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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아톤 - Malaton
영화
평점 :
상영종료
1. 소문없이 조용히 찍은 영화지만 평이 워낙 좋아서 보러 갔었는데, 기대하고 가서 기대 이상을 얻어오기도 오랫만이다. 두말 할 필요 없는 올해, 아니 요 즈음 본 영화 중에서 최고의 영화. 어지간해선 잘 안우는 내가 영화 마지막엔 숨이 막힐 정도로 많이 울었다.
2. 한국영화건 외국영화건 요즘 영화에 제일 아쉬운 건 내러티브였다. 어딘가 어색하고 도무지 주인공들에게 완벽한 감정이입이 안되는 스토리 라인의 영화들이 판을 치던 가운데, 이 영화는 어찌 보면 작고도 사소한 이야기를 거의 완벽한 내러티브로 구성해냈다. 물론 구태의연한 부분도 있고 뻔한 복선도 있지만, 그 모두가 서로 깔끔하게 연결지어지는 솜씨는 일류다. 직접 쓴 각본으로 이런 영화를 만들어낸, 장편영화로는 이 영화가 데뷔작이라는 정윤철 감독에게 찬사를 보낼 수 밖에.
3. '자폐증'은 병이 아니라 장애라고 했던가. 1000명에 한명 꼴이라 지금 우리나라엔 4만명의 자폐아가 있다고 한다. 하긴 지난번 살던 아파트에도 윗층 어느 집엔가 자폐아가 살았었다. 엘리베이터에서 자주 마주쳤는데, 그 엄마는 아이를 항상 정상적인 아이들보다 더 깔끔하고 단정하게 입혀서 학교에 데려가곤 했다. 자주 만나는지라 인사를 건네면 아들에게도 항상 '인사해야지'하고 시켰는데, 그애는 기분이 좋을 때면 인사하는 시늉을 내고 컨디션이 별로인 날은 공격적으로 삐죽대거나 엄마 뒤로 숨어버렸다. 얼굴이 참 많이 닮은 모자간이었는데, 아들의 장애에 대해 숨기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평온하고 맑은 얼굴로 사람들과 소통하던 그 엄마는 참 인상적이었다. 웃으면서 '인사해야지, 아는 사람이잖아' 하고 아들에게 말하는 그 엄마의 얼굴을 보면 나 역시 그 아이에 대해 놀라거나 어려워하지 않고 편안하게 말을 건넬 수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그 단계에 이르기까지 그 엄마가 걸어왔던 길은 얼마나 험하고 멀었을까. 영화에서의 김미숙이 말했듯(역시 자폐아가 등장하는 드라마 '부모님 전상서'에서 김희애도 같은 말을 한다), '저 아이가 나보다 하루만 먼저 죽기를' 소원해야 하는 자폐아 엄마들의 마음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짐작한다 말하기도 미안하다. 자폐아에 대한 모든 짐을 엄마에게만 지우는 우리 사회의 제도도, 현실도 미안하다.
4. 그렇지만 영화 속의 초원(조승우)는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물론 영화가 좋은 쪽을 많이 보여주었다는 것은 알지만, 초원이만큼 사랑스럽고, 애처롭고, 짠한 캐릭터를 나는 보지 못했다. 다리를 쓰지 못하는 것처럼, 귀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자폐증은 감정적인 장애인데, '소통'을 기본으로 하는 이 사회에서 '소통'이 힘든 그 아이들이 살아가는 것은 어려울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사람의 망막에 어스름히 비치는 빛처럼, 초원의 '소통'은 감동적이다. 코치에게 내민 물 한병, '비가 주룩주룩 내려요' '초원이 심장이 콩닥콩닥 뛰어요'라는 말 한 마디, 내일 할 일에 '말아톤'이라 적어놓은 그림 일기...나름대로 그가 세상과 소통하는 이 모든 방식을 보면서 관객은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다. '울어라'라고 강박하는 최루성 영화가 아님에도, 이 영화가 무엇보다 많은 눈물을 자아내는 까닭이다. 거기다 마라톤 대회 중간에 초원이가 초코파이를 받아가는 장면처럼, 엉엉 울다가도 피식 미소짓게 하는 장면까지 끼어 있음에야.
5. 초원과 엄마의 관계가 영화의 눈물을 자아낸다면 코치(이기영)의 등장 덕에 영화는 무거움을 떨쳐내고 유머를 더한다. 이 영화에서의 이기영이 황선홍과 너무 닮았다는 이야기는 이미 듣고 가긴 했지만, 원래 닮은 외모에다 노상 트레이닝 웨어만 입고 나오는 복장까지 비슷하니 정말 어찌나 황새를 연상시키는지. 거기다 성격까지 너무나 황새스럽다(그 배째라 모드란...거기다 자두와 짜장면 장면에선 거의 기절했다). 인간적인 약점을 마구 드러냄에도 불구하고, 또 너무나 인간적이라 도무지 미워할 수 없다는 점에서도 그는 내 머릿 속의 황새를 닮았다. 황새의 팬인 입장에서, 그래서 이 영화가 더 재미있기도 했었고.
6. 영화 마지막에서 초원이는 춘천 마라톤의 코스가 아니라 자신의 세계를 뛰어간다. 엄마의 손을 놓고, 마트를, 지하철역을, 아프리카의 초원을 뛰어 건넌다. 손을 놓는 것이 아쉬웠던 건 초원이보다 엄마였지만, 장애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엄마의 손을 놓고 혼자 자신의 세계를 건널 수 있는 힘을 이미 가지고 있다. 뛰어가는 초원이의 뒷모습을 보면 인간이란 참으로 불완전해서 슬픈 존재지만, 그 슬픔으로 인해 아름다운 존재라는 걸 새삼 느끼게 된다. '말아톤', 모두에게 꼭 권하고 싶은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