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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라스의 글쓰기
알랭 비르콩들레 지음, 이은숙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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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라스에 대해 이보다 더 가까운 곳에서 쓰여진 책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혹자는 얀 앙드레아의 책을 언급하는 것으로 반박하겠지만, 물리적 거리가 곧 이해의 거리와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Pour ~>의 제목을 달고 있는 책이 그렇듯, 위험을 감수한 에세이 특유의 짙은 향기가 배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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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르노, 사유의 모티브들
게르하르트 슈베펜호이저 지음, 한상원 옮김 / 에디투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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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국내에 출간된 아도르노 관련 입문서 중 가장 훌륭한 사례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게르하르트 슈베펜호이저의 간결하면서도 핵심을 향하는 글쓰기와 아도르노 전문 연구자의 (기존 번역의 오류를 바로잡곤 하는) 정확한 번역, 오랜 연구가 반영된 충실한 각주 등의 만남은 첫 출항 후 망망대해에서 가야 할 방향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지침을 주기에 충분해 보인다.


설명에 방점을 두면서도, 때론 아도르노의 의견을 옹호하기도 하고, 때론 아도르노의 의견에 다른 의견을 제시하면서, 시종일관 밀도 있는 논리 전개로 높은 집중력을 유지하게 만든다.


역자의 각주를 포함하여 수많은 문장, 표현들에 밑줄을 긋다보면 집중의 흔적, 이해의 흔적을 쉽사리 요약/정리하기 힘들다는 사실과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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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태어났다
조르주 페렉 지음, 윤석헌 옮김 / 레모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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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강렬한 독서를 경험했다. 최윤의 산문집 『수줍은 아웃사이더의 고백』(1994)을 읽다가 조르주 페렉의 단편 [빌랭 거리 La Rue Vilin]를 알게 되었다. 빌랭 거리라면 파리의 벨빌 지구(quartier Belleville)에 있는 그 빌랭 거리다. 생각난 김에 새로 번역 출간된 조르주 페렉의 책을 찾아 보았는데, 그의 글쓰기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사후 단편모음집인 『나는 태어났다』(레모)가 작년 말 발행된 것이 아닌가.

읽어가면서 몇몇 지점에서 한참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서문에서 자서전 문학의 프랑스 전문가인 필리프 르죈의 글이 보일 때 그랬고, [모리스 나도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랬고, 프랑크 브나이유와의 대담인 [기억의 작업]에서 한 차례 더 그랬다. ['엘리스섬' 프로젝트 설명]에서도 시선과 생각은 붙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매혹이자 모종의 법열감으로 물든 시간이었다. 숨길 수 없는 지적 흥분과 머리의 미열은 낯선 사람에 관심 있는 누군가가 보았다면 금방이라도 시선에 잡혔을 광경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오랜만에 마주한 시간이었다.

르죈이 명시한 것처럼, "12년짜리 글쓰기 프로젝트였던 『장소들』은 계획이 반쯤 진행된 6년 후 포기했다"(서문)는 사실을 알 수 있고, "그에게 자서전은 말할 수 없는 주변을 끊임없이 맴돌며, 그와 동시에 우회적이고 복합적이며, 파편적이"(서문)라는 걸 알 수 있는 것이다.

[모리스 나도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첫 번째는 바로 그 장소에서(카페 혹은 바로 그 거리에서) '눈에 보이는 것'을, 가능한 한 감정을 최대한 배제해서 묘사합니다. 상점들, 건물의 세부 사항들, 아주 소소한 사건들(지나가는 소방차, 돼지고기 가공 상점에 들어가기 전에 개를 묶고 있는 부인, 이사, 광고물, 사람들, 기타 등등...)을 열거합니다. 두 번째는 장소에 상관없이(집, 카페, 사무실), 어디서든 기억 속 장소를 묘사합니다. 그 장소와 관련된 추억들을, 그곳에서 알게 된 사람들이나, 다른 기억들을 떠올립니다."(68쪽)와 같이 『장소들』의 구체적인 글쓰기 방법론에서 멈춰서게 된다. "최종 결과물을 어떻게 할지 아주 명확한 생각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그 작업을 통해 장소들의 나이 듦과 내 글쓰기의 나이 듦, 내 추억의 나이 듦을 동시에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되찾은 시간은 잃어버린 시간과 뒤섞이는 셈이죠. 시간은 이 계획과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또한 이 프로젝트의 구조와 제약을 이룹니다. 책은 이제 지나간 시간을 재현해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는 시간을 측정합니다. 말하자면, 모르는 체하거나 혹은 마음대로 재현하거나(미셸 뷔토르의 『시간의 사용』), 언제나 책의 옆에서 머물러 있기만 했던(프루스트의 작품에서조차), 이제껏 하찮게 여겨지고 죽은 시간이었던 글쓰기의 시간이 여기서는 핵심 축이 될 것입니다."(69쪽)라고 『장소들』의 글쓰기가 담고 있는 의미를 응시하게 됩니다.

[기억의 작업]에서는,

"페렉 기억이란 함께 나누는 무언가니까요. 자기 자신에게 중요하거나 은폐된 추억을 탐사하는 자서전과는 정말 다른 작업입니다. 공동의 기억, 집단의 기억에서 출발하니까요."(96쪽)

"페렉 그러니까 기억의 작업에는 세 가지 방식이 있다고 하겠네요. 첫 번째는 일상성을 철저하고 면밀하게 검토하는 방식이고, 두 번째는 전통적인 방식을 따라 제 자신의 역사를 찾아보는 것이고, 마지막은 허구화된 기억입니다. 그러고 보니 네 번째도 있네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암호화'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어요, 완벽하게 암호화해서 집어넣는 거죠, 『인생사용법』 같은 소설에 추억이 될 만한 요소들을 묘사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건 사실 내부용이라 할 수 있어요. 그것을 감지할 수 있는 사람은 저 말고 몇 명 정도밖에 안되니까요."(100쪽)

"브나이유 그렇다면 그러한 점에서 작가님을 사실주의 작가라고 할 수 있을까요?

페렉 네. 그렇게 불러주시길 바랍니다. 자서전과 관계를 맺기 시작했던 순간부터, 저는 끝임없이 일탈하는 자전적인 단편들을 써왔어요. '나는 이러저러한 것을 생각했다'가 아니라 제 옷들이나 고양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답니다! 아니면 꿈에 대한 이야기든지요. 이런 방면에서 『베갯머리 서책』을 쓴 일본 작가 세이 쇼나곤이 제 스승님입니다. 정말 하찮은 것에 대한 생각을 모은 책이지요! 폭포수, 의복, 즐거움을 주는 사물들, 정제된 은총을 품고 있는 사물들, 가치 없는 사물들 같은 것들에 대한 생각을 모았어요. 제겐 이런 것이 진정한 사실주의입니다. 가치 판단을 완전히 배제한 현실 묘사에 의지하는 것 말이에요. 어쨌든 이건 제 생각이고요."(105-106쪽)

"브나이유 그러니까 작가님이 경험하는 하루하루는 작가님이 드러내는 허구에 무엇인가를 가져다 주는 거란 말씀이죠?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사실주의를 재바련할 수 있고요.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개인주의에 맞서는 것이고요!

페렉 이 모든 것을 다른 이들과 나눌 수 있기 때문이고, 그 결과가 물질적 대상, 즉 책의 일부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책은 다른 사람들의 소유가 될 터이고, 공유하게 되고, 교환하게 되겠지요. 오로지 집단적이고, 함께 나눌 수 있다는 측면에서만, 이 모든 것이 이제 개인의 역사에 대한 접근이 됩니다."(108-109쪽)

"브나이유 그러니까 연대의 일부인 거죠!

페렉 그렇지요. 저는 일체주의 작가라 부르고 싶어요. 대단한 것을 주지 않지만, 그 명칭만은 제게 큰 기쁨을 주는 문학 운동이지요. 개인에서 출발해서 다른 이들에게 이동하는 움직임요. 저는 이것을 공감이라고 부릅니다. 일종의 투영이자, 동시에 호소하는 거죠!"(110쪽)

['엘리스섬' 프로젝트 설명]에서는,

"내게 엘리스섬은 바로 유배의 장소, 말하자면 장소가 부재하는 장소, 흩어지는 장소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장소는 나와 관련이 있고, 나를 매혹하고, 나를 끌어들이고, 내게 질문한다. 마치 몹시 피곤한 공무원들이랑 다량으로 미국인이라고 딱지를 붙이던, 달갑지 않은 자들을 모아둔 이 장소를 내 공간으로 받아들이는 일을 거쳐야만 내 정체성의 탐색이 가능하듯, 마치 그곳 어딘가에 내 역사일 수 있었을지 모를 역사가 새겨져 있기라도 하듯, 마치 그곳이 있을 법한 자서전, 잠재적 기억에 포함되기라도 하듯. 그러나 그곳에는 뿌리나 흔적 같은 것은 전혀 없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형태는 없지만, 겨우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 내가 울타리, 혹은 분열이나 균열이라 명명할 수 있는 무언가이다. 그리고 내 입장에서 유대인이라는 사실과 아주 깊숙하고, 몹시 혼란스럽게 연결된 것이다."(115쪽)

"내가 엘리스섬에서 찾으려 했던 것은 바로 돌아갈 수 없는 지점이라는 이미지, 극단적인 단절의 자각이다. 내가 검토하고, 문제 삼고, 시험해보고 싶었던 것은, 바로 존재하지 않는 공간, 부재, 그리고 흔적과 말, 타자를 추적하는 근간인 균열 속에 나 자신의 뿌리를 내리는 일이다."(119쪽)

특히 무엇이 나를 매혹케 했는가. 조르주 페렉이 자신의 기억, 일상에 대한 글쓰기를 정의하면서 그것을 '사실주의'라고 명명할 때이다. 흔히 울리포OuLiPo라는 실험문학집단의 일원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엄연하게 자신의 문학을 사실주의로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에르노의 사례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그것은 프랑스의 문학 전통 상 '일체주의Unamimisme'에서 그 계보의 기원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이로써 아니 에르노의 조르주 페렉에 대한 언급이나 관심은 정확하게 계보학적 탐구의 하나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아울러, 문고본 형태를 한 이 책은 분량이 글의 가치를 논하는데 있어서 결코 큰 문제가 될 수 없다는 (어찌보면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다시 한번 입증한 셈이 되었다. 문고본 형태로 진행되고 있는 최근 출판계의 경쾌한 변화를 개인적으로는 부정적으로 보고 있지 않고, 그 결과나 영향을 예단하고 싶지도 않다. 프랑스의 독립출판사인 로브L'aube['새벽', 혹은 '여명']는 100페이지가 채 되지 않는 문고본 형태의 다양한 총서 출간을 통해 지식의 보급이라는 출판의 민주적 가치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 물론, 이런 기획으로 가장 유명하고 일반적인 사례는 한길사에서 번역 출간했던 '크세주 Que sais-je ?' 시리즈. 모든 사람이 집에 서재가 있는 것은 아니며, 만인이 독서을 위한 여유 시간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모든 이에게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이 의미를 지닐 수는 없을 것이다. 다양한 직업과 상황에 따라 책의 형태, 장정, 길이 등이 다양하게 존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접근가능한 매체, 휴대가 용이하고 손에 쥐기 편해진 매체가 되었을 때, 독서의 잠재성은 보이지 않게 확장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설령, 그것이 미미한 변화에 멈춰설지라도 말이다. 말하자면, 문고본은 '손에 쥔 민주주의'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태어났다』를 통해 한국의 독자들이 조르주 페렉의 독창적인 자서전 글쓰기에 더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되길, 그리고 그의 글쓰기 방식에 대한 고민이 공감을 넘어 새로운 반향을 일으키길 바란다." 옮긴이 윤석헌의 바람은 나라는 사람에겐, 적어도 일정한 공감의 형태로 실현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기억이란 함께 나누는 무언가니까요. 자기 자신에게 중요하거나 은폐된 추억을 탐사하는 자서전과는 정말 다른 작업입니다. 공동의 기억, 집단의 기억에서 출발하니까요. - P96

폭포수, 의복, 즐거움을 주는 사물들, 정제된 은총을 품고 있는 사물들, 가치 없는 사물들 같은 것들에 대한 생각을 모았어요. 제겐 이런 것이 진정한 사실주의입니다. 가치 판단을 완전히 배제한 현실 묘사에 의지하는 것 말이에요. - P106

책은 다른 사람들의 소유가 될 터이고, 공유하게 되고, 교환하게 되겠지요. 오로지 집단적이고, 함께 나눌 수 있다는 측면에서만, 이 모든 것이 이제 개인의 역사에 대한 접근이 됩니다. - P109

내가 엘리스섬에서 찾으려 했던 것은 바로 돌아갈 수 없는 지점이라는 이미지, 극단적인 단절의 자각이다. 내가 검토하고, 문제 삼고, 시험해보고 싶었던 것은, 바로 존재하지 않는 공간, 부재, 그리고 흔적과 말, 타자를 추적하는 근간인 균열 속에 나 자신의 뿌리를 내리는 일이다. -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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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 딜레탕트 크로슈 씨 - 프랑스 음악의 한 정신 음악의 글 4
클로드 드뷔시 지음, 이세진 옮김 / 포노(PHONO)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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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드뷔시는 음악 뿐 아니라 문학, 미술 등에도 조예가 깊었다. 어쩌면 그는 프랑스의 벨 에포크 시대가 열어놓은 가능성의 공간을 환희에 찬 채로 열심히 돌아다녔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목신의 오후 전주곡>은 그의 이런 경향을 단박에 방증한다. 물론, 이 책의 제목인 <안티 딜레탕트 크로슈씨>도 스테판 말라르메와 친밀한 사이였던 폴 발레리가 그의 단편소설들에서 불러온 가상의 인물 '테스트씨(Monsieur Teste)'를 오마주한 것이다.


여기에 실린 글은 학술적인 차원의 엄격한 음악 비평이라기보다는 대부분 언론 지면에 실린 음악 평론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글이 빛을 발하는 이유는 자신의 생각을 막힘없이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글쓰기 능력을 가졌으며, 그것이 떠받치고 있는 그의 진실을 말하고자 용기 덕분이다. 글이 인정사정 보지 않고 한없이 신랄할 때, 그것은 마치 철학자 조르주 캉길렘(Georges Canguilhem,1904-1995)의 발언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시대를 달리한 다른 분야의 두 사람이 유사한 태도로 자신의 전문 분야에 임했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사소해 보일 수 있지만, 시대를 가로지르는, 중요한 이유가 아마도 존재할 것이다.


그는 자신이 지닌 음악 이해능력, 혹은 섬세하게 벼려진 취향을 다음처럼 증명한다.(95~96쪽)


그[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현대 독일에서 거의 유일하게 독창적인 음악가다. 오케스트라를 다루는 기술로 보자면 그 놀라운 비르투오시타가 리스트를 방불케 하고, 문학으로 음악을 떠받치려는 자세는 우리나라의 베를리오즈를 닮았다. 이 점은 <돈키호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 같은 그의 교향시 제목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확실히 R. 슈트라우스의 기법이 늘 그렇게까지 분방하지는 않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색감 있는 이미지들로써 사유하고 오케스트라를 수단 삼아 작품의 윤곽선을 그리는 것 같다. 그러한 작법은 평범하지 않거니와 아주 드물게만 쓰인다. 게다가 R. 슈트라우스가 작품을 전개하는 방식 또한 완전히 개인적이다. 그 방식은 바흐나 베토벤의 엄격한 건축적 설계가 아니라 리드미컬한 색채들의 전개다. 그는 말도 안 되게 동떨어진 음들이라도 그의 요구대로 '살아 숨 쉬는' 느낌을 주기만 한다면 '듣기 싫은 소리'가 나지 않을까 하는 우려 없이 냉철하고 자신만만하게 겹쳐 놓는다.


또한, 그는 자신이 유럽 음악인에 국한되지 않는, 좋은 음악을 향한 개방적인 시선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러준다.(151~152쪽)


무엇보다도, '딜레탕트 잡아끌기'에 불과한 체계들을 삼가자.

문명이 몰고 온 무질서에도 불과하고 과거에는, 아니 아직도, 숨 쉬는 법을 배우듯 자연스럽게 음악을 배우는 매혹적인 사람들이 있다. 바다의 영원한 리듬,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 정성스레 귀 기울여 듣는 오만 가지 미세한 소리들, 이것이 그들의 음악학교다. 그들은 터무니없는 논문 따위를 들여다보는 일이 없다. 그들의 전통은 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아주 오래된 노래들에만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오랜 세월에 걸쳐 그 전통에 조금씩 자기 몫을 보탰다. 그렇지만 인도네시아 음악이 준수하는 대위법은 팔레스트리나의 대위법이 애들 장난처럼 보이는 수준이다. 유럽인의 편견을 버리고 그들의 매혹적인 '타악'에 귀를 기울인다면 우리의 타악은 상스러운 장터 여흥거리에 불과하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이런 '안티 딜레탕트' 드뷔시를 통해 당대 음악장을 논쟁, 주제, 인물 등을 통해 속속들이 활보해 보는 건 무척이나 유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신께서 호의를 베푸는 일요일에는 음악을 일절 듣지 않습니다. 선생께는 미안한 얘기지만요...... 정말이지, 부디 ‘인상(impression)‘이라는 단어를 기억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인상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쓸데엇이 들러붙는 미학으로부터 내 감정의 자유를 지켜주니까요. - P25

음악은 흩어진 힘들의 총합입니다. 그런 힘들로 사변적인 노래를 만드는 거죠! 나는 이집트 목동이 피리로 불어대는 음들이 더 좋습니다. 그는 풍경에 협력하고 당신들의 평론에서 다루지 않는 화음들을 듣습니다...... 음악가들은 교묘한 손으로 쓴 음악에만 귀를 기울이고 자연에 아로새겨진 음악은 들을 줄 모릅니다. - P27

나는 과감하게 로마대상이 어떤 부류들에게 미신 수준에 도달했기 때문에 그 제도가 맹위를 떨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로마대상을 받았는가 못 받았는가로 그 사람이 재능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종결난다. 아주 확실하지는 않아도, 최소한 편리한 방법이기는 하다. 여론에 작성하기 편리한 장부를 마련해준다고 할까. - P32

로마대상은 일종의 게임입니다. 차라리 국민스포츠라고 해야 할걸요. 이 게임의 규칙을 가르치는 곳을 음악원, 예술학교, 기타 등등으로 부릅니다. - P33

바흐 음악에서 감동을 낳는 것은 멜로디의 성격이 아니라 멜로디가 진행하면서 그려내는 선이다. 실제로는 동시에 진행되는 여러 선율선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우연으로든, 의도적으로든, 그 선들의 만남이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문양 중심의 구상에 힘입어 음악은 거의 기계처럼 틀림없이 청중에게 특정한 인상을 자아내고 이미지들을 떠올리게 한다. - P56

일부 예술가는 이 무관심에 상당한 책임이 있다. 그들도 한때는 싸울 줄 알았다. 시장에서 한자리 얻기 위해 필요했던 바로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서 싸웠다. 하지만 일단 장사가 자리 잡히면 그들은 무섭게 퇴보한다. 마치 대중에게 자기네들을 받아들이느라 수고했다고 사과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들은 자신의 젊은 날에 결연히 등을 돌리고 성공 속에 웅크리고 눌러앉는다. 그들은 복된 영광의 경지에 결고 오르지 못한다. 그러한 경지는 언제나 새로워지는 감각과 형식의 세계를 연구하는 데 일생을 바친 자들에게만 허락된다. - P62

이 위대한 거장[베토벤]의 작품에는 아름다운 풍경을 훨씬 더 심오하게 표현한 다른 대목들이 있다. 그 대목들이 한결 심오한 이유는 단지 풍경을 직접적으로 모사하지 않고 자연 속의 ‘보이지 않는 것‘을 감정적으로 옮겨냈기 때문이다. - P85

음악은 자연을 다소간 정확히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연과 상상의 신비로운 상응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아마 그 어떤 분야보다도 자유가 풍부한 예술일 것이다. - 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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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라스의 말 - 중단된 열정,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마르그리트 뒤라스 외 지음, 장소미 옮김 / 마음산책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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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 있을 때 이 책을 구입해두고 있었다. Romane Fostier의 전기와 함께. 마르그리트 뒤라스와 관련된 상대적으로 최신의 대담집과 평전이었기에 그 기획의 참신성과 진전된 측면을 내심 기대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두 책 모두 문고본으로 가격 또한 저렴했다. <뒤라스의 말>은 87-89년에 파리 생브느와 거리에 있는 뒤라스의 자택에서 이뤄진 인터뷰로, 그의 삶과 예술을 연대기적이고 구조적인 방식으로 접근한다는 점에서 뒤라스가 남긴 여느 인터뷰와 달리 전체의 상을 제공한다. 이런 특징이 이탈리어 인터뷰집(1989)이 다소 뒤늦은 2013년에 프랑스어로 번역된 이유일 거라고 책의 역자 역시 분석하고 있다.


본 대담집은 뒤라스의 기존 인터뷰들의 불가피한 한계로 여겨질 수 있는 전문영역에 대한 인터뷰를 넘어서서 뒤라스에 대한 A-Z를 보여주고자 한다는 점에서 아베세대르abécédaire 형태의 입문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즉, 특정한 문제에 대해 인터뷰어가 한층 깊이 들어가지 않는다거나, 변주를 통한 반복적 질문으로 인터뷰이의 답을 강화하고 풍부하게 만드는 전략을 구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구태여 책의 한계로 지적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심층적 구체성은 뒤라스의 다른 대담집이 이미 하나의 공간을 확보해두고 있기 때문이다.


전체상을 그리기 위해 기획된 구조적인 방식의 인터뷰는, 그럼에도 인터뷰어-인터뷰이 간의 상호 친밀성과 신뢰성으로 인해 질문과 답변에 어떠한 불순물도 발견되지 않는 밀도가 지배한다. 억압되어 있고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글을 쓰고 발언하는 뒤라스의 평소 신념대로, 그의 말은 어떠한 거짓 겸손과 위선 등을 허락하지 않는 순도높은 직진성으로, 발언 뒤에 미련을 허용하지 않는 말하기로 일관한다. 이는 어떤 면에서 아니 에르노를 떠오르게 한다.(아니 에르노는 마르그리트 뒤라스 사후 2001년에 제정된 '마르그리트 뒤라스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결코 쓰지 않겠다는 의지로 일관하면서, 지식인 세계에 진입한 여성에게 강요되는 사회적인 침묵의 요구에 맞서 자신의 성애 경험(<단순한 열정>, <집착>)과 낙태 경험(<사건>) 등을 건조한 문체로 사실적으로 서술함으로써 '사회적으로 억압된 것'을 폭로하고자 하는 작가 말이다. 인터뷰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뒤라스 특유의 태도는 사실상 그 이후 프랑스 여성(물론, 뒤라스나 에르노 모두는 '여성'이란 분류를 거부하고 있지만 분류의 편의를 위해 명명) 작가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상속된 문화자본의 어떤 기원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시몬 드 보부아르와 함께 말이다.


책의 미덕은 또한 문학-영화-연극이 뒤라스에게 사실상 개념적으로 분리되고 독립된 각각의 예술 영역이 아니라 특정한 문제의식을 발전시켜 가는 과정에서 서로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형식이라는 것을 인터뷰 주제의 논리적 배치를 통해 단번에 시야에 들어오게 한다는 점이다. 그에게 발견되는 문학-영화-연극 형식의 상호의존성을 이해하게 되는 과정은, 뒤라스가 지닌 남성, 여성에 대한 견해, 그가 작가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주제인 열정이나 사랑 등에 대한 견해와 함께 자연스런 담론적 일체가 된다.


이번 대담집이 뒤라스에 대한 일종의 통론을 구성하므로, 각론에 해당하는 다음의 대담집들이 번역출간되기를 바라면서 짧은 스케치를 마무리한다.(본문, 204~205쪽)(본문에서 언급된 『물질적 삶』,『말의 색채』는 이미 번역 출간됨)


- 자비에 고티에,『말하는 여자』(미뉘, 1974)

- 미셸 포르트,『트럭』(미뉘, 1977)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장소들』(미뉘, 1976)

- 세르주 다네 및 <카이에 뒤 시네마> 편집부, 『초록 눈동장』(미뉘, 1987)

- 피에르 뒤마예,『텔레비전에 얘기하세요』(EPEL, 1999)

- 프랑수아 미테랑, 『뒤팽 거리의 우체국과 그 밖의 대화들』(갈리마르, 2006)

- 장피에르 스통,『인터뷰』(브랭, 2012)


난 나를 짓누르는 침묵을 말하게 하려고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열두 살 때인가, 오직 글쓰기만이 방법인 것 같았죠. - P24

글은 독자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쓰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글쓰기는 매번 앞서의 문체를 깨뜨리고 새로운 문체를 창조하면서 자신과 마주하는 일이에요. - P43

난 더는 아무 것도 믿지 않아요. 어쩌면 믿지 않는 것이야말로 ‘모든 권력에 대항하는 행동‘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고, 은행의 과두정치와 우리를 지배하는 가짜 민주주의에 대항하는 유일한 해답일 거예요. - P47

오직 결여와, 연속되는 의미들 속에 숭숭 뚫린 구멍들과, 빈 공간에서만, 무언가가 생겨날 수 있어요. - P84

내 안에서 글의 재료가 될 언어의 정화와 압축 작용이 자동적으로 일어나거든요. 글을 절제하고 싶은 열망, 모든 언어가 벌거벗은 상태로 질서 정연하게 들어선 공간에 대한 열망이죠. - P89

우리의 삶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절대 특별하지 않아요. 우리가 바라듯 일정하지도 않고요. 다채롭고, 돌이킬 수 없으며, 우리의 의식 속에서 영원히 반향을 일으키죠. 메아리처럼, 강물의 동심원처럼 퍼져 나가고 시시각각 서로 교차되면서, 우리의 과거에서 미래를 오가는 거죠. - P93

모든 작가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자기 자신에 관해 써요. 그들 인생의 핵심 사건인 그들에 대해, 마찬가지로 작가가 언뜻 그에게 낯선 어떤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그건 늘 그의 자아, 그의 강박과 연관돼 있죠. 마찬가지로 꿈도-프로이트가 말했듯-우리의 에고이즘만을 드러낼 뿐이고요. - P95

나는 생각의 편린들을 그때그때, 굳이 바로 서로 연관 지으려 애쓰지 않고 적어둬요. 어느새 알게 모르게, 관계가 작동하도록 내버려두는 거예요. - P96

난 나를 평범하게 만들고 무참히 망가뜨리고 이어서 중요하지 않게 만들기 위해, 짐을 내려놓기 위해 글을 써요. 텍스트가 내 자리를 차지해서, 내가 덜 존재하도록. 나는 오직 두 경우에만 자유로워질 수 있어요. 자살하거나, 글을 쓰거나. - P98

남성적 글쓰기에서는 관념으로 너무 무거워진 문체만이 느껴져요. 프루스트, 스탕달, 멜빌, 루소는 성이 느껴지지 않는 반면에요. - P101

평론가들은 늘 어떤 여성적인 영역에서 비롯되는 모든 것들을 비난했거든요. 사랑의 테마나 고백, 자전적 소재 등. 수년간, 여성의 위반은 시에 국한되어 표현돼왔어요. 내가 그걸 소설로 이동시켰죠. 내가 한 많은 것들은 혁신적이에요. - P114

전통적인 영화로 재현된 현실은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어요. 모든 것이 너무 말해지고, 너무 드러났죠. 의미의 과잉은 역설적으로, 맥락을 빈약하게 만들어요. - P135

아니요, 빈약한 예산은 내가 묘사하는 현실의 특성에 부합해요. 피폐하고 들쭉날쭉한 현실 말이에요. 영화의 아름다움은 또한 제한된 예산과, 내가 촬영 기간으로 두는 극히 짧은 기간에 있다는 게 내 생각이에요. - P138

전지전능한 전통적인 소설가의 역할을 거부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서사를 지배하고 장악하고 객관화하는 카메라의 침입을 거부하는 거예요. 카메라는 사건의 다원성에 중점을 둘 수 있도록 유연해야 하죠. 등장인물들의 시선처럼 드러나지 않게 움직이며, 다양하고 호환 가능한 역할을 수행해야 해요. - P141

내 모든 영화는 본래 정치적이지만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지는 않아요. 주제를 발전시키지 않죠. 정치적인 의미는 다른 방법으로 성취되어야 해요. - P150

대화와 말이 숨기고 위장하는 것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구조 속에, 대화 속에 섞여 있는 암시적인 우물거림들 속에 체호프의 위대함이 깃들어 있어요. 그런데도 텍스트는 결코 포화 상태가 되는 법이 없죠. 행동이 정지되고 미완인 채로 내버려두는 내 텍스트들처럼. 일종의 침묵의 음악이라고 할까요. 아직 모든 걸 상상해야 하는. - P165

사랑이 비록 모든 예술의 주요 주제일지라도,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묘사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열정은 가장 진부한 동시에 가장 모호하거든요. - P171

살면서 종종 내가 존재하지 않는-어떤 모델도 레퍼런스도 전무후무한-듯한 기분을 느껴요. 늘 내가 있고 싶은 곳을 발견하지 못한 채 그곳을 찾아 헤매고, 늘 지각하고, 늘 남들이 즐기는 걸 즐기지 못하는 기분. 그런데 이제는 이 복합성이 마음에 들어요. 우리는 늘 우리 본연의 모습인 단일성에 도달하기 위해 기를 쓰지만, 우리의 풍요로움은 바로 그 범람에 있는 거예요. -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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