 볼떄는 잠시나마 행복한 느낌이 든다. 비록 그 그림을 이해하고 말고 간에 말이다. 더더군다나 이런 강렬한 색감의 그림이라면 약간은 더 행복하고 열정적인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번달에 만난 사람은 신구 선생님이다. '꽃보다 청춘'에서 '구야형'으로 통하는 이 배우는 여든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역으로 현장을 누비는 활동가이다. 그의 열정이, 젊음이, 노력이 새삼 부럽다. 내가 여든이라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늙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시대의 아버지 상이라고 했지만 나는 그에게서 아버지보다는 그저 오빠 같은 젊음을 느낀다. 평생 젊음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이번달 특집은 갱년기였다. 저마다 자신만의 갱년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사춘기인 자식들 또는 손주들 과 아옹다옹 하는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고 자신만의 극복방법을 글로써 표현하기도 했다. 글들을 보며서 생각해본다. 나 또한 멀지 않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일단 파릇하던 이십대는 벌써 오래전 일이니 말이다. 학창 시절의 친구들을 만나면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변함없는 것 같은데 시간을 우리를 늙게 만들었다. 자식도, 손자들도 없는 나는 어떤 갱년기를 맞이하게 될까. 변함없이 책과 친구하며 살아갈테니 괜찮다, 별다를 것 없다라는 말로 위안을 해본다.

 

남서방의 처방전을 통해서는 당뇨병의 위험을 새삼 깨닫는다. 운동을 전혀 하지 않는 나는 그만큼 더 위험군에 속해 있을 것이고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병이 드는 것은 아니가 하고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2년전 검사에서 약간은 혈당이 높다고 나왔었고 평소에도 탄수화물을 중심으로 식사를 하며 초콜릿을 좋아하는 나는 겁이 났다. 이번 년도가 지나기전에 다시 건강검진을 받아야 한다. 사실 귀찮다. 그렇지만 건너뛰지는 말아야겠다고 다시 한번 생각을 해보게 된다. 혼자일수록 내 건강은 더 지켜야 하니까말이다.

 

알지 못했던 건축물을 보는 재미,  또 접하지 못했던 책소개와 영화소개등 일반적인 다양함이 가득한 샘터. 이번 호에서는 특별히 2016 샘터상 발표작이 들어있어서 더욱 반갑다. 어려워보여서 엄두도 내지못했던 시조를 찬찬히 읽어보면서 굉장하다 하며 감탄도 하고 생활수기작품들을 보면서 더 열심히 바지런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짐도 해본다.

 

상을 받은 작품 중 하나인 동화를 보면서 이런 감성으로, 이런 상상력으로 동화를 쓸수도 있겠다라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다들 뛰어난 분들이 너무 많아서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보통사람들의 보통의 글이라고 생각했는데 수준들이 보통 이상이다. 나에게 샘터는 항상 그런 존재이다. 보통으로 보이나 보통이지 않은, 보통 이상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그런 책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설가는 늙지 않는다
현기영 지음 / 다산책방 / 201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떤 장르보다도 작가의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를, 또는 생각을 엿볼수 있는 것이 에세이라는 장르일것이다. 허구를 추구하는소설의 특성상 작가의 생각을 담기에는 조금은 어려울때가 많고 상징성을 중요시하는 시의 특성상 그 역시 작가의 개인적인 생각을 드러내기는 제약이 다른다. 수필이라는 장르는 자신의 신변잡기적인 이야기가 들어가기도 하고 자신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고 쓰기도 하고 어떤 사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쓰기도 하는 경우가 많아서 작가를 가장 잘 이해할수 있는 장르가 아닐까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의 예를 들어보자. 학교다닐때 그의 작품을 읽었다.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소설을 통해서 그의 작품을 처음 접했다. 그리고 어'둠의 저편'이라던지 몇몇 작품을 통해서 그의 소설임을 특징을 잡아낼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난 후 '잡문집'이라는 책을 통해서 느꼈던 하루키라는 사람은 소설에서 알고 있는 내가 알던 그 작가와는 또다른 이미지였다. 어두울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사실 소설이라는 장르속에서만이라는 것을 그제야 알았던 것이다. 또한 그가 그렇게 음악을 좋아하고 매니아인줄도 그때서야 알았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에세이는 가장 작가를 잘 드러내준다고 할 수 있겠다.

 

현기영 산문집. 운문과는 다른 산문. 작가만의 생각을 제약없이 표현 할수 있는 장르. 이 작가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어서 전혀 아무 맥락도 없이 읽었는지도 모르겠다. 단지 책이 새로 나온 것을 알았고 누군가가 읽어보고 싶다고 했고 그래서 그 김에 나도 한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만약 내가 작가에 대해서 알아보고 조사를 해보고 어떤 작품을 썼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나는 이 작가의 작품을 읽지 않고 넘겼을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말이다.

 

사실 제목과 띠지만 보고 늙어감에 관한 자연스러운 생각들을 주로 적어 두었을줄로만 알았다. 하루하루 나이가 들어가는 이 시점에 다른 사람들이, 같이 나이들어가는 사람들이, 이미 나보다는 조금 더 세상을 살아간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솔직한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보고 싶었던 것도 같다.

 

4.3사건을 비롯해서 강정 사건까지 자신의 주장을 펼펴내는 작가의 주장이 당연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까칠했다.  이 책을 통해서 제주에 무슨 사건이 있었고 어떤 일이 있었으며 그것이 무엇이 원인이 되어 그런지도 알게되었지만 내가 기대했던 것이 그런 종류의 글은 아니었기 때문에 약간은 아쉬웠다. 나는 잔잔한 산사의 새소리나 풍경소리를 기대하며 책을 펼쳤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 시끄러운 데모현장에 와 있는 느낌이랄까.

 

그러나 이 작가를 잘 알고 있고 그의 작품을 읽는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공감하면서 읽을지도 모르겠다. 또한 그와 같은 정치노선을 동조하는 사람들이라면 더욱 관심이 가는 이야기들이 가득 담겨져 있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작가와 함께 대담을 나누고 싶은 독자들이 있을지도 모르고 이 책을 통해서 아예 그들은 무언의 대화를 나누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소설가는 늙지 않는다는 제목답게 아마 작가는 영원히 늙지 않을것만 같은 느낌이다. 허구를 꿈꾸고 상상을 계속 하는 사람들은 나이가 들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천사들의 탐정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9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하드보일드를 쓰는 작가 하라 료의 작품은 많지는 않지만 꽤 알려져 있는 편이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하드보일드라는 장르를 별로 선호하는 편은 아니라서 약간 외면하는 경향도 있다. 장르소설중에서도 스릴러나 추리나 경찰소설이나 다른 크라임류에 비해서 내가 항상 주장하곤 하는 퍽퍽한 노른자에 비유되는 하드보일드. 가끔씩은 너무 삶아 익혀버린 달걀노른자처럼 퍽퍽함에 목이 메일 지경까지 이른 적이 있다보니 약간은 한발 물러서게 된다.

 

하라료는 그런 하드보일드의 대가라 불리운다. 그의 작품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안녕, 긴잠이여] 라는 책을 통해서 이미 만나본 적이 있고 그 다른 사람들은 어떠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책을 통해서 하드보일드의 제대로 된 퍽퍽함을 경험한 바 있다. 그래서 이번에도 마음의 준비를 먼저했다. 퍽퍽함을 삼키기 위한 준비를 했던 것이다.

 

왠걸 이번 이야기는 그렇지 않다. 아니 전혀 그렇지 않다. 기껏 미리 대비를 해놓았던 것이 덧없어져버렸다. 하드보일드보단 훨씬 더 말랑하말랑하다. 그러함으로 인해서 목맬듯이 한글자한글자 읽혀져 내려가던 것조차 물 흘러가듯 줄줄 흘러 내려간다. 어쩜 이리도 잘 읽힐수  있는지 나조차도 놀랍다. 이런 이야기도 쓸 수 있는 작가였어? 하다하고 다시 한번 들여다보게 된다. 내가 전에 읽었던 그 작가의 작품이 맞는가 싶어 의심도 하게 된다. 아마 이후 읽었던 그의 작품들을 다시 한번 꺼내어 보는 계기가 될 것 같다.

 

아마도 그런 원인에는 이 책이 단편이라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이 탐정이다 보니 이 사무소에 의뢰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각각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다. 하나의 이야기가 거기서 마무리가 되고 다른 이야기에서 이어지지 않는다. 그럼으로 인해서 한 편씩 읽어내려갈때마다 긴장으로 조였던 마음을 한번씩 풀어주고 넘어간다.

 

또한 소재자체도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다. 일본에서는 탐정이라는 사무소가 자유롭게 있다고는 하나 그들의 일도 마찬가지이다. 심각한 사항들은 경찰에서 담당을 하고 그들이 하는 일은 일반 사람들의 의뢰를 받는 일인데 가드를 해달라는 내용이거나 또는 누군가를 미행해서 정보를 캐내달라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인해서 큰 스케일이나 심각한 내용들은 없는 편이다.

 

하라 료의 퍽퍽함을 기대한 사람들에게는 조금은 서운할 소식일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처럼 퍽퍽함을 싫어하는 사람들이라면 오히려 하라 료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하드보일드 작가의 말랑함을 느끼고 싶은가. 당장 펼쳐볼 일이다. 장르소설의 기본서라고 해도 충분할 정도의 만족감을 나타내는 작품. 심각한 장르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할 수도 있어서 그야말로 여기저기 팔방미인이 따로 없고 안성마춤이 따로 없다. 솔직히 기대이상의 작품이라서 더욱 즐겁다. 다음에는 퍽퍽함일까 말랑함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격전이의 살인 스토리콜렉터 42
니시자와 야스히코 지음, 이하윤 옮김 / 북로드 / 2016년 5월
평점 :
절판


사람들은 거울을 통해서만이 자신의 모습을 볼수 있다. 거울로 비쳐지는 자신의 모습은 왼쪽과 오른쪽이 바뀌어 있으니 온전한 모습이라고 할수는 없다. 그것이 아니면 사진이나 동영상 같은 다른 매체를 사용해야만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내가 보는 다른 '나'가 있다. 난 분명 여기 있는데 내 앞의 다른 내가 있는 것이다. 말도 하고 움직인다. 단 내가 아닌 것 같은 몸짓과 목소리로 움직이고 말을 한다. 나는 누구고 저 앞에 있는 나는 또 누군가.

 
인격전이. 말이 어려워 그렇지 그냥 한자어로 풀면 이해하기 쉽다. 인간은 누구나 인격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인간의 격조 즉 자기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면 쉽겠다. 그런 나만의 인격이 전이 즉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는 것이다. 그게 가능할 것인가라고 물어보지만 이렇게 상상속에서 또는 픽션 속에서는 가능한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스위치서클, 두사람이 그 속에 들어가면 그 둘간에 인격전이가 일어난다. 그가 내가 되고 내가 그가 되는 것이다. 즉 나는 다른 사람의 인격을 가진 내 몸을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서 들여다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얼마나 기이하면서도 놀라운 체험일까. 하지만 그것은 결코 재미나기만 한 경험은 아니다. 일단 한번 그렇게 전이가 시작되고 아나면 나는 내몸으로 돌아올 수가 없다. 아니 "매스커레이드"라는 것을 통해서 몇 백번쯤 또는 몇만번쯤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영원히 원래처럼 내 몸에 내 인격이 고정되어 머무를 수는 없게 되는 것이다.
 
마치 계약기간이 끝나서 이사를 가야하는 집처럼 말이다. 단 이사는 기간이라도 정해져 있지 이 매스커레이드란 시스템은 언제 일어날지, 어떤 주기로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그냥 나는 이 곳에 가만히 있고 싶은데 어떤 파워에 의해서 나는 밀려나서 다른 몸에 가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단 둘간의 문제라면 그나마 조금은 덜 머리가 아프게 된다. 그 둘만 붙어 있으면 적응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것이 다인체제로 바뀌게 되면 큰 혼란이 일어난다. 그 인원수대로 계속 하나씩 시계방향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눈에 잘 띄지 않는 한 음식점. 그곳에 어쩌다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그러다 사건이 일어나고 사람들은 몸을 피하기 위해서 쉘터라고 이름붙여진 공간으로 들어가는데 그곳에서 그들은 인격전이가 일어난다. 그들이 살던 곳에서는 죽은 것으로 포장되어 버리고 이동한 그들은 앞으로 어떤 생을 살아야 할 것인가. 여섯명이서 저마다 한곳에 모여 있지만 살아온 곳도 생각도 모두 다른 그들은 어떤 결론에 도달할 수 있게 될 것인가.
 
과학이 발달하면서 이식이라는 개념이 생겨났고 자신이 아픈 부분을 다른 사람의 장기를 받아서 이식하는 방법이 마지막 수단으로 쓰이고 있다. 같은 인간의 장기가 가장 좋지만 항상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므로 대체제를 사용하기도 한다. 언젠가 사람의 뇌도 이식할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나오기도 했었다. 뇌사 상태에 빠진 사람. 그들은 몸은 멀쩡하지만 뇌는 죽었다. 그렇게되면 인간의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의 뇌를 뇌는 멀쩡하지만 신체가 부자유스러운 사람들의 뇌로 바꾸면 그 사람은 원래 그 사람일까 아니면 뇌가 바뀌었으니 다른 사람일까 하는 문제가 윤리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했었다.
 
이 소설은 단지 이야기를 만든것일뿐이지만 혹시라도 나중에 뇌이식이 가능하게 된다면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도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이라는 존재를 과연 겉으로 보여지는 외적인 모습과 그 속에 존재하는 인격인 내적인 모습 중 어느쪽을 진정한 사람으로 인식해야 하는가.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는 문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신병원을 탈출한 여신 프레야 프레야 시리즈
매튜 로렌스 지음, 김세경 옮김 / 아작 / 201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신이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미친 사람 취급하며 정신병원에 가두지 나 않을까. 하지만 세상에는 자기가 신인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다. 한때 젊은이들이 열광했던 교파도 있고 아직도 전세계에 굳건한 신도들을 거느리고 있는 통일교 조차도 결국은 한 인간을 신으로 받들어 모시는 것이 아니었던가.

 

이 책은 신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나 내가 앞에서 말했듯이 신에 관한 논쟁을 하거나 신에 관한 설명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신의 존재에 관한 판타지이다. 신을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다니 작가의 상상력에 놀람을 금치 않을수가 없다. '나는 정신병원에 산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고 있는 이 작품은 프레야라는 한 신에 관한 이야기다.

 

그녀는 정신병원에 살지만 미친 것은 아니다 단지 그곳이 편할 뿐이다.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그 곳에서 살고있는지 꽤 오래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이제는 그만 둬야 할 대가 온 것 같다. 누군가 자신을 공격하는 것을 느끼고 그녀는 한명의 신도를 동행자삼아 그곳을 빠져나오게 된다. 오랜 시간동안 정신병원에서만 살아온 그녀, 과연 이 세상에서 잘 적응할 수 있을가. 그녀를 공격한 사람은 누구이며 그녀가 대응하려고 했을때 연기처럼 사라진 것은 그 사람 또한 신이라는 것을 드러내주는 것일까.

 

병원의 신입직원 나단을 신도로 삼아 그곳을 나오게 된 프레야는 나단이 권하는대로 많은 사람들 속에서 묻히는 삶을 선택하려 한다. 어디서든 평범하게 있으면 튀지 않는 법이다라는 것을 가장 잘 알고 실천하려고 한 것이다. 그들의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고 그들을 끊임없이 자신을 찾아내는 한 존재와 대면하게 된다. 결국은 피넴디, 라틴어로 신들의 죽음이라는 한 회사로 끌겨가게 된 프레야와 나단. 그곳에서 그들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놀랍게도 그 곳에는 프레야 뿐 아니라 온갖 종류의 신들이 다 와 있다. 신들에게 온갖 편의를 제공해주며 사람과 신의 음식까지도 달리 제공해주는 곳. 모든 것을 그냥 베풀어주지는 않을 것이고 그곳에서 신들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들은 왜 더 많은 신들을 영입하려고 노력하는 것일까. 신이라는 존재는 인간보다 뛰어난 존재를 의미한다. 전통적으로 그러했다. 그래서 인간들은 신들을 숭배하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행동을 했고 그들을 믿음으로써 더 많은 기적을 바라곤 했었다.

 

하지만 이 현실세계는 다르다. 인간이 신보다 더 우위에 있다. 비록 음식을 차별을 두었지만 그것은 신에게 더 좋은 것을 먹여서 부리겠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자신은 못 먹더라도 돼지에게는 먹을 것을 주던 우리의 선조들과 다름 없는 이치다. 인간들이 신을 이용해서 어떤 이익을 얻기를 원하는 것일까. 많은 신들 가운데서 프레야는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

 

북유럽신화에서 등장하는 프레야는 사랑과 전쟁의 신이라고 알려져 있다. 우리에게 그리스신화와 로마신화는 어느 정도 익숙한 편이지만 북유럽신화는 낯설다. 검색에 프레야라는 단어를 쳐봐도 동대문 상가단지만 검색될 뿐 여신의 이름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이 세상에서 세라라는 이름을 존재하던 프레야는 참 원통할지도 모르겠다.

 

묻혀지고 잊혀지고 있는 신화적인 존재를 되살려서 그들을 인간의 도구로 사용한다는 발상은 판타지 소설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결국은 인간과 신의 대결의 구조로 보아야 할 것인가.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이야기. 프레야의 모험은 계속 될 것만 같은 느낌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