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 you can 쏘유캔 - 롱보드와 함께하는 세계여행
권도영 지음 / 푸른향기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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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랑 밥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롱보드를 타고 싶어!"라고 친구가 말했다. 날아라 슈퍼보드는 아는데 롱보드는 뭐냐고 내가 물으니, 내가 알고 있던 슈퍼보드보다 얇고 긴 보드를 타며 나풀나풀 춤추듯이 자유롭게 흘러가는(?) 보더의 짧은 영상을 보여줬다. 그제서야 TV에서 본 적 있어!! 하고 맞장구를 쳤다. 친구는 롱보드를 배워서 꼭 타고 싶다고 말했고 내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온 말은, 놀랍게도 다치면 어떡해?였다. 다른 보드에 비해 배우기 쉽고 안전하게 타면 괜찮다고 나를 달래며 친구는 롱보드 찬양을 이어갔다. 롱보드, 어쩌면 나에게는 가장 먼 존재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이렇게 책으로 만나게 될 줄이야!


이 책에는 서른 살이 된 작가가 자신을 새로운 세상으로 이끌어준 롱보드를 들고 세계여행을 하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전 세계 보더들을 만나 친구가 되고, 기꺼이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해주는 친구들과 각 도시의 스팟에서 보드를 탄다. 일상을 나누고, 보드 크루징을 하고, 세계 롱보드 대회에 출전도, 심사도 하는 여행. 뻔한 곳으로 여행을 떠나 당연하게 찾는 주요 관광지에 대한 뻔한 이야기가 담겨있지 않아서 좋았다. 현지에 살고 있는 친구들의 일상을 공유하고 마치 현지인인 듯 동네를 누비는 일이 즐거웠다. 대체로 여유로웠고 때로 긴박했지만 그의 모든 여정이 사랑스러워 나는 자주 웃었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

그 말이 오래 기억에 남아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그가 만나는 전 세계 다양한 친구들의 삶을 엿보며 어딜 가나 사람 사는 것 다 똑같구나, 그런 상황이 닥쳤을 때 이렇게 반응할 수도 있구나, 보드를 가지고 세계여행을 하는 사람도 있구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으니 나는 나대로 좋아하는 것을 꼭 잡고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사람답게 사는 일에서 그런 결론에까지 도달할 수 있어서 좋았다.

이제 와 롱보드를 탈 용기는 없지만, 나를 통해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남들도 좋아하게 만드는 일. 나는 그것에 용기를 내어볼까 한다. 롱보드를 타고 그만의 속도로 자유롭게 흘러가는 것이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여행은 잃어버린 생기를 불러일으킨다. 내 감정에 충실하게 해준다. 삶의 열정이 있는 사람들과 연결해주고, 행복을 공유하게 해준다. 어쩌면 내가 여행을 하는 동안 나는 많이 바뀌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다만 언제나 그랬듯이, 내가 걸어온 여행의 경험들은 느리지만 확실하게 내 삶에 녹아들 것이다. 천천히, 깊숙하게, 그리고 단단하게. - P40

열정이 생기는 가장 쉬운 방법을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열정적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다. 더 좋은 방법은 내가 열정적이 되어 다른 이들을 열정으로 물들이는 것이다. 마리아는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으로 내게 질문을 던진 셈이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열정적인 사람인가? 혹은 타인의 열정을 식히는 그런 사람인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답은 정해져있다고 가볍게 말할 게 아니라,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나도, 그리고 당신도, 어쩌면 그리 어렵지 않을지도 모른다. - P90

포기하는 용기와는 반대로, 눈앞에 정작 중요한 파도가 왔을 때, 그걸 붙잡을 용기가 부족할 때도 있다. 망설이고 또 망설인다. 이래도 되는 걸까?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살지 않는 것 같은데, 정말 도전해도 되는 걸까? 내 인생, 이래도 되는 걸까? 라는 두려움에 망설인다. 제자리걸음을 반복하는 것 역시 신발밑창을 닳게 만든다. 망설이다보면, 파도는 이미 저 멀리 흘러가버린다. 뒤늦게 패들링을 한다쳐도 잡을 수 없다. 새로운 파도를 기다려야 한다. - P129

앞으로도 매번 힘든 일과 즐거운 일이 공존할 것이다. 주변상황에 너무 휩쓸리지 않으면, 여유가 생기고 삶의 아름다운 부분들이 보인다. 간혹 검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을지라도, 내 슬픔만큼이나 폭우를 쏟아내도, 파란 하늘은 그 자리에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꽃은 피고 지지만, 모든 꽃은 그대로 아름답다. 석양에 뺨을 물들이고, 짙은 밤하늘의 별과 달이 보이는 날에 소중한 사람과 함께 웃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좋다. - P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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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아픈 구두는 신지 않는다
마스다 미리 지음, 오연정 옮김 / 이봄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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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도 못 가고 누군가 만나는 것도 눈치 보이고 비는 또 왜 이렇게 많이 내리는지.... 그래서 도통 힘이 나지 않는 요즘이었는데 마스다 미리 에세이 읽으면서 지난 날의 좋은 추억들을 꺼내오게 됐다. 너무 따뜻하고 행복했던 추억의 힘으로 또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힘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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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차려보니 2020년의 반이 훌쩍 지났고, 코로나 사태는 잠잠해질 기색 없이 길어져 가니 문득문득 아무 거리낌 없이 떠났던 날들이 떠오르곤 한다. 자유로운 여행이 가능했던 지난날들이 사치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날들에 마음에 위로가 되었던 여행책을 몇 권 추천해보려 한다. 이건 당장 떠나고 싶지만 집콕해야만 하는 나를 위로하는 포스팅이면서 해외여행에 관심이 없었던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던 고마운 책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첫 번째 여행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책을 처음 만났던 2009년 내가 쓴 책 후기에는 이런 말이 적혀있다.

'관심도 없었던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이만큼이나 가고 싶은 나라로 만들다니! 우연히 소개받은 책 치고는 굉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0대 초반의 남미라는 곳에 무지했던 나에게 남미의 매력을 알게 해준 책이고,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과수 폭포를 동경하게 하고 세계의 끝 우체국에서 편지를 적는 일을 상상할 수 있게 한 책이기도 하다. 책 제목처럼 무언가를 찾거나 혹은 버리기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떠나온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는 책. 낯선 도시에서 만난 낯선 사람들의 위로와 광활한 풍경이 주는 경이로움이 훗날 앞으로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됐다.

그 이후로 많은 매체에서 남미의 곳곳을 소개해 줬고 여전히 나에게 남미는 <꼭 가보고 싶은 나라> 중의 한 곳이면서 쉽게 떠날 수 없는 먼 존재 같은 곳이지만, 언젠가 진짜 남미에 가게 됐을 때 책 한 권을 가져갈 수 있게 된다면 당연하게 이 책을 선택할 것 같다. 이미 현실에는 없을 OJ여사와 원포토, 나작가, 박벤쳐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며 내게서 버려질 것들과 그로 인해 담아올 수 있는 새로운 것들을 꾹꾹 눌러 담고 싶다.


126p

어쩌면 나이가 들어간다는 건 취향이 변한다는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좋아했던 것이 시들해지고, 그토록 경멸했던 것이 새롭게 보이니 말이다.

132p

사랑은 한 가지 감정으로 찾아와 어느 순간 천 가지 컬러로 다양한 변화를 일으킨다. 때로는 주체할 수 없는 기쁨으로 마음의 평안을 주고, 때로는 비수 같은 칼날을 휘저으며 고통의 변주를 한다.

190p

비행기 일등석을 타고 다니면서 고급 호텔에 묵고, 최고급 요리를 먹는다고 해서 우리 영혼의 허기까지 채워지는 건 아니다. 세상에는 또 다른 차원의 즐거움이 있는 것이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어울리고 타인에게 자신을 마음껏 드러내 보이는 풍요로운 자유 같은 것 말이다.

200p

"여기, 지구 반대쪽 끝까지 오는 사람들은 둘 중 하나야. 필사적으로 뭔가를 찾으려 들거나, 아니면 모진 마음을 먹고 뭔가를 버리려 하거나. 어느 쪽이든,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의 행복을 찾기 바라는 마음에 그 고생을 하며 여기까지 온 거지."




두 번째 여행지

<이탈리아 시칠리아>



이 책은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김영하의 시칠리아'라는 부제를 보고 단번에 알아챘으면 좋았을 텐데 그의 오랜 여행 에세이와 더불어 시칠리아라는 도시까지 전부 잊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신간을 목 빠지게 기다리던 중이었고 새로운 옷을 입고 새 책이 나온다는 소식만 듣고 기뻐했던 것이 더 많은 것을 잊게 했다. 아무튼 거슬러 올라가 보자면 이십 대 중반, 김영하라는 작가를 알게 되고 그의 소설을 모조리 찾아 읽어내리기 시작하면서 만나게 된 여행 에세이 중 하나였다. 그때의 제목이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였고 살이 조금 덧붙여져 새로 태어난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 같은 여행지에 훌쩍 시간이 지나 다시금 방문했을 때의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그때는 이런 기분으로 방문했던 도시가 지금은 전혀 다른 기분으로 와닿을 때. 그때는 보지 못했던 풍경이 지금의 내게는 새롭게 다가올 때. 그때 걸었던 길이 지금도 눈에 선할 때. 나이를 먹으면서 변하는 수많은 것들과는 다르게 여행지의 풍경만이 그대로일 때 주는 위로와 위안을 다시금 떠올리는 그런 많은 순간을 떠올릴 수 있어서 좋았다.


35-36p

읽지 않는 책들, 보지 않은 DVD들, 듣지 않는 CD들이 너무 많았다. 인터넷 서점에서 습관적으로 사들인 책들이 왜 자기를 읽어주지 않느냐고 일제히 나를 비난하고 있었다. 그런 비난이 두려워 우리는 후회의 순간을 미래로 이월해버린다. 나중에는 보겠지. 언젠가 들을 날이 있을 거야. 그러나 그런 날은 여간해서 오지 않는다. 새로운 물건들이 계속 도착하기 때문이다. 나는 한순간의 만족을 위해 사들인, '너무 오래 존재하는 것들'과 결별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사서 축척하는 삶이 아니라 모든 게 왔다가 그대로 가도록 하는 삶, 시냇물이 그러하듯 잠시 머물다 다시 제 길을 찾아 흘러가는 삶. 음악이, 영화가, 소설이, 내게로 와서 잠시 머물다 다시 떠나가는 삶. 어차피 모든 것을 기억하고 간직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냐.

91p

나는 시라쿠사의 퇴색한 석회암 계단에 앉아 저 멀리 희붐하게 빛나는 지중해의 수평선을 보며 열아홉 살의 봄에 경험했던 찬란한 행복을 회상했다. 모두 같은 색의 티셔츠를 입고 손을 높이 쳐든 채 <젊었다>를 부르던 그날을. 그럴 때 여행은 낯선 곳으로 떠나는 갈 데 모를 방랑이 아니라 어두운 병 속에 가라앉아 있는 과거의 빛나는 편린들과 마주하는, 고고학적 탐사, 내면으로의 항해가 된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타오르미나의 그리스식 극장에 앉아 나는 그때의 노래를 소심하게 웅얼거린다. 간단한 가사를 계속하여 반복하던, 그래서 신입생들도 쉽게 따라 배울 수 있었던 그 응원가는 이렇게 끝난다. 그대여, 그대여어어, 너와 나는 태양처럼 젊었다.




세 번째 여행지

<조지아>



이 책은 가장 최근에 읽은 여행책이다. 조지아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서 책 제목을 그대로 소리 내어 읽으며 "대체 조지아에 뭐가 있는데요?" 되물었던 기억이 난다. 정말이지 '조지아'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몰라서 지도를 검색하고 위치와 도시의 이름들을 확인한 후에야 책을 펼칠 수 있었다.

생판 초면인 도시를 알아가는 일은 마치 새로운 여행지를 마주하는 일과 비슷하다. 새로운 곳으로 여행을 가기 위해 여행책을 읽고 지도를 보고 사람들의 다양한 후기를 마주하는 마음으로 책을 읽었다. 나는 주로 여행 전, 여행지를 선택할 때 그곳에 대한 정보나 세밀한 일정 조율 등은 생각하지 않고 사진을 본 후에 직접 가서 보고 싶은 곳의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편인데 일단 펼쳐든 책 속의 조지아 풍경이 나를 사로잡아 관심을 가지게 됐다. 거기에 내가 여행하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숙소와 먹는 것인데 그것에 대한 자세한 소개가 가장 마음에 들어 더욱 관심이 생겼다. 에세이보다는 가이드북에 가까웠는데 딱딱하게 장소에 대한 설명이 아닌 것도 마음에 들었다.

조지아의 광활하게 펼쳐진 풍경을 떠올리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상상을 하니 지금 당장 조지아로 떠나고 싶어진다.


91-92p

케이블카를 타지 않고, 나리칼라 요새로 걸어 올라간다면, 도중에 만나는 골목 샛길로 잠시 빠져보면 좋겠다. 예상치 못하게 아름답고 풍요로운 것들을 자꾸자꾸 마주치게 되니까. 푸르른 잎사귀 우거진 비탈길에서 과일 열매를 발견하기도 하고, 시간을 가늠하기 어려울 무렵이면 꿈뻑 잠에 빠져든 개나 고양이를 만나기도 하며, 범퍼가 없는 낡은 자동차를 타고 스릴 넘치는 골목 운전에 능한 운전사들을 만나 박수 칠 일도 있을 테니.

104p

사랑을 하는 그 순간이 행복할 때에도 우리는 이 행복이 무너질까 두려워한다. 이런저런 이분법적인 마음은 왜 사랑을 하는 순결한 시간에도 찾아오는 걸까. 그래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사랑에 빠져 있는 마음을 작은 자물쇠라는 물건에라도 가두고 싶은 걸까. 사랑은 그 자리에 그대로 남는다.

179p

산책은 여행의 일부였다. 자주 걸었지만 조금은 느렸고, 멀리 걸었지만 가끔은 돌아가는 날도 있었다. 산책하는 시간이 누적될수록 여행의 질감을 느끼는 일에 익숙해졌던 것 같다. '지금' 내게 주어진 시간에 감사한다. 오감이 파르르 진동한다. '여행은 몸으로 읽는 텍스트'라는 김영하 작가의 말에 공감하며 걸었다.




네 번째 여행지

<일본 도쿄>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러스트 작가가 적은 내가 좋아하는 도쿄에 대한 이야기. 이건 주기적으로 봐줘야 하는 책인데 읽으면, 심신의 안정을 찾는 동시에 도쿄로 당장 떠나고 싶은 욕구가 번갈아 찾아와 괴로운 책이다. 나는 사실 일본의 도시는 그렇게 궁금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일본의 자연이 좋았고 오래된 사찰이 좋았다. 그러다 처음으로 방문했던 도쿄는 상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라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명동 같은 거리를 조금만 벗어나도 숲처럼 우거진 공원에 갈 수 있었고, 새로운 것들과 오래된 것들이 적절하게 채워져 있어 조화롭기까지 했다. 이상했다. 그리고 조금 울적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오래 있고 싶었고 좀 더 걷고 싶었다.

이 책을 읽을 때는 구글 지도를 같이 펼쳐두고 번갈아 보면 더 좋다. 나는 가고 싶은 곳이 생기면 지도에 깃발을 꽂아두는데 책을 읽으면서 꽂아둔 장소를 눌러 사람들이 올려둔 여러 사진들을 보는 재미가 좋다. 작가님의 귀여운 일러스트와 현실의 도쿄를 같이 보는 재미도 좋고. 언제 또 일본에 갈 수 있게 될지 잘 모르겠지만, 랜선 여행만으로도 심신의 위안을 찾게 될 때 꺼내보면 참 좋다.


5p

여행은 무얼까. 쉬러 떠나는 게 여행이라면 나는 어쩌면 '여행'을 좋아하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그냥 어떤 시간을 좋아하는데, 그 시간이 여기에 없을 때 그 시간을 향해서 이동한다. 비슷한 류의 좋아하는 시간은 평소에도 주위에 적당히 퍼져 있다. 종종 주위에 없을 뿐이다. 각자 떠나는 이유야 아무래도 좋으니 '여행'이라 부르기로 약속한 게 아닐까.

떠나고 싶지 않아. 하지만 나를 구경하고 싶다.

24p

엉뚱하고 친숙한 일러스트가 담긴 문구들을 보니, 호텔에서 나설 때 돈을 얼마 가져왔는지 궁금해졌고 곧바로 지갑 상태를 확인해보았다. 귀엽기 때문에 쓸모 있는 것들은 분명 살 가치가 있으니까. 그러려고 여태 돈 벌고 살았던 거야.

작은 물건마다 하나하나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 얼굴이 떠올라 작고 비싸지 않으면서 좋은 그리움이 느껴지는 귀여운 물건들을 담고 있자니 어느덧 통유리 창문에 내 얼굴이 비치는 시간이 되었다. 지금의 나, 이곳과 무척 어울리는 것 같아.

108p

좋아하는 걸 얼마큼 더 좋아해야 알고 싶은 모든 걸 다 알게 될까. 무언가를 좋아함에도 에너지가 필요하고, 나는 쉽게 지치는 나이를 살고 있는데.

275-276p

쇼와 생활 박물관 홈페이지에서, 이제 만화보다 바느질이 좋다고 말하는 타카노 후미코의 최근 모습을 보았다. 간호사로 살다가, 만화가로 살다가, 이제는 바느질을 하며 지내는 백발의 여성. 삶은 길고, 변화는 분명 있다. 지금까지의 짧은 내 생도 그러하듯이.

변화 속에서 휘둘리며 살더라도 단순하게 좋아하는 것들을 꾸준히 안고 가고 싶다. 어쩌면, 모두에게 그런 작은 면모들이 사실은 있지 않을까. 때가 되면 만화책에 빠져드는 심야의 나처럼. 고등학생 시절의 나에게도 그런 심야는 똑같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백발의 할머니가 되어도 쿡쿡거리며 "맞아 맞아" 하며 읽어나갈 만화책들은 꼭 끼고 살리라 다짐했다.




다섯 번째 여행지

<산티아고 순례길>



나를 스쳐간 수많은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책들 중,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이미 지나왔지만 가장 방황하던 스물아홉으로 인해 오랜 여운이 남았던 책이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20대에 이 책을 만나서 산티아고 순례길이라는 곳을 알게 되었다고 해도 내가 산티아고로 향했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이 책을 읽다 보면 그렇게 무작정 걷기만 하는 길도 있다는 걸 알게 된 이후의 나는 조금 다른 스물아홉을 맞이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마음 잘 맞는 친구랑 여행을 가도 의외의 면을 발견해 놀라기도 하고 그로 인해 감정이 상하기도 하고 여행 스타일이 너무 달라서 벽에 부딪히기도 하는 게 여행이다. 하물며 아홉수 때문에 마음의 바닥을 마주한 상태로, 14kg의 배낭을 메고 800km를 걸으며 체력의 바닥을 마주하는 고단한 길 위에서 오랜 친구와 다툼 없이 완주하는 일이 가당키나 한 일인지 놀라우면서 짠하고 뭉클했다. 책 중간중간 그려진 웹툰이 더욱 감정 이입하게 만들어 집 안에 맘 편히 앉아서 책을 읽을 뿐인데 길을 걷는 동지가 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스물아홉에 인생의 느낌표를 못 찾아서 오랫동안 힘겨워했지만, 이 책을 읽으며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인생 느낌표를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코로나로 지친 날들에도 느낌표는 분명 있을 테니까.


34p

'행복해지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해야 할 일들을 만들고 그것들에 쫓겨 왔던, 그러나 정작 행복과는 멀어져 가던 나는 오늘 없었다. 무언가에 쫓기기보다 행복이란 감정을 쫓는 내가 있을 뿐이었다. 이 순간의 우리는 어떤 속박과 굴레도 없는 자유로운 순례자였다.

53p

산티아고라는 한 지점을 향하는 까미노는 보통의 여행이랑 다르다. 많은 것들이 다르겠지만, 그중 가장 매력적인 차별점은 여행이라는 카테고리보다는 더 협소해서 이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특수한 유대감을 주지만, 군대나 동아리 같은 집단보다는 개별적인 목적과 경험을 갖는다는 것이다. 똑같은 길을 걷기에 쉽게 공감대를 형성하지만, 개개인의 경험이나 느낌이 조금씩 달라 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게 참 좋다. 이 길이 종교적인 길이라고 해서 종교에 대한 이야기가 주가 되는 것도 아니다. 다양한 속 재료가 모이니 더 맛있는 이야기들이 오고 간다. 어느덧 공통점이라고는 없을 것 같았던 다국적 순례자들은 푸엔테 라 레이나에서의 맛깔스러운 밤을 보내고 있었다.





투표기간 : 2020-07-13~2020-09-01 (현재 투표인원 : 0명)

1.찾거나 혹은 버리거나
0% (1명)

2.오래 준비해온 대답
0% (0명)

3.대체 조지아에 뭐가 있는데요?
0% (0명)

4.아직, 도쿄
0% (0명)

5.아홉수, 까미노
0% (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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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이 생기는 기분
이수희 글.그림 / 민음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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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남동생이 있다. 하나밖에 없는 절친이다가 어느 날은 세상 원수가 따로 없다가 또 어느 날에는 내게 의지가 되는 하나뿐인 내 동생. 동생 얘기에 앞서 일단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입덧으로 고생시키고 태어나서도 밤낮이 바뀌어 부모님을 고생시키더니 사리분별 가능할 정도로 커서는 온 동네를 뛰어다니며 엄마가 부르기 전에는 집에 가지 않을 정도로 밖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그 정도면 내 동생은 누나를 보고 배운 대로 비슷한 성향으로 컸어야 하거늘, 내 동생은 나와 정반대의 성향으로 엄마 뱃속에서도 있는 듯 없는 듯하더니 태어나서도 세상 순둥이로 자라고 부모님이 하지 말라는 일은 잘 하지 않는 착실한 아이로 자라버리고 말았다. 그런 탓인지 자라는 내내 언제나 내 비교 대상 1순위는 동생이었고, 부모님의 기대와 자랑처럼 자란 동생 곁에 언제나 모나고 말썽투성이인 누나가 있었다. 언젠가 동생이 "나는 다시 태어나면 누나처럼 살고 싶어."라는 의외의 말을 하길래 놀라서 "왜?"하고 물은 적이 있다.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사는 거 부러워서." 대답을 듣고 코웃음치며 너도 지금부터 하고 싶은 것 하고 살면 되지 그걸 뭐 다시 태어나냐고 한 적이 있는데 막상 속으로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어쩌면 마구잡이 되는대로 사는 누나를 두어서 자기도 모르게 착하고 착실하게 자라게 된 것이 아닐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 책은 열 살 터울 자매의 첫 만남에서부터 자라는 동안의 이야기를 4컷 만화로 그린 이야기이다. 두 살 터울 동생과 첫 만남은 당연히 기억이 나지 않는데 자라는 내내 매일 사소한 일로 서로 죽일 듯이 싸우던 동생이 싫어서 엄마한테 초등 고학년이 되어서도 동생을 낳아달라고, 내가 아기를 좋아하니까 잘 돌봐줄 수 있다고 조른 기억이 난다. 아마 그때 부모님이 조금 힘을 냈더라면 나에게도 첫 만남이 기억나는 동생이 있지 않았을까 상상하며 책을 펼쳤다. 제목만으로 떠오른 동생과의 많은 추억은 덤으로 끌어안고.




동생이 생기고, 동생이 자라는 네 컷 사이사이, 이미 어른이 된 작가가 적어내린 추억들이 좋았다. 만약 내게 열 살 터울의 동생이 생긴다면, 그런 가벼운 상상으로 책을 펼쳤는데 오히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의 나와 동생을 생각하게 됐다. 내 세계가 온통 동생이던 시절에 동생의 자그마한 손이 내 손을 꼭 잡았을 때, 동생이 나만 따라오며 웃었을 때, 누나라고 처음 발음했을 때 나는 얼마나 뭉클하며 기뻤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이상해져 울음이 터졌다. 자신은 없지만 문득 궁금하다. 나는 네가 내 동생이라서 줄곧 외롭지 않고 너무 행복했는데 너는 내가 누나라서 행복했을까?


엄마가 컴퓨터와 연결된 멀티탭을 숨기고 출근하시면 하교하고 집에 와서 합심하여 멀티탭을 찾아 컴퓨터를 하던 날.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하는데 고학년 형들이 와서 축구 못하게 한다고 우리 반까지 이르러 온 동생을 데리고 내 동생도 축구하게 비켜달라며 화를 내다 울어버렸던 날. 같이 놀아달라는 동생에게 거짓말을 하고 친구를 만나러 갔던 날. 같이 처음으로 구민회관으로 영화를 보러 갔던 날. 만화책을 잔뜩 빌려와 방에 마주 앉아 읽던 날. 모두 떠올릴 수도 없을 만큼 쌓인 추억들이 우리에게 많이 있다. 잊고 있었던 추억들을 꺼내보며 괜히 애틋해져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주절주절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니 가만히 듣고 있던 동생이 한 마디 한다. "바쁘니까 용건만 간단히." 내가 전화한 거거든? 하고 웃으면서 알겠어 수고해 전화를 끊었다. 이제는 기억 속 어린 동생은 없고 이제 한 가정의 가장이 된, 나보다 훨씬 더 어른 같은 동생이 곁에 있다. 동생에 대한 에피소드를 나도 간단하게 그려볼까 생각하다가 자기가 나오는 그림을 그린다면 출연료는 얼마나 줄 것인지, 자기를 이렇게 저렇게 그려달라, 감놔라 배놔라 할 것 같아 그만두기로 한다. 책을 읽으면서 애틋해진 기분을 드러내기엔 조금 쑥스러우니 혼자 간직해야지. 작고 귀여웠던 내 동생.





나는 엄마가 밉다. 여전히 밉고 앞으로도 미울 것이다.
그래도 때때로 커피포트를 되찾기 위해 돌아온 그날의 엄마를 생각한다. 그것이 무슨 의미였는지 시간이 흘러 깨닫게 된 것에 안도한다. 미운 사람도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온다. 어쩌면 가족이란 서로의 가여움을 눈치채며 살아가는 사이일지도 모른다.
냄비에 물을 채운다. 불 위에 올려놓는다. 찬찬히 끓어오르게 될, 그러나 아직은 잔잔한 물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커피포트만큼의 빈자리를 느끼며 엄마가 조금 보고 싶어졌다. - P42

유아차라는 단어가 존재하게 된 이유는 뭘까? 인쇄소를 다녀와 기사를 읽었던 그날의 나는 유아차를 알게 됨으로써 일상어였던 유모차를 다시 알게 되었다. 유모차를 다시 알게 만드는 것. 낡은 관습을 깨닫게 하는 것. 일상에 녹아 있는 잘못된 생각을 분리하는 것. 언어의 변화가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 그것이 유아차가 존재하는 이유, 새로운 단어가 존재하는 이유였다.
나와 함께 표지판 앞에 서 있던 아이들은 그 이후로 어떤 걸 보고 들었을까 궁금하다. 나는 그 아이들이 나의 어린 시절과 다른 것을 보고 듣기를 바란다. 유모차를 타고 여배우를 좋아하고 여의사에게 진료받고 여류 작가를 꿈꾸며 누군가의 처녀작을 읽지 않기를 바란다.
유아차를 타고 배우를 좋아하고 의사에게 진료받고 작가를 꿈꾸며 누군가의 첫 작품을 읽기를. - P60

요즘은 그런 생각이 든다. 지금도 동생은 목을 가누었을 때처럼 인생 최초의 무언가를 하고 있지 않을까? 모든 것이 목을 가누었을 때처럼 어렵지 않을까? 그런 동생에게 칭찬과 격려를 마지막으로 한 게 언제였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목을 가누는 순간의 감동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면서 지금까지 수많은 또 다른 목 가누기를 해 왔을 동생에게는 인색했다. 이걸로는 부족하다고. 이 정도는 해야 한다고. 남들도 그 정도는 한다고. - P75

만약 신림동에 가게 된다면 그때의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생겼다. 너는 여전히 잘 울고 잘 웃는다고. 커서 네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게 되지만 지금 너의 그림도 멋지다고. 넌 너만의 영화 취향과 책 취향이 생길 텐데 꽤 괜찮을 거라고. 앞으로 조금 착하기도, 조금 못되기도 한 사람들을 고루 만나게 될 테지만 너도 누군가에게는 그런 사람일 거라고. 내가 두서없이 이런 말을 늘어놓으면 신림동의 그 아이는 웃어 주겠지. 잘 웃는 아이니까. - P103

내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 알기 위해 어른이 되고 싶은 건 아니었는데. 세상은 세상대로 나는 나대로 그렇게 따로 설계되어 있는 것 같았다. -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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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가 되기 전에는 몰랐습니다만 - 슬기로운 초등교사생활
최문혁 지음 / 푸른향기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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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아빠 역시 부모님은 처음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 것처럼, 선생님도 내게는 그런 존재였다. 늘 완벽할 것만 같고 언제나 슈퍼맨처럼 나타나 모든 일을 해결해 줄 것 같은 존재들에게도 처음은 힘들고 어려웠을 거라는 점, 계속해서 배우고 자라는 중이라는 사실을 나 역시 사회 경험을 하고 나서야 깨닫게 됐다. 그때 선생님도 최선을 다하셨겠구나, 지금의 내 나이보다 어렸던 선생님은 어떻게 그렇게 행동하실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들이 떠오르면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나만 선생님을 좋아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며 혼자 토라지고 섭섭했던 시간들이 어쩌면 사랑의 부족함이 아니라 대화의 부족함이 아니었을까. 선생님도 나를 알아가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할 정도로 자라서 선생님의 입장에서 쓰여진 이 책을 만나게 되니 괜히 지나온 시간들이, 상처가 되었던 내 마음이 치유되는 기분이 들었다.



작년에 좋은 기회가 생겨 중학교에 4주 동안 강의를 간 적이 있었다. 학교를 졸업한 이후에 누군가를 만난다거나, 어떤 특별한 날의 이벤트 성 방문이 아니라 제대로 교실까지 들어가 아이들을 마주한 것은 처음이었는데 기분이 묘했다. 자유학기제를 담당하시는 선생님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교무실에서 대기하다가 수업 종이 울리기 5분 전에 앞장 선 선생님을 따라 교실로 찾아가는 동안 얼마나 심장이 요란스럽게 뛰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며칠 동안 수업을 준비하며 상상했던 아이들을 마주하는 순간 그 초롱초롱한 눈빛에 이미 기절할 듯이 아득했던 기억이 난다. 가까스로 입술을 떼 인사를 하고 자기 소개를 하는 동안 딴짓 한 번 하지 않고 나를 바라보던 스무명 남짓한 아이들은, 걱정과 두려움에 덜덜 떨며 수업을 이어가는 내게 많은 질문을 던져주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준비한 4주의 시간이 끝났고 아이들과 짧은 만남과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이별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학창 시절에 만났던 많은 선생님보다 작년에 만났던 아이들과 선생님이 된 나를 훨씬 더 많이 떠올린 것 같다. 선생님은 처음부터 선생님인 줄로만 알았지, 똑같이 첫 만남에 설레고 어색한 사이를 지나 서로를 알아가려고 노력하고 익숙해지는 시간이 필요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이 부끄러웠다. 새로운 선생님을 기다리던 아이들도 나의 어린 시절과 같은 생각으로 나를 보고 있었을 생각을 하니, 좀 더 어른스럽게 능숙하게(?) 대해주지 못한 것은 아니었나 민망함이 밀려왔다. 미안, 나도 선생님은 처음이라서...



선생님이 되려고 준비하는 분들에게 어쩌면 가장 큰 도움이 되는 책이 될 것 같다. 선생님이란 당연히 이렇게 해야 돼!가 아니라 선생님이기 전에 한 사람으로서 여러 상황들을 대처하고 겪어가는 일들을 솔직하게 적어두었다. 나는 앞에서 바라보는 아이들만 보면 모든 역경을 다 이겨내고 헤쳐나갈 수 있는 힘이 생기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고 나서는 생각을 고쳐하기로 했다. 아이들에게 좋은 선생님이 되겠다는 다짐만으로는 선생님이라는 직업을 견뎌낼 수 없을 지도 모르겠다. 좋아하는 것을 직업으로 두었을 때에 오는 괴리감처럼 말이다.




교사가 이러면서 배우고, 발전하고 성장한다고는 하지만 반복되는이런 부딪힘과 곤란함 때문에 가끔 무기력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교사도 사람이라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성장하고 완성되어 간다고는 하지만, 조금 더 완성된 상태로 교직생활을 출발했더라면 아이들도 나도 더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시간을 가졌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이들에게도 나에게도 조금은 미안해지는 날이다. - P50

나는 강하지 않고, 독립적이지 않아서 항상 누군가 나의 편이 되어준다는 확신을 가져야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는 성격이다. 그래서 오히려 의도적으로 ‘내 편이 되어줄 확신‘을 생각하며 지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자그마한 상실감은 금세 내 마음의 크기만큼이나 거대해지고 어느새 나를 집어삼킬 것이다. 나는 모두의 진심 어린 편이 되어 주고 싶다. 그리고 그 많은 사람들도 작은 힘이나마 나한테 내 편이 되어 다가오면 좋겠다. - P64

나도 꽃이다. 아름답고 싶고, 매력 있고 싶고, 꾸준히 피어나고 싶은 그런 꽃이다. 누군가에게는 길가의 흔하디흔한 꽃 한 송이로 다가갈지도 모르며, 누군가에게는 식물원 속 온실 구석에 위치한 아주 생소한 작은 꽃으로 다가갈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나를 힐끗 보고 ‘뭐야 별거 아니네‘라며 지나갈 것이다. 누군가는 내가 여기에 피어났는지도 모른 채 지나갈 것이다.

나는 꽃이다. 다른 이들의 판단에, 다른 이들의 생각에 따라 피고 지지 않는다. 그저 그대로 하루하루 조금씩 자라나는 아름다운 꽃이다. 그 곧은 당당함을 잃지 말자. - P69

아이들은 사랑받고 싶어 하는 의지가 어른들의 백 배 가까이 되는 것 같다. 그 열정이 웬만해서는 식지 않는다. 항상 선생님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고, 표현한 만큼 다시 받고 싶어 한다. 이러한 현상은 일 년 내내, 별일이 없는 한 굴곡 없이 이어진다. 그렇게 천천히 시간을 두고 아이들과 대화하며 생활하다 보면 정말 진심으로 한 명 한 명의 아이들을 예뻐하게 되고,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그때는 벌써 이별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아이들은 새로운 학년과 새로운 친구들, 선생님들에 대한 기대로 이미 마음이 떠나버리곤 한다. 그렇게 선생님은 마지막에 가서야 학생들을 정말로 사랑해버린다. - P79

우리 앞에는 아직 가보지 않은 더 많은 갈래의 길이 있다. 그리고 그 길은 지금 뿌연 안개로 덮여있어 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글의 맨 처음에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 반에는 장난꾸러기들이 많다. 그리고 아이들은 모두 장난꾸러기여야만 한다는 생각 또한 변함이 없다. 우리 반 우리 아이들이 정말 순수한 ‘장난꾸러기‘로 행복할 수 있기 위해선 내가 안개를 쓸어가며 밝은 빛이 나올 때까지 많은 길을 가보는 방법밖에 없을 것 같다.

슬픔과 무기력 틈새에서 책임감과 기대감이 싹트는 참으로 이상한 날이다. - P85

아이들은 어른들에 비해 조금은 더 자기 자신을 자랑스러워할 줄 안다. 아이들은 스스로에 대해 충분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고, 본인이 어떤 점에서 뛰어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표현하기도 한다. 지금은 어른이 되어버린 우리 모두 어린 시절 그런 자신감을 뽐내며 살았을 것이다. 그런 우리가 어째서 커가면서 나를 깎아내리게 되었을까.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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