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푸른빛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조르주 바타유 지음, 이재형 옮김 / 비채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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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떠보니 머리 위로 별이 다시 보였지만 나는 태양에 미쳐 있었다. 웃고 싶었다. 내일이면 작고 또 멀리 떨어져 있어서 하늘의 섬광을 조금도 약화시키지 못할 비행기가 시끄러운 한 마리 곤충처럼 내게 나타날 것이다. (158 p)

[눈이야기]로 작가의 전작을 읽은 바 같은 맥락으로 읽어가면 조금은 더 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나만의 선입견이고 편견이고 오만이고 도전이었다. 에로티슴 문학이라고 생각하면서 읽었던 눈이야기. 질펀한 장면들과 상상하기 조차 힘들었던 청춘들의 방황을 그린 작품이 눈 이야기였다면 같은 에로티슴이라 하더라도 전혀 다르게 흘러가는 이야기는 조르주 바타유가 굉장한 작가였구나 하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너무'라는 의미의 프랑스어와 '인간'을 나타내는 영어단어가 합해져 만들어진 이름 트로프만. 주인공 이름이자 여자 셋을 사랑한 한 남자의 이름이기도 하다. 차지연의 의해 쓰여진 해제에 따르면 이 주인공은 '잉여인간'이나 또는 '너무나도 인간적인 존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하는데 저자의 말대로 슬집과 사창가를 드나들며 간간히 글을 쓰는 주인공은 작가의 젊은 시절을 모습과 다르지 않다고 한다.

 

즉 작가는 자신의 모습을 주인공에게 투영시켜 담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허구적인 작품이기는 하지만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와 더불어 그 때 당시 유럽의 정치적 상황이 고스런히 깔린 작품. 눈이야기보다 이 책이 나오기 더 힘들었던 것은 외설적인 묘사보다도 정치적인 문제 때문에 더욱 그랬을 것지도 모른다.

 

이 책에 부제를 붙인다면 '트로프만과 세여자'가 아닐까. 아내 에디트가 있으면서도 디르티, 라자르 그리고 크세니까지 세명의 여자와 관계를 맺게 되는 트로프만. 첫번째 여자인 디르티. 독특한 이름의 그녀는 영어로는 DIRTY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어느 누구가 그러한 이름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도로테아라는 원래의 이름보다도 '디르티'라는 이름이 왠지 모르게 더욱 어울리는 그녀. 이름은 더러울지 몰라도 그녀를 통해서 트로프만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고귀함을 느끼게 된다.

 

디르티라는 여자가 그에게 반어적인 의미로 연관되어 있다면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여자 '라자르'는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투사의 모습을 보이는 그녀. 바로셀로나에서 투쟁을 준비하는 그녀를 대하는 트로프만의 태도는 공산주의를 지지하면서도 동조할 수 없었던 작가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눈이야기에서 나란 존재에 시몬과 마르셀이란 두 명의 여자가 삼각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마르셀'과 같은 존재가 이 책에서는 '크세니'라고 할 수 있다. 주된 캐릭터는 아닌 것 같으면서도 전적으로 주인공만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는 그녀. 아내 에디트는 없고 장모와 함께 있는 그의 집에 들어가서 아픈 그를 간호해 주는 크세니. 이 어찌 헌신적이지 않으랴.

 

눈이야기의 마르셀 또한 그랬다. 나는 시몬과 먼저 정을 통하지만 그것으로는 모자란 면이 있었을까. 결국 순수한 마르셀까지 동참시켜서 관계를 하게 된다. 시몬이 주된 가지라면 마르셀은 그에 달린 곁가지다. 곁가지 또한 없다면 밍숭맹숭한 나무가 될 수 있으니 꼭 필요한 존재일터. 크세니도 그러한 존재이다.

 

도로테아가 오고 있는 가운데 크세니가 먼저 도착한다. 그러나 먼저 도착한 크세니는 트로프만의 환대를 받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미루어지게 된다. 결국 트로프만은 도로테아만을 위해 기다렸던 것이다. 이처럼 무시당할 줄 알면서도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로지 그만 바라보는 크세니의  모습을 알아주었으면 했다. 누구라도 말이다.

 

에로티슴 소설이라고 해서 외설적으로만 보여지는 것은 아닐 터이다. 작가는 에로티슴을 통해서 죽음을 설명하려 했고 그 둘을 연결하려 했다. 트로프만을 통해서 그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의 이미지를 닮은 주인공을 내세운 것은 보다 주관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보다 깊은 의미의 고찰이 필요해지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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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이야기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조르주 바타유 지음, 이재형 옮김 / 비채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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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나는 인간이나 짐승의 불알이 달걀 모양이며, 그 외관도 안구의 그것과 똑같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31p)

내 마음대로 '눈알시리즈'라고 이름 붙인 두권의 책이 있다. [눈알사냥꾼]과 [눈알수집가]. 제목의 강렬함에 반해 기억하고 있을 뿐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다.  [눈이야기]라는 제목을 보는 순간 나는 한순간에 바로 그 시리즈를 생각해냈다. '눈'은 여기서 어떤 소재로  쓰이고 있는가.


눈알, 불알, 닭알. 동그랗고 조그마한 그 소재들은 이 책에서 아주 중요한 존재들이다. 작가가 드러내 놓고 '눈이야기'라고 제목을 붙일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닌 그것들. 상징적인 의미로, 비유적인 의미로 또 다르게는 직접적인 의미로 쓰이는 그 소재들은 각기 저마다의 존재를 구석구석에서 발휘하고 있다. 작고 동그란것. 충분히 에로틱하다.


작가인 조르주 바티유는 성직자를 꿈꾸기도 했지만 평생을 사서로 일했다. 성직자의 꿈을 꾸기도 한만큼 종교철학에 관한 글들도 많이 썼고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글들을 써왔다. 하지만 그의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하면 '사드의 적자'라 불릴만큼 매음굴을 전전하며 써내려간 에로티슴 소설을 빼놓을 수 없겠다. 특히 죽음과 에로티슴을 다룬  소설이 바로 이 책인데 첫장면부터 강렬한 인상을 받기에 충분히 매혹적이다.


해변에서 또래의 여자아이 시몬을 만나게 되는 날. 서로를 알게 되고 사흘 후 단 둘만 남게 되었을때 시몬이 두르고 있는 앞치마 밑으로는 완전히 발가벗고 있기를 바랄만큼 내가 느끼는 불안감을 그녀도 역시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아낸다. 그 이후 나와 시몬의 관계는 어떻게 발전하게 될까. 지극히 당연한 일대일의 관계는 배제된다.


두명으로는 약하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작가는 여기서 마르셀이라는 여자아이를 더하여 스리섬의 외관을 취한다. 흔히 알고 있는 그런 관계가 아닌 조금은 다른 형태의 관계를 추구하는 그들 세명. 열여섯이 될 무렵 만났던 그들. 한창 성에 눈뜨고 궁금해 할 때임에 틀림은 없지만 이 관계들은 어떻게 보면 어른들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치닫게 된다. 결국 마르셀은 어른들에 의해 정신병원으로 보내지고 마는데 이렇게 그들의 삼각관계는 끝나게 될까 아니면 그들은 또 다른 만남을 추구하게 될까.


본문은 나와 마르셀 그리고 시몬의 이야기를 쓴 1부 이야기편에 이어 '일치들'이라는 2부를 연달아서 적고 있다. 2부의 분위기는 1부와는 사뭇 다르다. 작가가 자신의 입장에서 자신이 쓴 글이 몇가지 일치를 가지는 것이 놀랐으며 그 일치가 의미를 드러내주는 것 같아 묘사하고 싶어서 이 글을 쓴다고 한다. 짧지만 중요한 이 일치들을 읽으면 앞의 이야기 편에서 조금은 모호했던 부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작업이 역겹고, 모호하고, 접근하기 힘든 것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짧게 정리하면 작가는 요구되지 않는, 혹은 요구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제공해야 한다. (159p)

역겹고 모호하고 접근하기 힘든 것이 작가의 일이라면 그런 점에 대해서는 이 작품은 거의 만점이라 할수 있겠다. 문화평론가인 수잔 손택이 이 작품에 대해여 쓴 [포르노그래피적 상상력]이라는 글을 보면 그러하다. 이 평론가는 그런 점을 지적하며 현대예술가는 광기의 중계인, 즉 작가의 광기를 독자에게 전달해준다는 식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 책을 읽다보면 아무래도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을 듯 하다.


도무지 현실같지 않은 이야기들이 특히나 더욱 그러하다. 현실적이지 않은 에로티슴이기에 더욱 궁금하고 더욱 모호한 이야기. 독자들은 과연 작가의 광기를 얼마나 이해하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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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임당 빛의 일기 - 상
박은령 원작, 손현경 각색 / 비채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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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도록 출산과 육아에만 치우쳐있던 산소같은 그녀 이영애가 '사임당'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에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기대를 했을 것이다. 생각과는 다르게 펼쳐지는 이야기에 기대한 만큼 조금은 실망을 한 듯한 눈치였고 그것은 그대로 시청률도 이어졌다. 현대와 과거를 오가는 이야기가 조금 산만했을까. 오히려 조선시대로 돌아가서 집중을 하고 난 이후 시청률도 반등을 하고 사람들의 이목도 다시 끌기 시작했다고 기사에서 보았다.

 

드라마가 뜨면 그에 관련된 도서들도 뜨기 마련이다. 정도전일때도 그랬고 장영실때도 그랬고 사임당도 마찬가지이다. 사임당에 관한 책들도 여러가지 버전이 있다. 실제로 있었던 그대로 적은 역사적인 이야기를 다룬 위인전이 있는가 하면 주인공만 사임당으로 설정했을 뿐 전혀 다른 로맨스를 다룬 이야기들도 있었다. 이번 이야기는 어떨까.

 

사임당 빛의 일기라는 제목의 이 책은 지금 방송중인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의 원작이라 할 수 있다. 그런만큼 드라마의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으니 참고로 하는 것이 좋겠다. 얼마전 읽었던 [우아한 환생]이라는 책은 현실에서의 역사학자가 조선시대에 환생을 한다는 이야기로 컨셉트를 잡았다. 이 책  또한 현실에서 조선시대로 가는 것은 같은 이치지만 환생이 아닌 타임슬립으로 설정했다.  

 

한국미술사를 전공하고 시간강사를 하고 있지만 전임교수가 되기 위해서 이리뛰고 저리 뛰는 지윤. 남들이 봤을때는 억대연봉을 자랑하는 펀드매니저인 남편과 공부 잘하는 아이까지 있는 그녀가 부럽기만 하겠지만 그녀에게 있어서 전임강사 자리는 자신의 입지를 견고하게 다져줄 자리 이상의 교수인 것이다.

 

능력보다는 줄대기가 우선인 교수자리. 그녀는 실세라고 알려진 민교수 밑에서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할 정도로 박박 기고 민교수가 하라는 것이면 무엇이든 시키는 대로 다 했지만 아직까지도 그대로인 자신의 위치가 답답하기만 하다. 이번에 발견된 금강산도 논문을 자신에게 맡겨주는 것으로 보아서 이번이 마지막 기회가 될 것 같은 생각에 죽을 힘을 다해서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 내고 싶은데 오히려 이것은 더 자신에게 악으로 다가오게 된다.

 

논문 발표 때문에 찾아간 이탈리아. 민교수는 작심이라도 한 듯이 그녀는 내치기만 한다. 그녀는 둘러싼 음모는 무엇이며 무엇을 통해서 그녀는 조선시대로 돌아가게 될까. 이 곳, 이탈리아에서 그녀는 예상치 못한 곳으로 가게 되고 자신이 상상하지 못했던 물건들을 손에 넣음으로 인해서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줄 기회를 가지게 된다. 그녀가 조선시대로 돌아간다면 어떤 모습으로 그곳에서 존재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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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발 (일반판)
반디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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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동 육층 삼호집에서는 날마다 퇴근날인 저녁 여섯시부터 다음날 출근시간 전까지 창문들에 청색 덧커튼을 치곤 하는데 이상하다. 무슨 접선 암호인지도 모르겠다.'(60p)

문득 궁금해졌다. 탈북자가 한국에 와서 남한 사람과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는 혼혈인가 아니면 한국인인가. 정답은 물론 한국인일테지만(우리나라는 이민을 받지 않고 귀화를 선택하는 제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똑같이 생긴 한국인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마도 답답한 내 편견이리라.

 

개인적으로 탈북자를 만나본 적은 한번도 없다. 탈북자가 쓴 소설을 읽은 적은 있다. [선희]. 북한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그대로 투영히시켜서 한 권의 소설속에 몰아 넣은 이야기.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북한의 잔악성에 얼마나 치를 떨었는가. 소설이라 더해진 부분이 있을테지만 그럴지라고 그것이 온전한 사실에 기반이 된 것이라는 것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한국의 인구수는 점점 줄고 있다. 일인가구가 늘어나고 결혼을 한다 하더라도 아이를 낳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아지고 있다. 아이를 낳는다 하더라도 한명밖에 낳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 더욱 인구는 줄고 있다. 그에 비해 탈북자 인구는 늘고 있다. 사회주의 속에 갇혀 지내는 그들이지만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인해서 자신들도 야금야금 자본주의의 세계에 접하고 있는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예전과 같은 완벽한 통제는 힘들것이다. 몰래 숨어 살던 탈북자들은 이제는 방송국에서 만든 프로그램에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정도로 당당하게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보는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를 다시 한번 돌이켜 보아야 할 시점이다.
 
이 책은 탈북인이 아닌 지금 현재 북한 주민이 직접 쓴 작품이다. 반디라는 필명을 쓰고 있는 작가는 아직도 북한땅에서 살고 있고 이 원고는 인편으로 몰래 빠져나온 것이다. 원고만 탈북을 할한 것이다. 분명 소설인진대 짧은 이야기로 인해서 더 사실적인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선희]처럼 긴 이야기였다면 차라리 선희라는 주인공이 이렇게까지 어려움을 당했구나 하면서 소설이니 그렇게 쓸 수도 있겠다라고 느끼지만 이것은 일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도 있고  길이가 짧아서 더욱 사실적이다.
 
마르크스 사진을 보면 경기를 일으키는 아이를 위해서 창문에 커튼을 쳤다고 강제로 이주를 당하는 가족,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해도 허가증이 없어 갈 수 없는 아들, 1호행사가 열리는 곳이면 모두 교통통제를 당해서 한명의 독재자 행렬에 모든 시민이 발을 묶여서 역에 갇혀 있어야만 하는 실정, 계급때문에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자의 심정까지 지금 이 세대를 살아가면서 이런 일도 있을까 싶을만큼 이해가 가지 않는 일들이 북한에서는 버젓이 자행되고 있다는 것을 보면 같은 민족으로써 그들의 실상을 어떻게든 전세계에 알려서 그들도 편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아니 할 수가 없다.
 
이 책의 제목인 [고발]은 그래서 붙여졌을 것이다. 지금 북한의 실정을 그대로 고발하는 것. 전세계 사람들이게 고발을 하고 싶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할 수 없는 일을 이 한 권의 책이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사람의 자유를 제한할 수는 없다. 영어로 번역이 된 이 책이 영문판 뿐 아니라 각 나라 말로 번역되서 전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이 책을 통해서 북한이 어떤 나라인지 알고 이 나라의 붕괴를 위해서 들고 일어났으면 좋겠다.
 
물론 '통일'이라는 것은 다른 나라에 의해서가 아닌 우리나라의 자주적인 힘에 의해서 이루어져야만 하겠지만. 그렇지 않는다면 한국전쟁과 같은 사태가 다시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으므로 말이다. 지금 한국의 정세는 상당히 불안정하고 이 상태로라면 한국마저도 위태로울 지경이다. 실세의 이복형제를 타지에서 죽일만큼 북한의 실정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이 두 나라가 힘을 합한다면 조금은 더 나은 나라를 만들수 있지 않을까.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좋은 점들만 모아본다면 말이다. 불안 불안한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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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린 머리처럼 불길한 것 도조 겐야 시리즈
미쓰다 신조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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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면만 보면 안돼.사물에는 반드시 이면이 있는 거야. 특히 거창하고 성가신 관습이 대대로 내려오는 이런 구가는 어느 날 갑자기 그것들이 붕괴해서......(137p)

[염매처럼 신들리는 것]에 이어 [미즈치처럼 가라앉는 것]과 이번 이야기까지 도조겐야 시리즈를 읽고있다. 처음 미즈치처럼 가라앉는 것을 읽을 때는 도조겐야라는 것도 모르고 순전히 미쓰다 신조라는 작가 이름과 책의 두께에 반해서 장르소설이라는 것만 믿고 읽었던 것이었다. 알고보니 도조겐야라는 작가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시리즈였다.


이후 염매처럼 신들리는 것을 읽었으나 이 시리즈의 절정은 바로 이 책, [잘린 머리처럼 불길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번 책은 절정에 절정을 거듭하는 이야기였다. 이번이 마지막 시리즈인줄 알았더니 한권이 더 남았다. 산마처럼 비웃는 것. 아직 한권이 더 남았으니 즐거움은 조금 더 남은 셈이다. 다행이다 싶다.


도조 겐야 시리즈는 작가인 그가 작품속에서 등장해서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해결을 하는 역할을 맡는다. 이번 책에서는 중간 이후부터 등장을 한다. 다카야시키 주재소 순사가 기차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는 도조와 그의 선배. 같이 이 마을로 돌아올 줄 알았는데 순사의 야이기를 듣다가 자신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더니 바로 기차에서 내려버린다. 뜻밖이었다. 바로 마을로 돌아와서 사건을 해결해줄줄 알았는데 말이다.


기다리면 언젠가 돌아오리라고 생각했던 도조는 끝끝내 나타나지 않는다. 사건 현장에는 드러나지 않고 마지막 이야기에서 등장을 해서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하면서 사건을 해결한다. 이때까지 발벗고 나서서 수사하던 경찰들은 바보가 되어 버리는 듯한 느낌도 들고 오직 그만이 모든 사건을 해결할 수 있다는 우상같은 느낌이랄까.


시리즈의 특성상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약간은 맥이 빠져 버리는 듯한 느낌이지만 그가 설명해주는 것을 듣고 있자니, 아니 읽고 있자니 이러 이러해서 범인이 이사람인가 하면 다시 틀어서 저러 저러해서 범인이 이사람이다 라고 말하는가 하면 다시 그러 그러해서 범인은 이사람일세라고 알려주니 답을 알아낸 듯 한 느낌이 들었다가 혼란이 들었다가 다시 반전을 주었다가 해서 단단히 꼬여버린 느낌이 든다. 다시 생각하면서 하나하나 풀어가야만 진면목을 느낄수 있을 것이다. 해결편이라고 한번에 덤벼들었다가가는 단단히 체해버릴 수 있으니 마음을 잘 잡고 머리속을 비운 다음 집중을 해야 할 것이다.


이야기는 크게 두 시점에서 전개된다. 그때 당시 순사였던 다카야시키의 아내가 쓰는 이야기와 그때 당시 그곳에서 일을 하는 꼬마아이였던 요키타카의 시점. 두 시점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는 한번은 객관적인 관점에서 들여다볼 수 있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이의 시점에서는 그리고 그 속에서 들여다보는 이야기는 어떤지 다시 한번 주관적으로 살펴볼 수 있게 해서 충분히 양쪽 입장을 고려해볼 수 있게 전개된다.


히메카미 촌에는 히가미 가 사람들이 산다. 이치가미 가와 후타가미 가 그리고 미카미 가로 이루어진 이곳에서 이치가미 가의 장자가 그 역할을 이어가고 있다. 히가미 일가를 통솔하는 장인 후도 할아버지 밑에 지금의 당주 효도가 있다. 그리고 그의 쌍둥이 자식들이 있다. 조주로와 히메코. 여자아이와 남자아이 쌍둥이인 이들은 장자인 조주로가 당주를 물려받게 되어있다. 대대로 내려오는 장자에게 주어지는 저주를 피하기 위해서 십삼야, 이십삼야, 삼십삼야를 보내게 되는데 그들은 무사히 십삼야를 보낼 수 있을까.


조주로의 뒤를 밟아서 경내에 잠입한 요키타카, 그는 그곳에 몰래 숨어서 조주로의 모습을 보고 그의 뒤를 이어 도착한 히메코의 모습을 본다. 꼬마 요키타카의 눈에 들어온 것은 히메코이긴 하나 목이 없는 히메코의 모습. 기절을 할듯이 놀란 요키타카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보게 되는데 다시 본 모습은 틀림없는 히메코이다. 분명 그녀를 보았지만 히메코는 우물에서 빠져죽은 모습으로 발견된다.


누구도 들어갈 수 없고 나갈 수 없는 밀실같은 경내에서 도대체 누가 무슨 이유로 히메코를 빠뜨린 것일까. 이치가미 가에서는 시신을 수습하고 금세 장례를 치뤄버리고 마는데 과연 이 사건의 범인는 누구인 것인가 아니 범인은 둘째치고 무슨 이유로 그녀를 죽인 것일까. 사건은 한번일리 없다. 오랜 시간을 두고 벌어지는 사건은 도조겐야 시리즈만의 독틈함과 일본문학의 특징을 미친듯이 잘 드러내고 있다. 역시 이 장르에 있어서 미쓰다 신조를 따라올 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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