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적 독자 시점 Part 1 08 전지적 독자 시점 1
싱숑 지음 / 비채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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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야기는 내가 정한다. 185p


누군가 카페에 올려 놓은 글을 읽었다. 자신은 픽션을 읽지 않는다고 소설을 읽어서 좋은 점이 무엇인지 알려달라는 글이었다. 나는 소설만 읽는다. 소설 속에는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현실 속에서도 분명 존재하는 잔인한 사건들이지만 그 속에 있기에 나는 안심한다. 적어도 그 칼날이나 총 끝이 나를 향해서는 날아오지 않으니 말이다. 그리고는 상상한다. 그 잔인함의 끝은 어디인가 하고 말이다. 현실 속에서도 분명히 행해지는 불륜의 사건들이지만 그 속에 있기에 나는 즐긴다. 제3의 입장에서 남이 나쁜 짓을 저지르는 것을 본다는 것은 얼마나 짜릿한가. 누군가 연애하는 이야기를 보는 것은 언제나 흥미롭다. 실제로 연애를 하는 것은 피로한 일이다. 현실 속에서도 존재하는 따뜻한 일이 그 속에 있기에 나는 감동한다. 누군가를 경쟁상대로 삼고 서로 겨누기만 하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서로를 향해 또는 다른 유기적인 존재들과 더불어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는 어찌나 힐링하게 만드는 그래서 더 행복한 소설들이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없이 십수 년을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이 소설 덕분이었다. 135p


아마도 김독자도 그렇게 읽지 않았을까. 가족도 없이 살아온 그가 오직 하나만 붙들었던 것은 바로 멸살법. 그에게는 이미 그 세계 자체가 멸망한 세계였기에 그는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을 찾으려고 그렇게 텍스트를 읽지 않았을까. 그 속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알아내서 자신이 살아남으려고 말이다. 


소설을 읽는다면 한번 읽고 끝내는가 다시 읽는가. 나는 내가 좋아하는 소설들은 가지고 있으면서 어쩌다 한 번씩 다시 꺼내볼 때가 있다. 장르소설인 경우 분명 이야기의 흐름은 알겠는데 범인이 누구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때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후루룩 훑어가다 보면 어느 순간 윤곽이 그려지고 내가 어느 시점에서 이 사건의 실마리를 찾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그렇게 또 한번 읽는다. 


처음에는 주인공만 보인 이야기에서 두 번째 읽을 때는 조연이 보였고, 세 번째 읽을 때는 적이 보였다. 읽을 때마다 달라지는 이야기. 이야기는 끝났으되 끝난 게 아니었다. 독자가 포기하지 않는 한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108p


이 문장을 다시 읽어본다. 처음 읽을 때 주인공만 보인다고 했었나. 나는 이야기만 따라간다. 물론 주인공의 시점에서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다. 두 번째 읽을 때 조연이 보인다고 했었나. 나는 처음 읽을 때 주연과 조연을 모두 파악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당연히 그 모든 것을 잊은 채 다시 시작한다. 그러다가 생각나는 시점에서 훌훌 넘긴다. 독자가 포기하지 않는 한 이야기가 끝이 나지 않는다는 말에는 너무 공감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을까. 책이라는 존재는 이야기라는 것은 누군가 읽어주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아무리 책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고 한들 아무도 손에 들어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저 종이로 이루어진 산일 뿐이다. 사람이 손에 들고 읽어줄 때 비로소 이야기는 살아 숨쉬기 시작하는 것이다. [전지적 독자 시점]이라는 제목을 가진 이 책도 마찬가지로 내가 손에 들고 그 이야기의 첫 장을 넘겼을 때 꿈틀거리고 그 속의 등장인물들이 움직이지 않았을까. 그 모든 사건들은 내 눈 속에서 시연되고 내 뇌 속에서 샅샅히 자리 잡았다. 이제 나는 이 이야기의 독자이면서 그 속에 속한 그들과 함께 숨 쉬는 동지가 되어있었다. 


나는 그 애가 외로운 사람보다는 무언가를 읽는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 적어도 무언가를 읽는 한 인간은 외롭지 않다고, 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238p


판타지 소설답게 감독자는 죽었으되 죽지 않았다. 유중혁은 회귀라는 것으로 몇 번이고 돌아왔다. 게임을 하면서 마음을 졸이지 않아도 되는 때가 있다. 언제인지 아는가? 내가 돈이 여유가 있어서 또 하고 또 하고 또 할 수 있을 때다. 내가 목숨이 많아서 하고 또 하고 또 할 수 있을 때다. 김독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가 목숨이 몇 개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죽을 때도 그닥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았다. 물론 그 사실을 몰랐던 그를 따르던 모든 인물들은 슬퍼하며 장례를 치뤘을지 몰라도 말이다. 이제 그는 새로운 화신으로 거듭난다. 그의 수식언은 구원의 마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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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스퀘어
안드레 애치먼 지음, 한정아 옮김 / 비채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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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내 삶의 터전이 아니었고, 내 고향이 아니었으며, 심지어 나 자신이 아니었고, 내가 될 수도 없었다. 1977년 여름의 케임브리지가 그랬다. 23p


카페 알제 / 카페 오디션


아들과 함께 캠퍼스 투어를 다니는 나는 자신이 다녔던 학교에 와 있다. 누구라도 자신이 다녔던 학교에 온다면 그때의 일들이 생생하게 생각나기 마련이다. 근처만 가도 그럴 텐데 직접 캠퍼스에 발을 들이면 그것은 더할 것이다. 그렇게 그는 1977년도 케임브리지로 생각의 여행을 떠난다. 이야기는 주로 그와 칼라지의 일상과 생각들이다. 그들이 만난 곳은 카페 알제. 아랍인과 유대인 사이에도 우정이 가능하냐고 물었던 것처럼 그들 사이는 가까와지지 않을 것 같았지만 같은 프랑스어를 쓴다는 것에서 동질감이 생기고 그렇게 그들의 관계가 이어진다.


그들에게 카페 알제가 있었다면 나에게는 카페 오디션이 있었다. 그들이 70년대의 하버드를 그렸다면 나는 90년대 초반의 경기도의 어느 곳을 그린다. 지금도 그대 당시의 그곳을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다. 아무 약속을 하지 않고 들러도 선배든 후배든 동기든 누군가는 그곳에 있었다. 우리가 그곳을 아지트로 삼은 것은 커피의 맛이 좋아서도 음악이나 분위기가 좋아서도 아닌 단지 무료로 제공되는 토스트가 있었다는 거였다. 왜 그때는 학생식당에서 밥을 먹고 뒤돌아서도 배가 고팠는지 오디션에 들어가면 우리는 음료를 주문하고 길다란 봉지에서 식빵을 꺼내서 토스터기에 넣고 튀어 오르는 순간 받아서 딸기쨈을 발라서 먹었다. 주문한 후 자리에 앉아 있다가 빵을 가지러 가는 것은 대개가 후배였으며 친구들 중에서는 그것을 가지러 가는 것도 내기를 할만큼 작은 것 하나에도 진심인 그때였다.


카페 알제에서는 칼라지와 나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어떤 것도 이야깃거리가 되며 토론 주제가 되기도 하고 그로 인해 분란이 생기기도 하지만 그런 모든 것이 일상처럼 느껴지는 그런 곳이다. 만약 그곳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칼라지라는 사람을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고 그로 인해 알게 되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또한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장소가 가지는 중요성이다. 


칼라지


그가 미국을 싸잡아 비난하는 건 사실 미국이 자신에게 굴복하지 않기로 결정할 경우에 대비해서 자신도 지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애쓰는 것이었다. 243p


그는 택시 기사였다. 하버드에서 공부하는 나와는 다른 생활반경의 사람이었다. 학생은 교수나 다른 학생들과의 만남은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그 외의 사람들과의 만남은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는 이상은 잘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내가 칼라지가 운전하는 택시를 탔다 하더라도 그것은 잠시 동안일뿐 그것이 오랜 기간 우정을 나누는 요소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카페 알제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친구가 된다. 그가 어려울 때 그에게 일자리를 구해주기도 한다. 물론 사람과의 관계가 늘 좋으리라는 법은 없다. 나는 내 생활이 안정되고 자신의 주위 사람들과 만나게 되면서 칼라지와의 만남을 부담스러워 하면서 피하려고 한다. 그것이 꼭 계급 문화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은연 중에 그런 것도 포함되어 있지 않을까. 하버드에 다니는 나인데 너 같은 친구와 어울린다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는 보여주기 싫어하는 그런 것 말이다. 아닌 것 같지만 그런 내면의 소리가 실제로 드러난다.


이방인


우리 둘 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지만, 내겐 버티고 설 땅이 있었고 그는 언제나 방랑자였다. 96p


나와 칼라지는 둘 다 이방인이다. 미국이라는 나라에서는 그러하다. 그들은 미국 시민이 아니며 그곳에서 태어나지도 않았다. 칼라지는 미국이라는 곳에서 일을 하며 나는 공부를 한다. 언뜻 보면 동등한 위치에 있는 것 같지만 이혼을 하면 추방될 위기에 놓인 칼라지와 영주권을 가지고 하버드에서 공부를 하는 나와는 엄연히 다른 위치다. 같은 이방인이지만 다른 계급인 셈이다. 그러니 당연히 그들의 안정성에도 차이가 있다. 누군가는 공부만 하면 되는 - 실제로는 돈이 없어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지만 그래도 - 사람이고 누군가는 쫓겨날지 말지를 고민하며 변호사를 찾아 상담을 해야 하는 처지인 것이다. 


외국에서 살아본 사람은 누구나 안다. 자신이 이방인이라는 것을 말이다. 단기로 있는다면 몇 달마다 또는 몇 년마다 비자를 갱신해야 한다. 이민국에 들러야 하고 자신이 이곳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가 담긴 증명서를 내밀어야 한다. 그 시간들이 초조하다. 이민국에는 언제나 늘 이방인들로 넘쳐나며 이민국 직원들은 언제나 늘 느긋해 보인다. 그래서 더 조바심 내게 만든다. 영주권자라 하더라도 아니 시민권자라 하더라도 그곳에 살고 있는 그들과는 다른 외모 덕에 이방인이라는 생각은 벗어날 수가 없어 보인다.그래서 칼라지가 그렇게 천두복숭아를 외쳐댔던가. 머리는 자두 모양, 엉덩이는 복숭아 모양, 고환은 초콜릿 과자 모양.(77p)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아무리 그들의 말을 하고 그들의 옷을 입고 그들 속에 어울려 공부를 하고 일을 하고 살아간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당신은 지금 이방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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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에서 내려온 전화 부크크오리지널 2
글지마 지음 / 부크크오리지널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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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소개를 읽고 나서 나는 제일 먼저 한 권의 책을 생각했다. [츠나구]같은 책일까? 딱 한 권의 책만 읽고 그 작가의 팬이 되어 버렸을 정도로 강한 영감을 주었던 책 츠나구. 죽은 자와 산 자가 만날 수 있는 기회. 실제로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기에 더욱 마음을 졸이며 그런 말도 안 되는 현실이 이야기 속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행복했더랬다. 눈물을 흘렸더랬다. 그래서 그런 걸 기대했더랬다. 조금은 기대가 컸을까.


항상 새로운 책을 읽을 때면 기대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가 바라는 그런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 기대를 하게 된다. 번번이 기대를 가지면 실망을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산 자와 죽은 자가 통화를 할 수 있다는 기가 막히는 설정이었지만 그 대상자들이 주로 이야기 속에서 등장을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저승차사의 역할을 맡은 한봄이라는 사람에 관해서 더 많은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 그녀가 어떻게 이 일을 맡게 되었는지 그녀가 어떻게 이 마을에 들어왔는지 어떤 다른 사람하고도 연관성을 두지 않던 그녀가 어떻게 사람 사이에 관계라는 것을 맺게 되었는지 그로 인해 그녀가 얻게 되는 불이익은 어떤 것인지 하나부터 끝까지 한봄의 이야기다.내 기대는 어긋났다.



그리움의 무게는 죽음의 무게보다 가벼웠다. 265p


보름날이면 죽은 사람과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아니, 할 수는 있지만 아무나에게 주어진 기회는 아니다. 그 대가는 비싸기 때문이다. 단 18분의 통화 가능 시간이 주어지지만 그에 해당하는 가격은 60만 원이 넘는다. 어떻게 보면 죽은 사람과 통화를 할 수 있는데 그쯤이야 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결코 만만히 보아 넘길 그런 금액은 아니다. 여기서 영화 <사랑과 영혼>이 생각났다. 죽은 자와 이야기를 할 수 잇다는 영매와 만나는 사람들. 그들은 죽은 사람이 숨겨 놓은 돈의 행방에 대해서 묻기도 하고 죽은 이들이 정말 자신을 사랑했는지 확인을 해보기도 했었다. 우리는 죽은 사람들을 왜 만나고 싶어하는 걸까. 정작 그들과 전화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무엇을 물어볼 것인가. 그저 그립노라고 그저 보고싶노라고 그런 말을 통화하지 않아도 충분한 것이 아닐까.


그믐날이면 사람이 죽을 수 있다. 자신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저승에 있고 조건이 맞춰진다면 죽음을 신청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이 자신을 죽이는 자살보다는 오히려 타살에 가까워서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덜 부담스러운 것일까. 그렇다고 신청한다고 모두가 다 죽을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보름과 그믐이 교차되어 간다.


오늘은 보름날이다. 달에서 전화가 내려올 시간이다. 누군가는 누군가를 또 그리워 할 것이다. 나 또한 이제는 내가 아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이 떠나버렸다. 그러니 당연히 그리워한다. 만약 나에게 18분이라는 시간이 주어진다면 나는 누구와의 통화를 선택할 것인가. 그 대가로 단지 돈만 필요하다면 모르겠지만 또 다른 것이 필요하다면 나는 그 전화를 선택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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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해버린 이번 생을 애도하며 - SF와 로맨스, 그리고 사회파 미스터리의 종합소설 케이 미스터리 k_mystery
정지혜 지음 / 몽실북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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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선물하기. 이번 생은 망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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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적 독자 시점 Part 1 07 전지적 독자 시점 1
싱숑 지음 / 비채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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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나리오가 도착한다. 조금 쉴만한가 싶으면 속속들이 도착하는 그런 시나리오다. 조금도 여유를 부리는 것을 성좌들이 못 견뎌하는 것인가. 이번에 그들에게 주어진 건 '최강의 희생양'이라는 제목의 시나리오다. 괴수들에게서 살아남으라는 것이 미션 내용이다. 말로 하면 참 쉬워 보인다. 괴수들은 어느 것 하나도 만만하지 않다. 그러기에 살아남으라는 것이겠지. 거기다 제한 시간도 없다. 보상은 물음표로 되어 있다. 실패하면 그냥 사망이다. 누군가가 죽음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다. 괴수에게서 죽을 것이기 때문에 이런 실패 조건이 붙은 것이다. 실패 시 사망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보상 조건이 궁금해진다. 이쯤되면 이 보상이 궁금해서라도 살아남아야 할 판이다.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다. 추가 클리어 조건이 붙었다. 서울 화신의 절반이 사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야 알았다. 자신들의 생각보다 너무 많은 화신들이 남아 버렸으니 그 인원을 줄여야 할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그것도 확. 그렇게 하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은 완전히 센 괴물을 투입시키는 것이 아니던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를 투입함으로 저들의 인원을 과감히 줄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신들이 시나리오를 만들고도 혹시나 그대로 인원이 남을까 싶어서 추가적인 조건까지 넣어둔 꼴이라니. 왠지 뭔지 모르게 조금은 치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죽음의 공포를 느낄 수는 있지. 그게 인간의 삶을 가능하게 해. 평범한 인간과 너의 가장 큰 차이점이고. 83p


거기다 더 중요한 조건이 하나 더 있다. 가장 강한 화산 한 명이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맞다. 막연하게 화신의 절반이라고 하면 실력 없는 일반 화신들만 죽어버리면 진짜 강한 화신들만 살아남을 것이고 그것은 전체 발란스를 유지하기에 감당이 되지 않으니 이런 조건을 하나 더 넣어 놓은 것이다. 도깨비는 혹시나 가장 강한 화신 한 명이 희생정신이 강하다면 그가 자진해서 죽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말을 한다. 얄밉다. 이제야 저 미션의 제목이 이해가 된다. 최강의 희생양. 최강이라는 것은 가장 강하다는 것이 그게 어떻게 희생양이 되지라고 생각했더니 스스로 희생을 하라는 소리였구나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스스로 내가 죽겠소 하고 나설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목숨이 두 세개가 아닌 이상은 말이다. 아니 설사 두 세개라 하더라도 자신이 희생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여기 가장 가장 화신이 자신만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도깨비는 그들에게 조금의 편의성을 제공해준다. 지금 가장 강한 화신 톱 텐을 불러 준 것이다. 거기는 누가 포함되어 있을까.



매번 말하지만, 멸살법을 읽었다고 해서 정말로 그 인물의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 결국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텍스트고, 그것은 한 번 가공되어 내게 전해지는 것이다. 26p


이야기를 읽었다고 그 모든 이야기가 그대로 전개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김독자의 행동에 따라서 시나리오는 언제든지 달라질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야기를 안다고 해서 등장인물의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실제로 그 이야기가 구현되어 전개되고 있을 때도 등장인물의 행동이나 다음 벌어질 상황 같은 것이 자신이 읽은 그대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독자가 전체를 읽은 모든 이야기는 단지 참고만 되어 줄 뿐이다. 


화신이라는 이름의 사람. 성좌라는 이름의 전능자들. 그리고 각종 괴수들과 도깨비들까지 다양한 캐릭터들의 향연으로 재미를 주는 데다가 서바이벌 게임의 전개는 당연히 읽는 즐거움을 보장해준다. 이 소설의 웹툰을 찾아서 봤다. 상당히 거친 선들의 그림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내용이 그림으로 전개되는 것들이 조금은 신기했다. 웹툰과 소설의 차이점도 확실히 드러났다. 개인적으로는 이야기가 더 좋았지만 어린 나이대의 학생들에게는 웹툰이 더 재미나 보이기도 할 것이다. 어느 것이 더 좋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상상력을 동원하고 이야기의 전개를 생각하는 데는 이야기라는 텍스트가 좋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더군다나 김독자가 읽었던 것은 웹소설이었으니 이야기라는 장르에 더 적합해 보이기도 한다. 이제 마지막 한 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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