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 차려보니 2020년의 반이 훌쩍 지났고, 코로나 사태는 잠잠해질 기색 없이 길어져 가니 문득문득 아무 거리낌 없이 떠났던 날들이 떠오르곤 한다. 자유로운 여행이 가능했던 지난날들이 사치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날들에 마음에 위로가 되었던 여행책을 몇 권 추천해보려 한다. 이건 당장 떠나고 싶지만 집콕해야만 하는 나를 위로하는 포스팅이면서 해외여행에 관심이 없었던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던 고마운 책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첫 번째 여행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책을 처음 만났던 2009년 내가 쓴 책 후기에는 이런 말이 적혀있다.

'관심도 없었던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이만큼이나 가고 싶은 나라로 만들다니! 우연히 소개받은 책 치고는 굉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0대 초반의 남미라는 곳에 무지했던 나에게 남미의 매력을 알게 해준 책이고,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과수 폭포를 동경하게 하고 세계의 끝 우체국에서 편지를 적는 일을 상상할 수 있게 한 책이기도 하다. 책 제목처럼 무언가를 찾거나 혹은 버리기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떠나온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는 책. 낯선 도시에서 만난 낯선 사람들의 위로와 광활한 풍경이 주는 경이로움이 훗날 앞으로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됐다.

그 이후로 많은 매체에서 남미의 곳곳을 소개해 줬고 여전히 나에게 남미는 <꼭 가보고 싶은 나라> 중의 한 곳이면서 쉽게 떠날 수 없는 먼 존재 같은 곳이지만, 언젠가 진짜 남미에 가게 됐을 때 책 한 권을 가져갈 수 있게 된다면 당연하게 이 책을 선택할 것 같다. 이미 현실에는 없을 OJ여사와 원포토, 나작가, 박벤쳐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며 내게서 버려질 것들과 그로 인해 담아올 수 있는 새로운 것들을 꾹꾹 눌러 담고 싶다.


126p

어쩌면 나이가 들어간다는 건 취향이 변한다는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좋아했던 것이 시들해지고, 그토록 경멸했던 것이 새롭게 보이니 말이다.

132p

사랑은 한 가지 감정으로 찾아와 어느 순간 천 가지 컬러로 다양한 변화를 일으킨다. 때로는 주체할 수 없는 기쁨으로 마음의 평안을 주고, 때로는 비수 같은 칼날을 휘저으며 고통의 변주를 한다.

190p

비행기 일등석을 타고 다니면서 고급 호텔에 묵고, 최고급 요리를 먹는다고 해서 우리 영혼의 허기까지 채워지는 건 아니다. 세상에는 또 다른 차원의 즐거움이 있는 것이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어울리고 타인에게 자신을 마음껏 드러내 보이는 풍요로운 자유 같은 것 말이다.

200p

"여기, 지구 반대쪽 끝까지 오는 사람들은 둘 중 하나야. 필사적으로 뭔가를 찾으려 들거나, 아니면 모진 마음을 먹고 뭔가를 버리려 하거나. 어느 쪽이든,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의 행복을 찾기 바라는 마음에 그 고생을 하며 여기까지 온 거지."




두 번째 여행지

<이탈리아 시칠리아>



이 책은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김영하의 시칠리아'라는 부제를 보고 단번에 알아챘으면 좋았을 텐데 그의 오랜 여행 에세이와 더불어 시칠리아라는 도시까지 전부 잊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신간을 목 빠지게 기다리던 중이었고 새로운 옷을 입고 새 책이 나온다는 소식만 듣고 기뻐했던 것이 더 많은 것을 잊게 했다. 아무튼 거슬러 올라가 보자면 이십 대 중반, 김영하라는 작가를 알게 되고 그의 소설을 모조리 찾아 읽어내리기 시작하면서 만나게 된 여행 에세이 중 하나였다. 그때의 제목이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였고 살이 조금 덧붙여져 새로 태어난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 같은 여행지에 훌쩍 시간이 지나 다시금 방문했을 때의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그때는 이런 기분으로 방문했던 도시가 지금은 전혀 다른 기분으로 와닿을 때. 그때는 보지 못했던 풍경이 지금의 내게는 새롭게 다가올 때. 그때 걸었던 길이 지금도 눈에 선할 때. 나이를 먹으면서 변하는 수많은 것들과는 다르게 여행지의 풍경만이 그대로일 때 주는 위로와 위안을 다시금 떠올리는 그런 많은 순간을 떠올릴 수 있어서 좋았다.


35-36p

읽지 않는 책들, 보지 않은 DVD들, 듣지 않는 CD들이 너무 많았다. 인터넷 서점에서 습관적으로 사들인 책들이 왜 자기를 읽어주지 않느냐고 일제히 나를 비난하고 있었다. 그런 비난이 두려워 우리는 후회의 순간을 미래로 이월해버린다. 나중에는 보겠지. 언젠가 들을 날이 있을 거야. 그러나 그런 날은 여간해서 오지 않는다. 새로운 물건들이 계속 도착하기 때문이다. 나는 한순간의 만족을 위해 사들인, '너무 오래 존재하는 것들'과 결별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사서 축척하는 삶이 아니라 모든 게 왔다가 그대로 가도록 하는 삶, 시냇물이 그러하듯 잠시 머물다 다시 제 길을 찾아 흘러가는 삶. 음악이, 영화가, 소설이, 내게로 와서 잠시 머물다 다시 떠나가는 삶. 어차피 모든 것을 기억하고 간직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냐.

91p

나는 시라쿠사의 퇴색한 석회암 계단에 앉아 저 멀리 희붐하게 빛나는 지중해의 수평선을 보며 열아홉 살의 봄에 경험했던 찬란한 행복을 회상했다. 모두 같은 색의 티셔츠를 입고 손을 높이 쳐든 채 <젊었다>를 부르던 그날을. 그럴 때 여행은 낯선 곳으로 떠나는 갈 데 모를 방랑이 아니라 어두운 병 속에 가라앉아 있는 과거의 빛나는 편린들과 마주하는, 고고학적 탐사, 내면으로의 항해가 된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타오르미나의 그리스식 극장에 앉아 나는 그때의 노래를 소심하게 웅얼거린다. 간단한 가사를 계속하여 반복하던, 그래서 신입생들도 쉽게 따라 배울 수 있었던 그 응원가는 이렇게 끝난다. 그대여, 그대여어어, 너와 나는 태양처럼 젊었다.




세 번째 여행지

<조지아>



이 책은 가장 최근에 읽은 여행책이다. 조지아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서 책 제목을 그대로 소리 내어 읽으며 "대체 조지아에 뭐가 있는데요?" 되물었던 기억이 난다. 정말이지 '조지아'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몰라서 지도를 검색하고 위치와 도시의 이름들을 확인한 후에야 책을 펼칠 수 있었다.

생판 초면인 도시를 알아가는 일은 마치 새로운 여행지를 마주하는 일과 비슷하다. 새로운 곳으로 여행을 가기 위해 여행책을 읽고 지도를 보고 사람들의 다양한 후기를 마주하는 마음으로 책을 읽었다. 나는 주로 여행 전, 여행지를 선택할 때 그곳에 대한 정보나 세밀한 일정 조율 등은 생각하지 않고 사진을 본 후에 직접 가서 보고 싶은 곳의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편인데 일단 펼쳐든 책 속의 조지아 풍경이 나를 사로잡아 관심을 가지게 됐다. 거기에 내가 여행하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숙소와 먹는 것인데 그것에 대한 자세한 소개가 가장 마음에 들어 더욱 관심이 생겼다. 에세이보다는 가이드북에 가까웠는데 딱딱하게 장소에 대한 설명이 아닌 것도 마음에 들었다.

조지아의 광활하게 펼쳐진 풍경을 떠올리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상상을 하니 지금 당장 조지아로 떠나고 싶어진다.


91-92p

케이블카를 타지 않고, 나리칼라 요새로 걸어 올라간다면, 도중에 만나는 골목 샛길로 잠시 빠져보면 좋겠다. 예상치 못하게 아름답고 풍요로운 것들을 자꾸자꾸 마주치게 되니까. 푸르른 잎사귀 우거진 비탈길에서 과일 열매를 발견하기도 하고, 시간을 가늠하기 어려울 무렵이면 꿈뻑 잠에 빠져든 개나 고양이를 만나기도 하며, 범퍼가 없는 낡은 자동차를 타고 스릴 넘치는 골목 운전에 능한 운전사들을 만나 박수 칠 일도 있을 테니.

104p

사랑을 하는 그 순간이 행복할 때에도 우리는 이 행복이 무너질까 두려워한다. 이런저런 이분법적인 마음은 왜 사랑을 하는 순결한 시간에도 찾아오는 걸까. 그래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사랑에 빠져 있는 마음을 작은 자물쇠라는 물건에라도 가두고 싶은 걸까. 사랑은 그 자리에 그대로 남는다.

179p

산책은 여행의 일부였다. 자주 걸었지만 조금은 느렸고, 멀리 걸었지만 가끔은 돌아가는 날도 있었다. 산책하는 시간이 누적될수록 여행의 질감을 느끼는 일에 익숙해졌던 것 같다. '지금' 내게 주어진 시간에 감사한다. 오감이 파르르 진동한다. '여행은 몸으로 읽는 텍스트'라는 김영하 작가의 말에 공감하며 걸었다.




네 번째 여행지

<일본 도쿄>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러스트 작가가 적은 내가 좋아하는 도쿄에 대한 이야기. 이건 주기적으로 봐줘야 하는 책인데 읽으면, 심신의 안정을 찾는 동시에 도쿄로 당장 떠나고 싶은 욕구가 번갈아 찾아와 괴로운 책이다. 나는 사실 일본의 도시는 그렇게 궁금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일본의 자연이 좋았고 오래된 사찰이 좋았다. 그러다 처음으로 방문했던 도쿄는 상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라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명동 같은 거리를 조금만 벗어나도 숲처럼 우거진 공원에 갈 수 있었고, 새로운 것들과 오래된 것들이 적절하게 채워져 있어 조화롭기까지 했다. 이상했다. 그리고 조금 울적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오래 있고 싶었고 좀 더 걷고 싶었다.

이 책을 읽을 때는 구글 지도를 같이 펼쳐두고 번갈아 보면 더 좋다. 나는 가고 싶은 곳이 생기면 지도에 깃발을 꽂아두는데 책을 읽으면서 꽂아둔 장소를 눌러 사람들이 올려둔 여러 사진들을 보는 재미가 좋다. 작가님의 귀여운 일러스트와 현실의 도쿄를 같이 보는 재미도 좋고. 언제 또 일본에 갈 수 있게 될지 잘 모르겠지만, 랜선 여행만으로도 심신의 위안을 찾게 될 때 꺼내보면 참 좋다.


5p

여행은 무얼까. 쉬러 떠나는 게 여행이라면 나는 어쩌면 '여행'을 좋아하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그냥 어떤 시간을 좋아하는데, 그 시간이 여기에 없을 때 그 시간을 향해서 이동한다. 비슷한 류의 좋아하는 시간은 평소에도 주위에 적당히 퍼져 있다. 종종 주위에 없을 뿐이다. 각자 떠나는 이유야 아무래도 좋으니 '여행'이라 부르기로 약속한 게 아닐까.

떠나고 싶지 않아. 하지만 나를 구경하고 싶다.

24p

엉뚱하고 친숙한 일러스트가 담긴 문구들을 보니, 호텔에서 나설 때 돈을 얼마 가져왔는지 궁금해졌고 곧바로 지갑 상태를 확인해보았다. 귀엽기 때문에 쓸모 있는 것들은 분명 살 가치가 있으니까. 그러려고 여태 돈 벌고 살았던 거야.

작은 물건마다 하나하나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 얼굴이 떠올라 작고 비싸지 않으면서 좋은 그리움이 느껴지는 귀여운 물건들을 담고 있자니 어느덧 통유리 창문에 내 얼굴이 비치는 시간이 되었다. 지금의 나, 이곳과 무척 어울리는 것 같아.

108p

좋아하는 걸 얼마큼 더 좋아해야 알고 싶은 모든 걸 다 알게 될까. 무언가를 좋아함에도 에너지가 필요하고, 나는 쉽게 지치는 나이를 살고 있는데.

275-276p

쇼와 생활 박물관 홈페이지에서, 이제 만화보다 바느질이 좋다고 말하는 타카노 후미코의 최근 모습을 보았다. 간호사로 살다가, 만화가로 살다가, 이제는 바느질을 하며 지내는 백발의 여성. 삶은 길고, 변화는 분명 있다. 지금까지의 짧은 내 생도 그러하듯이.

변화 속에서 휘둘리며 살더라도 단순하게 좋아하는 것들을 꾸준히 안고 가고 싶다. 어쩌면, 모두에게 그런 작은 면모들이 사실은 있지 않을까. 때가 되면 만화책에 빠져드는 심야의 나처럼. 고등학생 시절의 나에게도 그런 심야는 똑같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백발의 할머니가 되어도 쿡쿡거리며 "맞아 맞아" 하며 읽어나갈 만화책들은 꼭 끼고 살리라 다짐했다.




다섯 번째 여행지

<산티아고 순례길>



나를 스쳐간 수많은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책들 중,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이미 지나왔지만 가장 방황하던 스물아홉으로 인해 오랜 여운이 남았던 책이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20대에 이 책을 만나서 산티아고 순례길이라는 곳을 알게 되었다고 해도 내가 산티아고로 향했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이 책을 읽다 보면 그렇게 무작정 걷기만 하는 길도 있다는 걸 알게 된 이후의 나는 조금 다른 스물아홉을 맞이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마음 잘 맞는 친구랑 여행을 가도 의외의 면을 발견해 놀라기도 하고 그로 인해 감정이 상하기도 하고 여행 스타일이 너무 달라서 벽에 부딪히기도 하는 게 여행이다. 하물며 아홉수 때문에 마음의 바닥을 마주한 상태로, 14kg의 배낭을 메고 800km를 걸으며 체력의 바닥을 마주하는 고단한 길 위에서 오랜 친구와 다툼 없이 완주하는 일이 가당키나 한 일인지 놀라우면서 짠하고 뭉클했다. 책 중간중간 그려진 웹툰이 더욱 감정 이입하게 만들어 집 안에 맘 편히 앉아서 책을 읽을 뿐인데 길을 걷는 동지가 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스물아홉에 인생의 느낌표를 못 찾아서 오랫동안 힘겨워했지만, 이 책을 읽으며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인생 느낌표를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코로나로 지친 날들에도 느낌표는 분명 있을 테니까.


34p

'행복해지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해야 할 일들을 만들고 그것들에 쫓겨 왔던, 그러나 정작 행복과는 멀어져 가던 나는 오늘 없었다. 무언가에 쫓기기보다 행복이란 감정을 쫓는 내가 있을 뿐이었다. 이 순간의 우리는 어떤 속박과 굴레도 없는 자유로운 순례자였다.

53p

산티아고라는 한 지점을 향하는 까미노는 보통의 여행이랑 다르다. 많은 것들이 다르겠지만, 그중 가장 매력적인 차별점은 여행이라는 카테고리보다는 더 협소해서 이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특수한 유대감을 주지만, 군대나 동아리 같은 집단보다는 개별적인 목적과 경험을 갖는다는 것이다. 똑같은 길을 걷기에 쉽게 공감대를 형성하지만, 개개인의 경험이나 느낌이 조금씩 달라 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게 참 좋다. 이 길이 종교적인 길이라고 해서 종교에 대한 이야기가 주가 되는 것도 아니다. 다양한 속 재료가 모이니 더 맛있는 이야기들이 오고 간다. 어느덧 공통점이라고는 없을 것 같았던 다국적 순례자들은 푸엔테 라 레이나에서의 맛깔스러운 밤을 보내고 있었다.





투표기간 : 2020-07-13~2020-09-01 (현재 투표인원 : 0명)

1.찾거나 혹은 버리거나
0% (1명)

2.오래 준비해온 대답
0% (0명)

3.대체 조지아에 뭐가 있는데요?
0% (0명)

4.아직, 도쿄
0% (0명)

5.아홉수, 까미노
0% (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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