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날 저녁의 불편함
마리커 뤼카스 레이네펠트 지음, 김지현(아밀) 옮김 / 비채 / 2021년 11월
평점 :
하아. 한숨만이 공기를 가로지릅니다. 이런 결말을 원한 것은 아니었는데, 그래서 더 단전 끝에서 차오르는 깊은 한숨입니다. 비록 그런 일이 있었지만 이 가족이 끝에 가서는 행복하게 살기를 바랐는데 전혀 이런 엔딩은 생각도 못한 터라 그렇게 닫아버린 마지막이 더욱 공허합니다. 텅하는 소리가 길게 남아 사방을 둘러 쌉니다. 허공을 가르며 여기저기 부딪히며 울림을 남깁니다.
텅텅텅터어어어엉.
슬픔은 자라지 않아. 슬픔이 차지하는 공간만 넓어져. (279p)
야스는 자신의 토끼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기도를 했겠지요. 설마 진짜 오빠가 죽기를 바란 것은 아닐 겁니다. 왜 그런 거 있지 않습니까. 남매끼리 형제끼리 죽일듯이 싸우는 그런거요. 너무너무너무 밉고 싫은 존재가 왜 내 형제일까 싶은 그런 거요. 그런 날일 수ㄷ 있겠죠. 그 모든 것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덮어지는 걸요. 그렇게 죽일듯이 싸웠다고 어느 틈엔가 다시 같이 밥먹고 같이 자고 같이 일어나는 그런 가족인 걸요. 그럴 줄 알았을 겁니다. 야스도요. 설마 자신의 기도가 그렇게 잘 이루어질 줄은 자신도 몰랐을테니 말입니다.
그 이후 그 아이는 코트를 벗지 못합니다. 빨간 코트. 누가 뭐라 해도 그 옷은 아이에게 착 붙어 버린 것처럼 마법을 부립니다. 야스는 어떤 마음으로 그 옷을 계속 입고 있었던 것일까요. 혹시라도 오빠에 대한 사죄의 표시였을까요 아니면 자신의 후회를 담은 표현이었을까요.
벨러네 부모님은 오븐에서 갓 나온 쇼트브레드만큼 부드럽고, 걔가 슬프거나 겁에 질렸거나 심지어 아주 행복할 때조차 많이 안아줘. 나도 그런 부모님이 있었으면 좋겠어. (162p)
아이는 기르는데 있어서 부모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아이는 친구네 부모님을 부러워 합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자신을 믿어 주는 부모님 따스하게 안아주는 부모님, 행복한 일이 있을 때도 안아주는 그런 엄마 아빠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야스는 이야기 합니다. 이 아이의 말이 그렇다면 자신의 가족은 그렇지 않다는 소리겠지요. 자신의 부모는 그렇지 않다는 소리겠지요. 그렇죠. 엄마는 그날 이후 먹는 것을 거부하고 누가 봐도 이상할 정도로 말라가고 있으니까요. 아빠는 밖으로만 돌 뿐 남은 아이들을 신경 쓰지 않으니까요.
죽음은 엄마 아빠뿐만이 아니라 우리 안에도 들어와 있다. 죽음은 언제나 누군가의 몸이나 동물을 찾아다닐 것이고, 무언가를 붙잡을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319p)
아이들은 제멋대로 혼자서 크는 것 같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의 관심과 애정을 먹고 사는 걸요. 그렇지 않은 이상은 아이들은 이상하게 자라게 됩니다. 야스의 바람이 너무 절절해서 나라도 이 아이를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언젠가 실종된 아이의 집의 남은 아이들은 부모의 관심을 받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쓴 적이 있는데 누군가가 죽은 집도 마찬가지겠군요. 남은 아이들을 생각했다면 이 집의 부모는 조금은 더 다르게 살아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아무리 죽은 아이가 소중해도 돌아올 수는 없는 법, 남은 아이들이라도 신경을 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아직 세 명이나 남아있는데 말입니다.
4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숫자다. 소에게는 위장이 네 개 있고, 계절도 네 가지이고, 의자 다리도 네 개다. (54p)
이 가족을 몽땅 데리고 오은영 박사님 앞으로 가고 싶어집니다. 가족 중의 한 사람의 죽음으로 트라우마가 생겨버린 남은 사람들.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저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살아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방법일까요. 아니면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느낌을 가졌는지 솔직하게 말하고 다 털어버리는 것이 바람직한 방법일까요. 아동심리학을 배웠어도 아직도 이런 문제에 대처하는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전문가이신 박사님은 이 가족에게 어떠한 솔루션을 주셨을까요. 만약 그런 전문가가 야스네 집에 있었다면 그들에게는 더이상의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까요.
개혁교회 신자인 부모 밑에서 자란 작가는 성경적인 표현을 인용하는데 능숙합니다. 그런 구절구절 들이 더욱 이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만들어 줍니다. 실제로 오빠를 잃은 경험이 있는 작가였기에 그런 표현들이 그런 감정들이 더욱 강조되는 것일수도 있겠습니다. 자신을 여성도 남성도 아닌 넌바이너리로 선언한 작가. 자신을 어느 한 곳에 고정시키지 않고자 함이 엿보이는 면입니다. 스물여덟이라는 나이에 인터내셔널부커상을 수상하며 부상했다고 했나요. 이 작가에게는 그런 나이에 대한 고정관념도, 국적도 성별도 모두 배제하고 오직 이야기 하나만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