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라, 끝까지 사랑하라 - ‘가난한 자들의 어머니’루트 파우 수녀의 삶과 사랑
루트 파우 지음, 미하엘 알부스 기록, 도현정.장혜원 옮김 / 지향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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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이름은 [처음처럼 영원히]입니다. '한의사 수녀의 늦깎이 사랑'은 이 책의 부제(副題)입니다. 저는 이 책을 신재용 원장님으로부터 추석 선물로 받았습니다. 목사인 제게 신 원장님은 따스한 편지 말미에 추신을 달았습니다.  

 

"김정희 수녀님(미국 난달 전 회장)의 책 1권을 동봉합니다. 수녀님 책이지만 시간 나실 때 읽어 주시면 그분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시간 날 때가 아니라 오늘 일부러 도서관에 가서 독파를 하고 돌아왔습니다. 17세기 영국의 존 번연은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이라는 우화 소설을 발표했습니다. 천국을 향해 가는 여정에서의 고난을 흥미진진하게 기술해 놓은 책입니다. 이 책은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 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천국을 소망하며 발걸음하는 여정은 신앙인이라면 신구(新舊)를 가릴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처음처럼 영원히](도서출판 이유)는 김정희 수녀님의 영적 신앙고백의 기록입니다. 1986년 홀로 도미해서 나름대로 자기 영역을 확보한 신앙인이었습니다.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그는 자기 일에 성실했습니다. 한 경영대학원에서 컴퓨터 사이언스로 석사학위를 받은 다음 한의과대학에서 석‧박사 학위(Ph.D.)를 받은 노력파입니다. 그 후 실력을 인정받아 사우스 베일로(South Baylo University) 한의과대학 교수와 병원 지도교수, 병원장으로 미국 사회에 한‧양방 교류에 많은 기여를 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뿐 아닙니다. 그는 가톨릭 신자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데도 남달랐습니다. '동의난달'하면 우리나라에서 소외계층에 무료의료 시술, 대중문화 보급 등에 앞장서온 봉사단체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해성한의원 신재용 원장님이 설립해서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며 선행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 공로로 동의난달이 2010년 서울복지대회에서 봉사부문 우수상을 수상했습니다. 또 설립자 신재용 명예이사장님은 그해 도산봉사상을 수상한 바도 있습니다. 김정희 수녀님은 동의난달의 미국 지부 회장을 맡아 봉사에 뛰어난 달란트를 발휘했습니다. 

 

신앙인의 궁극적인 목표는 천국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발을 붙이고 살고 있는 이상 방점을 하나님께 맞추어 살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그래서 세상일도 열심히 하고 주님의 일도 열심히 하고 싶어 하지만 그것을 병행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눅 16:13)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김 수녀님은 이런 말씀에 순종하여 대학교수 병원장 등 세상일을 내려놓고 영적 순례를 결단합니다.

 

쉬운 일이 결코 아니었을 것입니다. 어린 나이에 수녀복이 좋아서 수도자의 길을 걷고 싶다고 다짐한 것도 꼭 지킬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김 수녀님은 남은 생애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을 소명이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이 삶의 목적을 찾아 떠나는 길이라고 생각하면서 힘든 영적 순례를 결행합니다. [처음처럼 영원히]는 김 수녀님이 미국 뉴멕시코에 있는 '성삼성모회'(Society of Our Lady of the Most Holy Trinity))에 입회하여 지원기, 청원기, 수련기를 무사히 마치고 수녀가 되는 과정에서 느낀 한 사람의 묵상록입니다.

 

앞뒤에 위치한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사이에 총 4부로 책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1부 '끝없는 갈증과 욕망의 괴로움'에서는 세상사에 만족하지 못하고 말씀을 사모하여 결단하고 수도원에 입소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고, 이어 2부에서는 미국 생활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에 대한 추억을 '수많은 만남과 가슴 아픈 이별들'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3부에서는 단단히 각오하고 들어온 수도원이지만 모든 것이 서투르고 세상의 감정이 남아 꿈틀대는 것을 '사라지지 않는 괴로움과 갈등'으로 엮으면서 수도원에 순화되어 가는 과정을 밝히고 있으며, 4부에서는 수녀복을 입고 주님의 신실한 종이 되기 위해 성숙해 가는 과정을 '당신 안에 머물게 될 나의 길'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저는 김영희 수녀님의 [처음처럼 영원히]를 읽으면서 여느 신앙 간증집과는 다른 것을 느꼈습니다. 온전히 말씀에 순종하며 은혜 받고 사울이 바울로 변했듯이 180도 바뀐 인생 여정을 그야말로 모범적으로 기록해 놓은 간증집들이 우리 주위에 많습니다. 하지만 수녀님은 이 책에서 자신을 완전히 억제하며 오로지 주님께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있습니다. 글의 주 맥락은 하나님 중심이지만 김 수녀님의 인간적인 고뇌도 피하지 않고 있습니다. 먹고 싶은 것, 미운 사람, 좀 덜 힘든 것을 찾으면서도 곧 뉘우치는 그의 모습에서 참으로 인간적이고 진솔하다는 느낌을 받은 것은 이 책을 더 친근하게 읽을 수 있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미국에서의 바쁜 생활로 10여년 냉담을 한 사실도 서슴없이 밝히고 있고, 수녀원에 입소하면서도 고국에 계신 노모와 형제들에겐 비밀로 한 것이라든지,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이국(異國) 사람들에게서 느끼는 서운함 등도 솔직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작은 차이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다 순화되고 말지만 이런 과정을 드러내놓고 밝히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는 세상에 모든 승부를 걸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습니다. 신앙인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참된 진리와 진정한 사랑은 하나님의 영역임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습니다.

 

김 수녀님의 언어 구사는 매우 평범합니다. 전문적인 신앙 용어를 가급적 사용하지 않고 있는 것도 한 특징이 될 것입니다. 거기에 페이지의 여백마다 관련 사진을 덧붙인 것도 이해를 도울 뿐만 아니라 쉽게 읽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또 각 소제목에 딸린 글의 분량이 매우 짧습니다. 한두 쪽, 길어야 세 쪽을 넘지 않습니다. 굳이 형식에 따라 글의 종류를 분류하자면 신앙적 장편(掌篇)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독자가 쉽게 다가가기 위한 장치들입니다.

 

정확한 나이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만 아주 늦게 수도자의 길을 걷고 있는 김정희 파우스티나 수녀님입니다. 세상 고난 다 극복하고 삶이 원숙해진 경지에서 주의 여종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만큼 더 귀하게 쓰임 받을 것을 말해줍니다. 한 가톨릭 신자가 수녀가 되기까지의 고뇌와 번민 갈등 그리고 결단, 뒤이어 걷게 되는 수도원 생활에 동참함으로써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 눈을 돌리길 바라고, 신앙인은 신앙의 토대를 더욱 굳건히 하는 계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책 [처음처럼 영원히]는 두루 읽힐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생각하며 일독을 권합니다.

 

*부기

<처음처럼 영원히>(도서출판 이유)는 알라딘에서 검색되지 않습니다. 궁여지책으로 다른 수녀님의 책을 빌려 서평을 올립니다. 알라딘에서는 출판사와 상의해서 책을 확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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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에서 영성으로
이어령 지음 / 열림원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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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 전, 소설가 유익서를 만나 서울 인사동 찻집에서 담소를 나누었던 적이 있다. 그때 이어령이 우리 대화의 주제가 될 자리가 아니었음에도 유익서는 이어령에 대해 '난공불락(難攻不落)'이라며 흠모의 마음을 품고 열변을 토했다. 사실 나는 그때 문학평론가 이어령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못했다. 20대부터 '독불장군'식의 글로 자기를 드러내는 예의가 없는 문인쯤으로 치부해 두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그의 글을 읽을 때마다 한편으론 부럽고 또 다른 한편으론 경원시하고 싶은 이중의 마음이 공존했다. 그런 나의 생각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다방면에서 생각과 필력을 번득이고 있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개막식 때 '굴렁쇠를 굴리는 동자(童子)'는 과거와 현대의 절묘한 조화였다. 세계인의 찬사를 받은 이 아이디어가 이어령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다. 그가 뒤에 주창한 ‘디지로그(Digilog)’의 태동이 될 것이다.

 

이어령이 70이 넘어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해서 장안의 화제가 되었었다. 한 사람의 넌 크리스천이 크리스천이 된 것이 무슨 대단한 뉴스거리가 되느냐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어령은 분명 다르다. 그의 이름 앞엔 자리에 따라 다른 많은 수식어가 붙는다. 문학평론가, 시인, 소설가, 기호학자, 문화기획자, 전 문화부장관 등. 그만큼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었다. 그는 철저히 이성(理性)에 기반한 삶을 지금까지 살아왔다.

 

기독교인이 된 이어령이 책을 한 권 출간했다. <지성에서 영성으로>가 그것이다. 버틀란트 러셀이 지난 세기 초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에서 자신이 비기독교인임을 밝힌 것과 대조적으로 이어령은 자신의 책에서 기독교인이 된 과정을 소박한 심정으로 밝히고 있다. 내가 이 책에 찬사를 보내는 것은 자기 겸손의 고백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순수와 순종에로의 회귀를 진솔하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2007년 기독교인 되는 의식, 즉 세례를 받고나자 많은 사람들이 놀라움을 금하지 못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한국 최고 지성의 훼절(毁節)로 보아 안쓰럽게 생각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죽음을 앞둔 노신사의 솔직한 고백이라며 위로의 마음을 갖기도 했다.

 

이어령은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자 문필가이다. 그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기독교인이 되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라곤 글 쓰는 기술밖에 없는데, 하찮은 이것이라도 주님을 위해 쓸모가 있다면 최선을 다 하겠다"고 고백한다. 지금까지의 이어령에게서는 나오기 쉽지 않은 고백이다. <지성에서 영성으로>를 오해해서는 안 된다. 목사의 아들 니체가 하나님을 부정하고 무신론적 실존을 주장하며 "신은 죽었다"고 주장한 유와는 다르다. 즉 지금까지의 자기 사고(思考)에 대한 전적인 부정이 아니다. 지성을 사다리로 해서 영성의 세계로 진입한 지평의 올바른 확장이다. 

 

주어진 환경에 상관없이 종교와 정치엔 비교적 명확한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인간이다. 그래서 인간을 종교적 동물 또는 정치적 동물이라고 말하는지 모르겠다. 한 사람이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것을 근거로 주위 사람들에게 기독교인이 돼라고는 말하고 싶지 않다. 단지 무신론자요, 인본주의자요, 인문주의자를 대표했던 한국 최고의 지성이 어떻게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는가를 세심하게 살펴보는 것은 삶의 변화에 좋은 동기를 부여해 줄 것이다. 글쟁이요 말쟁이인 이어령의 겸손이 신앙에로 연결되는 좋은 매개물, <지성에서 영성으로>는 그래서 읽은 이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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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하심 - 나를 영원까지 지켜주신다는 하나님의 절대 불변의 약속 이찬수 저서 시리즈
이찬수 지음 / 규장(규장문화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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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목회자의 글을 많이 읽는 편이 아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꼭 필요한 것만 골라 읽는다. 설교도 마찬가지이다. 지난 크리스마스 때, 우리 교회 출신 청년 중 인천공항에 근무하는 한 자매가 학생회 아이들에게 책을 선물로 보내왔다. 모두 복음이 녹아 있고 사랑이 포함된 내용의 책들이었다. 그 중 이찬수 목사의 <보호하심>이란 책도 있었다. 마침 우리 집 아이가 이 책을 선물로 받게 되었다.

 

이찬수 목사는 내가 잘 알지 못하는 분이다. 그의 설교도 들어본 적이 없고 책 또한 읽은 기억이 없다. 의도적으로 피한 것이 아니라 이건 순전히 나의 성벽 때문이다. 목회자의 개성을 서로 존중해 주자는. 이찬수 목사님에 대해서 간접적으로 들은 바는 있다. 벌써 10년 전 쯤 될 터이다. 국제제자훈련원에서 주최하는 한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다. 그때 이찬수 목사님의 분당우리교회 부목사 두 분이 함께 교육을 받았다. 그 분들로부터 담임 목사인 이찬수 목사님에 대해 몇 가지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부목사가 자기 교회 담임 목사에 대해 목회자 모임에 와서 극구 자랑하는 장면은 쉽게 접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는 그날 흔치 않은 모습을 접하게 된 것이다. 분당우리교회는 한 고등학교 강당을 빌려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한다. 그 학교 근무하는 믿지 않는 교사와 학생들이 이찬수 목사를 요즘 보기 드문 목회자로 생각한다면서 저런 목사님의 교회라면 신앙생활하고 싶다는 말들을 공공연히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교회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고, 분당우리교회 출범 초기엔 외면하던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또 이 책 <보호하심>에도 몇 번 언급되어 있지만 아버지 목사님께서 40일 금식 기도하시다가 17일 만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얘기도 빠지지 않고 덧붙여졌다. 사실 금식기도는 모든 것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고 나를 죽이는 일련의 과정이다. 40일 금식 기도는 목숨을 내놓고 하는 작정기도인데, 이찬수 목사의 아버님은 반을 채우지 못하고 소천하셨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믿음의 뿌리가 튼실한 가문을 가진 목회자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이찬수 목사님은 청소년 사역자로 오래 헌신해 왔다. 옥한흠 목사님이 개척해서 우리나라 유수의 교회로 발전시킨 사랑의교회에서 청소년 전담 부교역자로 일해 왔다. 그래서 그를 청소년 사역자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그는 2002년 분당우리교회를 개척해서 흔히 '별들의 전쟁터'라고 일컫는 분당에서 단시일에 중형 규모의 교회로 부흥시킨 장본인이다. 그렇다면 그는 영혼을 살리는 설교에 일가견을 갖고 있다는 것이 될 것이다. 이 목사님이 책에서 강조하고 있듯이 말씀을 보고 교회를 찾기보다 사랑을 보고 교회를 찾으라고 하지만 두 가지 다 충족되어야 회중들의 마음을 붙들 수 있다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분당우리교회가 이런 교회가 아닌가 싶다.

 

이찬수 목사는 글도 매우 잘 썼다. 나는 <보호하심>을 짬짬이 읽었는데도 이틀에 다 독파하였다. 그의 책이 이렇게 쉽게 읽히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을 성싶다. 첫째, 문장이 아주 쉬웠다. 배운 자의 현학과 목회자의 전문성이 멀찍이 배제되어 있었다. 그저 한글을 깨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고 쉽게 이해할 정도로 그는 그런 어휘를 구사하고 있었다. 둘째, 자신의 경험을 적재적소에 잘 연결시켜 글을 전개하고 있었다. 독자에게 쉽게 접근하는 데 자신의 경험만큼 중요한 제재도 없다. 특히 그것이 고난을 극복한 경험이면 더 말할 나위 없다. 셋째, 무엇보다도 이 목사님은 말씀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마치 1592년 종교 개혁 당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성경으로, 오직 은혜로'를 외친 루터의 후예답게 모든 이야기가 말씀으로 귀결되고 있었다. 그것도 우리에게 잘 알려진 본문 내용이어서 전혀 저항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보호하심>은 첫 장 프롤로그에서부터 본문을 거쳐 에필로그에 이르기까지 핵심 주제가 '하나님의 보호하심'이다. 내가 지금 어디에 처해 있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강한 믿음이 우리의 삶을 강건하면서도 풍요롭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책 표지 하단에 삽입되어 있는 띠지에도 이런 글귀가 박혀 있다.

 

"걱정하지 마, 내가 너를 지켜줄게!"

전능자이신 하늘 아버지가 지금 당신에게 말씀하신다.

나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주님의 보호 약속을 믿어라!

수많은 영혼을 회복시킨 분당우리교회 이찬수 목사의 핵심 메시지

 

이 책은 모두 3부 8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part 01.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part 02.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니. part 03.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보호할 것이라. 여기에 포함된 8개의 장은 저자가 의도한 것은 아닐 테지만 설교 한 편으로 생각하고 사용해도 좋을 것 같았다. 듣는 설교와 동일한 효과를 가져다주는 읽는 설교문을 작성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데, 이 목사님은 이런 일을 훌륭하게 해 내고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에서 성공한 목회자들의 공통점은 죽을 고비를 넘긴 체험을 하고 있다는 것을 든 신학자가 있었다. 이찬수 목사도 여기에 포함시켜도 지나치지 않다는 생각을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가졌다. 그가 미국 유학 가서 인생의 가장 밑바닥 삶을 겪으면서 공부한 이야기, 어떤 때는 정말 기차를 타고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진 적도 있었으며 또 강물에 뛰어 들면 영원한 안식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유혹에 휩싸인 적도 있었다는 자기 고백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뿐 아니라 귀국해서 신학대학원을 다닐 때도 방학 때면 갈 곳이 없어 학부 기숙사를 기웃거렸다는 대목엔 경험한 자만이 알 수 있는 아픔이 감춰져 있었다.

 

이찬수 목사님은 복음주의 목회자이다. 말씀에 충실한 목회자이다. 잘못 생각하면 세상에 선을 긋고 사는 사람으로 알기 쉽다. 하지만 그는 그렇지 않다. 나는 그가 <보호하심>에서 대중가요를 인용하며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가 내용 전개에 적절한 유행가를 자주 인용할 정도이면 대중가요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할 터이다. 또 그의 글을 읽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앞엔 보수도 진보도 구획이 허물어진다는 것을 느꼈다. 약자 사랑엔 모두가 하나 되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찬수 목사님이 원용한 한문이 눈에 띈다. 그것도 두 번이나 인용된 문장이다. 즉 '지피지기면 백전백승(知彼知己 百戰百勝)'이라는 말인데, 이 '백전백승'은 '백전불패(百戰不敗)와 함께 자주 잘못 쓰이는 문장이다. 유명한 중국의 병법서인 <손자병법(孫子兵法>의 '모공(謀攻)'편에 나오는 '지피지기면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를 잘못 사용한 것이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의 뜻이다. '백 번 싸워 백 번 이긴다', '백 번 싸워도 패하지 않는다'와 뜻이 비슷하기는 하지만 원문에 충실하게 원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것은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오류이다.

 

사이버 공간이 위력을 떨치는 시대라고 하지만 인쇄매체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책을 통해 대중에게 끼치는 영향은 결코 생각처럼 줄어들지 않고 있다. 이런 즈음 이찬수 목사님의 쉬우면서도 속이 꽉 찬 책을 읽는 즐거움이 내게 있었다. 앞으로 교회 내외적 사역에 쉴 날이 없겠지만 책으로 대중을 만나는 기회를 늘리기 바란다. 한 사람의 사상가가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도 적지 않은데, 참다운 목회자가 복음의 말씀으로 예수님의 사랑으로 끼치는 영향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을 것이다. 교회가 점점 영적 지도력을 상실해 가고 있는 안타까운 시절이다. 이럴 때 이 목사님이 사랑의 수류탄을 뽑아 던지는 역할을 잘 감당할 것을 기대한다. 이찬수 목사님이라면 핀을 확실히 뽑아 던져서 사랑이 메아리를 꽃 피게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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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딩으로 리드하라 - 세상을 지배하는 0.1퍼센트의 인문고전 독서법
이지성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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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중요성을 강조해온 내가 이런 책을 더디 손에 잡은 것은 알량한 자존심 때문이리라. 나는 인터넷의 발달로 인쇄 출판문화가 위축되는 경향에 일말의 불안감을 가지고 있다. 책의 효용 가치는 인터넷의 발달과 무관하게 강조되어야 한다고 보고 있고 늘 그렇게 주장해 왔다. 

한 보름 전 서울에 볼 일이 있어 갔다가 인천 친구 목사님 집에서 하루를 묶고 왔다. 그 목사님은 청소년들을 중심으로 독서운동을 꾸준히 해 오고 있는 사람이다. 책의 힘이 정말 대단해서 문제아들도 그 목사님의 독서 클리닉에 참석해서 함께 하면 건강한 청소년으로 변화되는 모습을 듣고 보면서 이 시대에 필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가 그 때 한 권 뽑아다 준 책이 바로 이지성의 [리딩으로 리드하라](문학동네)이다. 나는 누가 권하는 책은 이상하게 잘 안 보는 습성이 있다. 아마 어릴 때부터 스스로 해 온 독서 경향 탓이지 않나 싶다. 또 책과 독서에 대해서라면 혼자 해결할 능력을 갖고 있다는 자만심이 그렇게 만든 것도 같다. 따라서 이번과 같은 경우에도 친구 목사님이 권하는 책이니까 꼭 읽어봐야겠다는 식의 생각은 하지 않았다.

[리딩으로 리드하라]가 내 서재에 꽂혀 있은 지가 반 년 가까이 되었다. 지난 추석이었다. 나는 몇 권의 책을 가방에 넣고 가족을 인솔해서 고향 방문길에 올랐다. 이지성이 쓴 이 책도 그 가운데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예년 같지 않게 책 읽을 분위기가 아니었다. 형님 댁에 이틀 머무는 동안 예기치 않은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금년 12월에 결혼하는 조카가 신랑 될 사람을 데리고 와서 소개시켜 주었고, 또 생각하지도 못한 고향 손님들이 들이닥쳐 다른 즐거움으로 시간을 보냈다.

정작 이 [리딩으로 리드하라]는 추석을 쇠고 집으로 돌아와서 읽게 되었다. 권한 사람을 생각해서 정독을 하기로 맘먹었다. 책이 점점 손에서 멀어져 가는 현실에서 독서에 대한 책은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이 책은 몇 가지 의미가 덧붙여져야 할 것 같았다.  사이버 공간이 사람들을 옭아매는 풍토에서 독서, 그것도 고전 읽기를 강조하는 저자가 먼저 무척 고맙게 느껴졌다. 세상이 변해도 책 읽기의 중요성은 조금도 줄어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그런 느낌은 어쩌면 당연하다.  

저자 이지성은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는 분으로 알고 있다. 그런 저자가 동서양을 넘나들며 독서 관련 사항을 유효적절하게 구사하는 능력이 돋보였다. 아마 이 책에 등장시킨 사람들을 세어본다면 백 명은 훌쩍 넘어 있을 것이다. 그것도 그들이 쓴 어렵다는 고전까지 요소요소에 인용하고 있으니 저자의 실력이 보통이 아닌 것 같다. 모르긴 해도 이 정도의 책을 써나가려면 언어도 몇 개는 기본적으로 통달하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영어 독어 불어에 일본어 한자까지 독해할 수 있는 정도, 특히 젊은 저자로서 한자에 대한 이해가 넓고도 깊은 것 같아 호감이 갔다. 서구화 바람이 세차게 분 지가 오래 된다. 영어 불어 독어 등 서양 언어에 비해 한자가 홀대받고 있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시대적 조류인지 모른다. 내가 대학교 다닐 때만 해도 한글만의 표현으로 정확한 개념 전달이 어려운 경우 괄호 안에 한자를 병기함으로써 이해를 도왔다. 하지만 지금은 한자 아닌 영어 등 서양 글자가 그것을 대신하고 있는 시대이다.

그런 환경에서 중국의 고전인 사서삼경에 각종 역사서뿐 아니라 우리 선조들이 남긴 고전까지 전방위적으로 인용하고 있는 책에서 사유의 풍성함을 맛보는 기쁨은 결코 적지 않다. 그는 이런 주장을 하고 있다. 독서는 저능아조차도 천재로 만들어 주고, 열등생을 우등생으로 만들어 준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아인슈타인, 레오나르도 다빈치, 존 스튜어트 밀을 등장시켜 독서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이들은 평균 이하의 사람들이었는데, 독서 그것도 고전을 읽음으로써 세기의 천재 반열에 오른 사람들이다.

이 책은 총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거기에 세 개의 부록이 책의 완성도를 높여주고 있다. 1장에서는 인문고전 독서는 개인뿐만 아니라 가문과 나라의 운명까지도 바꿀 수 있다면 구체적 예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2장은 세기의 천재들을 등장시키고 그들이 인문 고전에 정통할 정도로 그 방면 독서에 열정을 쏟아서 그 방면의 1인자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을 소개하고 있다. 3장에서는 전 세계 0.1%의 사람이 90% 부를 소유하고 있는데, 이 0.1%에 속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으로 고전에 대한 공부를 꼽고 있다.

4장에서는 세계사를 들고 놓았던 사람들을 등장시켜 인문 고전의 가치를 제고해 주고 있다. 가령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과 우리나라 조선조의 세종대왕,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공통점은 인문 고전을 사랑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또 우리나라 재벌을 대표하는 이병철과 정주영도 체계적인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은 아니지만 인문 고전을 꾸준히 탐독한 것이 그들의 회사 경영에 밑받침이 되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또 중국의 고전인 논어와 손자병법 등을 읽는 척만 하지 말고 제대로 읽을 것을 권하고 있다.

그리고 5장에서는 인문고전 세계를 여행하는 초보자를 위한 안내서라는 타이틀로 어렵게 생각되는 고전이지만 그것을 한 권 뗌으로써 인생이 달라진다는 생각을 가지고 매달릴 것을 주문하고 있다. 저자는 특히 인문 고전을 읽을 때 원전을 직접 읽는 것이 필수라고 했다. 고전에 대한 해설서들이 넘쳐나고 있는 현실에서 해설서들은 원전을 이해하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된다며 피할 것을 권한다. 6장에서는 인문고전 독서법이 친절하게 안내되어 있다.

책의 말미에 붙어 있는 부록은 군더더기로 치부하기 쉽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부록에 꼭 필요한 것을 수록해 놓았다. 즉 인문고전 독서의 필요성을 시종일관 강조해왔는데,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도구들을 준비해 놓았다. 그리고 부록 3으로 철학에서 경영에 이르기까지 각 영역을 대표할 수 있는 인문고전 독서가 60명을 간단히 소개해 놓았다. 세기의 인물들 치고 인문고전을 가까이 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것을 말해 주기 위해서인 것 같다.

독서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렇다 보니 당위론 원칙론적 입장에서 그 중요성을 설파하는 글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지성의 [리딩으로 리드하라]는 인문고전 독서 이론서답게 글의 논거를 꼼꼼하게 미주(尾註)로 처리하고 있어 관련 내용을 보충하는데도 많은 도움을 준다. 그만큼 논지가 탄탄하고 설득력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미주로 처리한 책들이 모두 번역된 것들이기 때문에 언어상의 두려움 없이 다가갈 수 있어서 좋다. 저자의 성실성과 독자를 배려하는 마음이 우러난다.

이 책에 대해 몇 가지 관견(觀見)이 없지 않다. 먼저 부분적이긴 하지만, 내용의 넓이에 비해 깊이가 뒷받침 되지 않고 있는 듯한 아쉬움이 있다. 저자는 인문 고전을 원문으로 읽을 것을 주장하고 있으나 인용한 책들은 대부분 번역서들로 채우고 있다. 물론 가이드에 방점을 둔 책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는 해도 이 책이 더 설득력 있게 독자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다. 그렇다 보니 문장이 추상적으로 흐르거나 결과로 원인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원인의 중복, 결과의 반복 설명으로 흐르는 경향이 가끔 눈에 띈다.

가령 해설서의 오류를 설명한 부분이 여기에 해당될 수 있을 것이다. 또 인문고전을 읽다보니 체계가 저절로 잡히는 이유를 설명하는 부분도 추상적으로 흐른 점이 없지 않다. 저자의 글을 그대로 옮겨 본다. 

"최근 중국의 유명한 교수가 쓴 동양고전 해설서를 읽었는데, 나는 그의 몇몇 의견, 특히 묵자에 관한 부분에서 치명적인 한계와 오류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마도 옛날 같았으면 그 교수의 의견에 압도되었을 것이고,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데 급급한 나머지 정작 중요한 인문고전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207쪽).

"아리스토텔레스를 읽다보면 플라톤을 읽지 않으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나온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 읽기를 중지하고 플라톤을 읽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플라톤을 읽다보면 프로타고라스라든지 파르메니데스 같은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글을 모르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나온다. 결국 플라톤 읽기를 중지하고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글을 읽을 수밖에 없다."(208쪽)

위 첫 인용 글에서 말하고 있는 묵자의 치명적인 오류와 한계를 발견하게 되었다고 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여기서 간단히 밝혀 주는 것이 독자에 대한 봉사요 예의이다. 또 뒤 인용 글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읽다가 플라톤을 읽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나온다고 했고, 플라톤을 읽다보면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글을 모르면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나온다고 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대표적인 예라도 하나 들어주는 것이 책 내용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 될 것이다.

인문고전 도서를 권장하는 이유가 처세술, 성공학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듯한 것도 지적되어야 할 것 같다. 저자는 이미 [스물일곱 이건희처럼], [여자라면 힐러리처럼], [18시간 몰입의 법칙] 등 처세술에 해당하는 책들을 출간해서 히트시킨 바 있다. 물론 경쟁을 법칙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체세술 성공학은 필요할 것이다. 저자는 워런 버핏, 조지 소로스, 피터 린치, 짐 로저스 등 세계적인 딜러들을 등장시켜 이들이 성공한 것은 인문고전으로 사고를 무장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했다. 이것은 자칫 오랜 세월을 거쳐 인증 받은 인문고전을 자본주의 성공의 수단으로 전락시킬 위험성이 있다. 인문고전은 성공을 위한 처세술용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더불어 살아가는데 사랑의 에너지원으로서 강조되어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강조하고 주장하는 것이 구구절절이 옳다. 하지만 당장 고전 한 권을 정독할 작심을 한다고 해도 완주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 우리에게 인문고전은 당위론적인 설명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읽을 수 있는 조건과 환경을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 즉 좋은 줄 알면서도 실천에 옮기기 힘든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의 방법을 모색하는 일이 병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인문고전을 전적으로 공부하는 대안학교를 만든다든가 또는 정부 주도로 인문교육 학습관 등을 설립하여 자라나는 세대를 교육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것이다.

[리딩으로 리드하라]는 책 출간으로 이지성은 큰일을 해냈다. 평자가 주문한 것은 인문고전 독서를 가이드하는 저자의 몫을 훨씬 벗어나 있는 조직 차원의 문제일 수 있다. 앞으로 함께 고민해 보자는 뜻에서 제기한 것이다. 몇 가지 지엽적인 지적을 했지만 그것들이 이 책의 가치를 훼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완하기 위한 것임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저자가 강조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인문고전을 읽고 인성을 살찌워서 우리의 인격뿐만 아니라 국격(國格)도 한 단계 높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선진국은 경제적 성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정신과 문화 가치가 그것에 따라주어야 한다. 정신과 문화 가치 향상에는 인문고전 독서만큼 좋은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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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의 왕자, 스펄전의 설교 이야기 두란노 목회와신학 총서 9
손동식 지음 / 두란노아카데미 / 2011년 5월
평점 :
품절



손동식 교수는 신진 학자이다. 그만큼 필력이 살아 있고 의욕이 넘쳐난다. 그의 첫 저서가 될 것이다. 믿음의 책들로 유명한 '두란노 아카데미'에서 출판된 것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목회자면 누구나 '두란노 아카데미'를 통해서 책 한 권 쯤은 출판하고 싶어한다. 
 

책 제목도 우리의 관심을 끈다. [설교의 왕자, 스펄전의 설교 이야기]이다. 왜 하필 왕자(王子)란 명칭을 붙였을까? 10여 년 전, 미국의 한 설교 전문지(Preaching)에서 지난 1천년의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설교자는 누구인가를 묻는 설문에서 스펄전이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에게 설교의 황제, 설교의 대가 아니면 설교의 황태자란 호칭을 붙여주지 않았는가.

 책을 읽어 가다가 손 교수가 붙인 명칭에서의 '왕자'는 '프린스(prince)'가 아닌 '왕자(王者)'임을 알 수 있었다. 설교의 왕자 스펄전에 대해서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의 이름과 명성을 알고 있는 만큼 내용도 알고 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조금만 깊이 들어가면 그에 대한 질문에 막히기 십상이다. 그의 명성에 비례해서 그를 깊이 있게 알고 있지 못하다는 얘기가 된다.

이럴 즈음에 손동식 교수가 이 책을 상재함으로써 스펄전에 대해 많은 정보와 지식을 제공해 주고 있다. 스펄전이 설교의 왕자라면 오늘 목회를 하는 우리에게 설교에 대해서 많은 자양분까지 공급해 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고 이 책을 읽어 나갔다. 지금까지 설교에 대한 책을 여러 권 읽고 공부했다. 하지만 대부분 원론적인 얘기여서 그렇고 그런 책으로 내겐 남아 있다. 그리고 신학 이론서에 공통으로 해당되는 딱딱함과 건조함으로 독심(讀心)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는 것이 솔직한 마음이다.

손 교수의 이번 책은 이런 흐름을 간과하지 않고 있었다. 제목에서부터 '이야기'가 들어간다. 이야기의 특징은 재미있어야 하고 또 쉬워야 한다는 점이다. 그의 책이 그랬다. 나는 기존의 설교학에서 느꼈던 부담을 그의 책을 독파하면서 전혀 느끼지 못했으니까. 정말 재미있게 그리고 술술 쉽게 읽을 수 있었다. 수필집이나 소설책이라도 이것만큼 쉽게 읽어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이유가 있다. 저자의 넓고 깊은 지식이 반영된 결과이다. 손 교수는 영국에서 스펄전, 로이드 존스, 존 스토트의 설교를 비교연구해서 박사(Ph. D.)를 취득한 사람이다. 그만큼 정확한 문헌에다 현장 답사, 관련 분야의 영역까지 두루 섭렵하고 이 책을 썼다. 이것이 설교에 도움을 주려고 쓴 책이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설교뿐만 아니라 목회 전반에 걸쳐 점검해 보는 기회가 되었다.

책은 모두 4부로 구성되어 있고, 말미에 부록으로 '주제에 따른 스펄전 설교의 실제'가 붙어 있다. 1부 '설교의 왕자, 스펄전'은 스펄전에 대한 약전(略傳)에 해당된다. 그의 설교를 공부하기 전 인간 스펄전을 알도록 도와주고 있다. 우리는 가끔 글과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사람을 만날 때 당황한다. 가령 문학에서 아름다운 작품을 생산하는 사람이 그 작품과 동떨어진 생활을 할 때 그의 작품까지 버리고 싶어진다.

목회자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아니 어느 영역보다 언(言)과 행(行)의 일치가 요구되고 설교와 삶의 등치(等値)가 요청된다고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책 1부는 스펄전에 대해 신뢰하는 마음을 갖게 한다. 그는 진실한 복음주의자였지만 목회를 교회의 테두리 안에 가두지 않고 사회 곳곳으로 확장해서 사역한 것에서도 그가 무엇을 꿈꾸고 있었는지, 지향점이 무엇이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그는 보육원과 양로원을 운영하고 빈민학교를 설립해서 버려진 아이들을 교육하는 등 사회사업에도 헌신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어쩌면 한 세기 반 전에 활동했던 그는 목회의 전 영역을 아우르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보수 신학자든 진보 신학자든 스펄전을 선입견 없이 소개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그의 목회와 설교에 무게를 더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2부는 스펄전의 설교가 회중에게 왜 설득력 있게 다가갔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말씀 중심에 두고 회중을 염두에 둔 전달 방법을 구사한 것을 이유로 들고 있다. 스펄전은 설교 준비는 철저히 하되 전달은 즉석에서 현장감 넘치게 함으로 듣는 이들로 하여금 지루함을 사라지게 했다. 그는 여기에서 몇 가지 자기 자신의 설교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그림 언어(Picture Language), 센스 어필(Sense Appeal), 드라마티즘(Dramatism)울 들고 있다. 오늘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방법이다.

3부에서는 설교자가 하나님이 세우신 특별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소명의식을 갖고 말씀은 전하되 사람을 의식하고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께 드린다는 마음으로 말씀을 선포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 필요한 것이 끊임없는 기도이다. 설교자 본인뿐만 아니라 그를 위한 중보기도의 필요성도 역설하고 있다. 설교 본문 선택에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구할 것을 권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순전한 복음에 기반할 때 순전한 설교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4부에서는 설교자와 성령님과의 관계성을 논하고 있다. 설교에서 성령의 도움심이 왜 필요한가를 역설하고 있다. 성령은 설교의 모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손 교수는 이유를 성령이 지식 지혜의 영이시고 기름을 부으시는 등 여덟 가지를 들고 있지만 이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성령은 설교의 전부이기 때문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스펄전이 살던 시대와 오늘의 시대 상황은 많이 다르다. 하지만 그가 가신지 한 세기가 지났건만 죽은 그의 설교가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은 왜인가?

손 교수는 사상은 변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 말씀은 진리이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 말씀은 상대적 진리가 아닌 절대적 진리이다. 그 진리의 말씀에 이탈함이 없이 설교를 한다면 어제도 살아 있었고 오늘도 살아 있으며 내일도 살아 있을 설교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스펄전의 설교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는 설교의 목표를 회중의 회심으로 삼아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설교의 핵심 주제로 하고 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주제가 되어야 하지 않는가?

책 뒤에 붙어 있는 부록은 보통 군더더기로 여기기 쉽다. 책의 부피를 일정 정도 유지하기 위해서 붙이는 경우도 없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이 책의 부록은 그런 수준으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왜냐하면 손 교수가 스펄전의 설교에 대해 기술한 것들의 좋은 예가 부록으로 첨부된 설교들이기 때문이다. 설교문 앞에 설명해 놓은 저자의 글이 한 세기 전의 설교를 오늘날의 설교처럼 읽는 데 도움을 준다. 그는 이 설교문들도 기도 끝에 엄선한 것들인 것 같다. 오늘 날 목회에 필요한 덕목들-사역, 섬김, 소명, 겸손과 교만, 가정 , 성령-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그렇다.

세속화의 물결이 전방위적으로 몰려오고 있다. 한 세기 반 전 스펄전의 시대에도 그랬던 것 같다. 그는 대중 추수적인, 즉 대중의 구미에 맞춘 설교를 경계하고 있다. 대중은 늘 편하고 쉽고 이기적 유익성을 좇게 되어 있다. 고정된 율법도 타파해야 할 일이지만 말씀에 어긋난 세속화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스펄전에 대한 책을 보면서 느끼는 생각의 일단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몇 가지 느낌이 없을 수 없다. 먼저 책의 장점, 아니 서술상의 장점을 한 가지 첨언하고 싶다. 오늘날을 시각화의 시대라도 한다. 그것도 짧은 시간 안에 간단하게 눈으로 확인하는 것을 선호하는 시대라는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시대 흐름을 잘 파악하고 쓴 것 같다. 대표적으로 손 교수는 설명에 열거법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첫째, 둘째, 셋째... . 이것은 글의 핵심을 요약정리해서 독자에게 제공하는 일종의 서비스 기법이다. 책에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징검다리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것도 그 방면을 두루 알고 있는 전공자만이 구사할 수 있는 필법일 것이다.

스펄전은 철저하리만큼 강해 설교를 주장한 사람이고 또 현장에 적용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의 설교문을 보면 본문은 대부분 말씀 한 절이고 길어야 두 절이다. 강해 설교는 본문이 많아야 전할 내용이 풍성해진다. 그런데 단 한 절에서 우리 책 20 쪽 분량의 설교가 나올 수 있다니. 손 교수는 그 비결을 우리에게 겸손하게 알려주고 있다. 본문은 단 한 절을 선택했을지라도 전후 문맥에 대한 성경 읽기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는 좋은 정보이고 시사임이 분명하다.

손 교수는 젊은 학자이다. 그의 책은 그래서 톡톡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의 표현력도 아주 풍요롭다. 글쓰기에 탄탄한 기반도 구축하고 있다. 이것은 그의 책을 쉽게 손에 잡게 만들고 또 짧은 시간에 독파하게 만든다. 한 가지 사족으로 덧붙인다면 '스펄전의 전달법'에서 '그림 언어'를 설명하는 부분(32쪽)인데, '공감각적 표현'을 조금 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 복합 감각적 표현과 그것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공감각적 표현은 반드시 감정의 전이 현상이 수반되어야 한다. 즉 '꽃처럼 붉은 울음',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등에서 보는 것처럼 한 감각에서 다른 감각으로(앞의 예에서는 둘 다 시각에서 청각으로)전이될 때 공감각(synaesthetic)이라고 한다. 한 문장에 감각이 두 개 이상 병렬되어 있고 감정의 전이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그냥 복합 감각적 표현이라고 하면 될 것이다. 

우리는 설교에 대해 날카로운 시선과 묵직한 무게를 느끼게 하는 한 사람의 젊은 학자를 가지게 되었다. 손 교수가 학위를 받고 귀국한지가 오래지 않다. 그럼에도 열정적으로 연구와 발표를 거듭해서 이렇게 중후한 책을 출간한 것은 그의 기쁨을 넘어 우리의 기쁨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늘 해도 부담으로 작용하는 설교, 그 부담을 줄여 주는 데 손 교수의 역할이 기대된다. 정진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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