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새빨간 거짓말 1 - Bird Red Lie
이시영 지음 / 시공사(만화) / 2003년 8월
평점 :
품절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라는 명제에 이미 동의한 다음이라 해도, 신선하고 기발한 상상력을 만나는 건 언제나 즐겁습니다. 이 단편집을 읽으면서 '이시영'이라는 작가에 대한 세간의 호평이 근거없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건 새로운 수확이었구요.
제목부터 어딘가 기발함을 자랑하는 이 책에는 세 편의 단편이 실려있습니다. 첫번째 에피소드 '화성인 지구 정복', 잃어버린 연인의 모습을 하고 돌아온 존재. 스스로 화성인이라 고백하지만 여주인공은 화성인이건 아니건 그를 붙잡을 수 밖에 없습니다. 두번째 에피소드, '정말 불가능한 일입니까?', 인구의 대부분이 인공 분만의 클론 남자이고 극소수의 자연 분만 여자들이 성인처럼 떠받들리는 사회에서, 그 여성(女性이 아니고 女聖입니다!)에게 임신시킬 수 있는 또 소수의 선택받은 남자인 주인공. 그런데 그는 그 특권을 제대로 누리기보다는 그 여성들과 친구가 되고 싶어 하는 순진한 꿈을 가지고 있고 그 때문에 매일 여성들에게 차이기만 하지요. 그런 그가 이번에 만난 13번째의 마지막 여성은 이제까지와는 좀 다릅니다(이 두 편은 이전 화이트 연재작입니다). 세번째 에피소드, '공상과학전기' 인간과 로봇 간의 식상하다면 식상한 스토리입니다만..저 역시 처음 잡지('오후'제 1호)에서 읽을 때는 역시 그 반전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제가 워낙 좀 둔한 편이라...).
개인적으로 세번째 에피소드는 아무래도 두번째 읽는 작품이다 보니 그저 그랬고, 첫번째 에피소드는 이 작가의 패턴을 이해하느라 좀 정신없이 읽었지만 해피엔딩임에도 불구하고 세 편 중에 제일 슬펐던 걸 고르라면 이쪽. 마음에 들기는 두번째 에피소드가 제일 마음에 들더군요. 작가 자신은 '삐딱한 페미니즘'이라 표현하고 있지만 '미아 바이러스'라는 설정을 보면서 어딘가 굉장히 섬뜩해지기도 했고...절대 그럴 일은 없겠지만 너무 있을법하다고나 할까요. 무엇보다도 상당히 삭막한 주변상황에도 불구하고 대책없이 순진하고 낭만주의자인 남자주인공이 참 사랑스웠습니다. 마지막의 가벼운 반전도 좋았고, 톡톡 튀는 여주인공의 대사도 신선했구요.
이시영의 스토리와 그림 중에 어느 쪽이 나으냐, 고 물으면 스토리라고 대답해야겠지만, 동시에 스토리와 그림이 상당히 잘 어울리는 것도 사실입니다. 친근하고 예쁘다기 보다는 어딘가 낯설고 서늘한 그림인데 그 느낌이 스토리와 잘 맞다고 해야하나..이 작품집 외의 좀 더 일상적인 소재의 다른 작품이 있는 걸로 아는데, 다른 작품에서는 어떤 느낌일지 한번 챙겨봐야겠다 싶네요.
시공사에서 '오후' 런칭과 함께 기획했을 듯한 'Owho Original'이라는 라벨로 나온 책인데, 종이질이나 표지디자인 모두 상당히 만족스럽습니다. 그에 대한 댓가인지 5000원이라는 가격은 좀 부담스럽긴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