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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이 생기는 기분
이수희 글.그림 / 민음사 / 2020년 6월
평점 :

나에게는 남동생이 있다. 하나밖에 없는 절친이다가 어느 날은 세상 원수가 따로 없다가 또 어느 날에는 내게 의지가 되는 하나뿐인 내 동생. 동생 얘기에 앞서 일단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입덧으로 고생시키고 태어나서도 밤낮이 바뀌어 부모님을 고생시키더니 사리분별 가능할 정도로 커서는 온 동네를 뛰어다니며 엄마가 부르기 전에는 집에 가지 않을 정도로 밖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그 정도면 내 동생은 누나를 보고 배운 대로 비슷한 성향으로 컸어야 하거늘, 내 동생은 나와 정반대의 성향으로 엄마 뱃속에서도 있는 듯 없는 듯하더니 태어나서도 세상 순둥이로 자라고 부모님이 하지 말라는 일은 잘 하지 않는 착실한 아이로 자라버리고 말았다. 그런 탓인지 자라는 내내 언제나 내 비교 대상 1순위는 동생이었고, 부모님의 기대와 자랑처럼 자란 동생 곁에 언제나 모나고 말썽투성이인 누나가 있었다. 언젠가 동생이 "나는 다시 태어나면 누나처럼 살고 싶어."라는 의외의 말을 하길래 놀라서 "왜?"하고 물은 적이 있다.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사는 거 부러워서." 대답을 듣고 코웃음치며 너도 지금부터 하고 싶은 것 하고 살면 되지 그걸 뭐 다시 태어나냐고 한 적이 있는데 막상 속으로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어쩌면 마구잡이 되는대로 사는 누나를 두어서 자기도 모르게 착하고 착실하게 자라게 된 것이 아닐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 책은 열 살 터울 자매의 첫 만남에서부터 자라는 동안의 이야기를 4컷 만화로 그린 이야기이다. 두 살 터울 동생과 첫 만남은 당연히 기억이 나지 않는데 자라는 내내 매일 사소한 일로 서로 죽일 듯이 싸우던 동생이 싫어서 엄마한테 초등 고학년이 되어서도 동생을 낳아달라고, 내가 아기를 좋아하니까 잘 돌봐줄 수 있다고 조른 기억이 난다. 아마 그때 부모님이 조금 힘을 냈더라면 나에게도 첫 만남이 기억나는 동생이 있지 않았을까 상상하며 책을 펼쳤다. 제목만으로 떠오른 동생과의 많은 추억은 덤으로 끌어안고.

동생이 생기고, 동생이 자라는 네 컷 사이사이, 이미 어른이 된 작가가 적어내린 추억들이 좋았다. 만약 내게 열 살 터울의 동생이 생긴다면, 그런 가벼운 상상으로 책을 펼쳤는데 오히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의 나와 동생을 생각하게 됐다. 내 세계가 온통 동생이던 시절에 동생의 자그마한 손이 내 손을 꼭 잡았을 때, 동생이 나만 따라오며 웃었을 때, 누나라고 처음 발음했을 때 나는 얼마나 뭉클하며 기뻤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이상해져 울음이 터졌다. 자신은 없지만 문득 궁금하다. 나는 네가 내 동생이라서 줄곧 외롭지 않고 너무 행복했는데 너는 내가 누나라서 행복했을까?
엄마가 컴퓨터와 연결된 멀티탭을 숨기고 출근하시면 하교하고 집에 와서 합심하여 멀티탭을 찾아 컴퓨터를 하던 날.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하는데 고학년 형들이 와서 축구 못하게 한다고 우리 반까지 이르러 온 동생을 데리고 내 동생도 축구하게 비켜달라며 화를 내다 울어버렸던 날. 같이 놀아달라는 동생에게 거짓말을 하고 친구를 만나러 갔던 날. 같이 처음으로 구민회관으로 영화를 보러 갔던 날. 만화책을 잔뜩 빌려와 방에 마주 앉아 읽던 날. 모두 떠올릴 수도 없을 만큼 쌓인 추억들이 우리에게 많이 있다. 잊고 있었던 추억들을 꺼내보며 괜히 애틋해져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주절주절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니 가만히 듣고 있던 동생이 한 마디 한다. "바쁘니까 용건만 간단히." 내가 전화한 거거든? 하고 웃으면서 알겠어 수고해 전화를 끊었다. 이제는 기억 속 어린 동생은 없고 이제 한 가정의 가장이 된, 나보다 훨씬 더 어른 같은 동생이 곁에 있다. 동생에 대한 에피소드를 나도 간단하게 그려볼까 생각하다가 자기가 나오는 그림을 그린다면 출연료는 얼마나 줄 것인지, 자기를 이렇게 저렇게 그려달라, 감놔라 배놔라 할 것 같아 그만두기로 한다. 책을 읽으면서 애틋해진 기분을 드러내기엔 조금 쑥스러우니 혼자 간직해야지. 작고 귀여웠던 내 동생.
나는 엄마가 밉다. 여전히 밉고 앞으로도 미울 것이다. 그래도 때때로 커피포트를 되찾기 위해 돌아온 그날의 엄마를 생각한다. 그것이 무슨 의미였는지 시간이 흘러 깨닫게 된 것에 안도한다. 미운 사람도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온다. 어쩌면 가족이란 서로의 가여움을 눈치채며 살아가는 사이일지도 모른다. 냄비에 물을 채운다. 불 위에 올려놓는다. 찬찬히 끓어오르게 될, 그러나 아직은 잔잔한 물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커피포트만큼의 빈자리를 느끼며 엄마가 조금 보고 싶어졌다. - P42
유아차라는 단어가 존재하게 된 이유는 뭘까? 인쇄소를 다녀와 기사를 읽었던 그날의 나는 유아차를 알게 됨으로써 일상어였던 유모차를 다시 알게 되었다. 유모차를 다시 알게 만드는 것. 낡은 관습을 깨닫게 하는 것. 일상에 녹아 있는 잘못된 생각을 분리하는 것. 언어의 변화가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 그것이 유아차가 존재하는 이유, 새로운 단어가 존재하는 이유였다. 나와 함께 표지판 앞에 서 있던 아이들은 그 이후로 어떤 걸 보고 들었을까 궁금하다. 나는 그 아이들이 나의 어린 시절과 다른 것을 보고 듣기를 바란다. 유모차를 타고 여배우를 좋아하고 여의사에게 진료받고 여류 작가를 꿈꾸며 누군가의 처녀작을 읽지 않기를 바란다. 유아차를 타고 배우를 좋아하고 의사에게 진료받고 작가를 꿈꾸며 누군가의 첫 작품을 읽기를. - P60
요즘은 그런 생각이 든다. 지금도 동생은 목을 가누었을 때처럼 인생 최초의 무언가를 하고 있지 않을까? 모든 것이 목을 가누었을 때처럼 어렵지 않을까? 그런 동생에게 칭찬과 격려를 마지막으로 한 게 언제였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목을 가누는 순간의 감동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면서 지금까지 수많은 또 다른 목 가누기를 해 왔을 동생에게는 인색했다. 이걸로는 부족하다고. 이 정도는 해야 한다고. 남들도 그 정도는 한다고. - P75
만약 신림동에 가게 된다면 그때의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생겼다. 너는 여전히 잘 울고 잘 웃는다고. 커서 네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게 되지만 지금 너의 그림도 멋지다고. 넌 너만의 영화 취향과 책 취향이 생길 텐데 꽤 괜찮을 거라고. 앞으로 조금 착하기도, 조금 못되기도 한 사람들을 고루 만나게 될 테지만 너도 누군가에게는 그런 사람일 거라고. 내가 두서없이 이런 말을 늘어놓으면 신림동의 그 아이는 웃어 주겠지. 잘 웃는 아이니까. - P103
내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 알기 위해 어른이 되고 싶은 건 아니었는데. 세상은 세상대로 나는 나대로 그렇게 따로 설계되어 있는 것 같았다. -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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