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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레라 시대의 사랑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7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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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전제....


1. 마르케스 작품은 남미 문학이다.
한국 대하소설들을 읽다보면 이런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이거 다른 나라 사람들도 재미있을까?' 주인공의 파란만장한 인생과 사건들은 우리 민족 집단의 기억과 얽히고 ˜霞?우리는 너무나 재미있지만 다른 나라 사람이 그걸 읽어본 들 재미가 있겠는가. 이문구의 소설등을 생각해 봐도 그렇다. 그 질박한 시골정취의 묘사와 개성 넘치는 주인공들을 과연 다른 나라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난 마르케스의 소설도 비슷하지 않나 생각한다. '백년동안의 고독'도, '사랑과 다른 악마'도, 그리고 '콜레라 시대의 사랑'도 너무나 재미있게 읽었지만, 그건 외국인 독자로써의 한계를 당연히 지녔다는 전제 하에서 일 것이다. '백년동안의 고독'은 남미의 역사와, 콜롬비아의 정치사를 오롯이 담아 한 집안의 흥망성쇠 속에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아내고 있는데, 나로써는 'banana republic의 등장'이라든지, 명실공히 사람들이 모두 기억하는 혁명이 '없던 일'로 치부된다든지 하는 정도 밖에는 catch해 내지 못했으니, 그 재미를 모두 알았을리 만무하다.

2. 나는 아직 어리다.
중년 이후가 되지 않은 사람은 노년을 그릴 수 없다고 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10대 후반부터 전 생애에 걸쳐 묘사되는 이 사랑을 내가 제대로 이해할리 만무하다. 그러나, 그냥 내가 이해하는 만큼만, 그렇게 이 소설을 보련다.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또 소설 속에서 나만의 재미를 찾았다면 그것은 또 전적으로 나의 것이니까.


앞의 두 가지 전제를 깔고 들어가서 보면, 이 소설은 솔직히 tedious하다. 딱 적당한 한국어 형용사가 떠오르지 않은데, 정말 장황하고 수다스러운 가운데 지겹고 따분하다는 말이다. 페르미나 다사, 플로렌티노 아리사, 그리고 가끔 후베날 우르비노의 시점을 오가면서 쓰여진 이 작품은 군데 군데 유머와 우스꽝스러운 묘사에 웃기도 하고,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비참하기 짝이 없는 남미 상황에 씁쓸해하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재미가 없다.
페르미나 다사의 일생은 부유한 상인 계급의 딸로 태어나 용모가꾸기와 태도 가꾸기에 치중하여 마침내 신분 상승을 이뤄내고, 그 이후에는 귀부인의 따분한 삶을 살며 우울증에 빠지기도 하지만 충실히 상류계층 여성으로써의 의무를 해내다 미망인이 되고 마는, 아주 아주 전형적인 인생일 뿐이며,
플로렌티노 아리사의 일생은 비혼여성에게서 태어났지만, 어쨌든 인척관계를 비집고 사회적 성공을 거머쥔 같잖은 낭만주의적 배덕자의 삶.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후베날 우르비노 박사의 경우 이냥 저냥 삶을 영위하고 스스로는 굉장히 양심적인 상류계급 남자이고.
주인공 한 사람 한 사람 뭐 특별할 것도 없고 그다지 공감도 가지 않는 그저 그런 사람들인 가운데, 내 머리 속엔 툭! 하고 '그래, 어차피 인생이라는게 이런건지도 모르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사람 모두에게 사랑은 계속해서 변한다.

페르미나 다사의 경우, '열정적인 편지의 교환'과 '가슴 터질듯한 감정'이 사춘기를 지나면서 스르륵 사그라들어 '삶을 영위하는 어떤 것'으로 의미 변환이 일어나고, 그 과정에서 당연하게 플로렌티노 아리사가 아닌 후베날 우르비노를 선택하게 된다. 결혼을 하고서 조용히 별 스러울 것도 없고, 크게 커뮤니케이션할 일도 없는, '둘로 나뉜 하나'처럼 늙어간다. 결혼 생활의 이상적인 귀결, 결혼이 가져다 주는 사랑의 이상적인 변질이 아닐까. 노년이 되고, 과부가 되면서 다시 시작된 플로렌티노 아리사와의 사랑은 그녀의 사랑이 또 한번 '나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는 것'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플로렌티노 아리사의 사랑 또한 계속해서 변질된다. 그가 나눈 수많은 여인들과의 사랑은 차치하고서라도, 페르미나 다사에 대한 사랑 또한 계속해서 변한다. 청년시절의 '갈구'는, 중년이 되면서 '동경'이 되었고, '노년'이 되면서는 '늙어감, 인생을 오래 산 사람으로써의 공감'으로 차차 그 얼굴을 바꾼다. 오십 몇년 만이지만 플로렌티노 아리사가 페르미나 다사와 다시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은 '그가 사랑을 간직'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랑이 변했기' 때문일 것이다.
후베날 우르비노가 보여준 사랑은 '변하는지 안 변하는 지도 모르게 상대와 함께 변해가는' 그런 사랑이었던 것 같다. 아내의 불행하다는 말에 있는 가산을 모두 팔아버리고 떠나버릴 수 있는 결단력과, 일상을 그대로 영위할 수 있는 안정감과 단단함. 일생에 있던 단 한번의 부정에 대해서는 아내의 말 한마디에 용서를 구하고 일절 끊어버릴 수 있는 결단력. 떠난 아내를 기다릴 수 있는 인내심. 순간 순간 사랑의 형태를 바꾸는 것이 그가 오랫동안 아내를 사랑할 수 있었던 비결이 아닐까.

마르케스의 의도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얻은 재미와 이 책의 교훈은 그랬다. '변해야 사랑이다' 변하지 않는 사랑은 곧 끝나 버릴 것이고, 유통기한이 지나면 폐기 될 것이나, 변하는 사랑은 계속될 것이고, 영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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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신화
손홍규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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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카프카, 조세희, 마르께스, 천운영, 김기덕, 로트렉...

나는 독서량이 일천한 주제에, 어떤 텍스트를 읽을 때, 다른 텍스트와 계속해서 연결지어 생각하려는 버릇이 있는 것 같다. (겨우 책 서너권을 읽고, 각 텍스트들을 비교 분석하여 조잡한 레포트를 줄줄이 써내야 했던 '문학'이라는 내 대학시절의 전공 때문에 붙은 버릇일지도 모른다.) 손홍규의 소설집을 한작품 한작품 읽으며 나는 어려운 현실 속에서 침잠하고자, 혹은 축소되다가 결국은 소멸되고 싶어하는 주인공들을 보면서 카프카의 "변신"을 생각했다가, 현대 사회가 가족사에 가져온 커다란 비극을 보면서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생각했다가, 마르께스의 "백년동안의 고독"도 생각했다가, 사회 하부계급(좋은 표현은 아닌 듯 하다)에 천착하며 그들의 욕망과 정신세계에 대한 세밀한 묘사를 볼 때에는 천운영도 생각했다. 천운영은 도시 하부계급을 손홍규는 농촌 하부계급을 그리고 있다는 것, 천운영의 주인공은 파괴하고 손홍규 소설의 주인공은 축소, 소멸하려 한다는 것이 다른 점이라면 다른 점이랄까. 좀 더 엉뚱하게는 자신의 영화보다 현실이 훨씬 추악하다고 주장하는 김기덕의 영화도, 추레한 현실 속에서 생활적이면서도 퇴폐적인 아름다움을 스윽 스윽 스케치 해낸 로트렉의 그림들도 생각이 났다.  그렇다고 해서 손홍규의 소설이 내가 나열한 것들의 잡다한 복합품이라던가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근래 발표되는 한국 단편 소설에서 보기 드물만큼의 독창성과 완성도 지닌 본 이야기의 뜨거운 용광로안에, 위에 열거한 작품들의 매력들을 매력 또한 녹여 품고 있다는 느낌이다.

 

마술적 리얼리즘??

그 중에 마르께스만 가지고 이야기를 조금만 해 볼까?

나는 매우 단순무식한 사람으로, 내가 마르께스를 떠올린 이유는 단순하다.

누군가 마르께스를 가리켜 '마술적 리얼리즘'이라고 했던가? 손홍규의 소설에서는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고, 뱀과 이야기 하며, 나이를 꺼꾸로 먹는 등의 마술적인 사건들이 일어난다. 그러면서도 그 안에서는 12·12가 일어나고, 5·18이 일어난다. 본인도 "마술과 기적보다, 마술 같고 기적 같은 현실! 앞에서 마술과 기적을 조금 흉내냈을 뿐이라는 게 이 소설들의 마지막 주석이다. " 라는 말로 자신의 소설을 설명하고 있다.

마르께스의 소설이 그러하듯 손홍규의 소설에서도 마술적인 현상안에서 그 와중에 다뤄지는 현실이란 '마술적인 사건들' 보다도 훨씬 더 믿기 힘들고, 어렵고, 공포스러운 것들이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서사의 초점은 한 사람이나, 가족 등 개인적인 이야기에 맞춰져 있으면서도 정치나 역사적 질곡들이 그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음을, 그들이 어떻게 영향받고, 상처받고, 때로는 파괴되는 지를 엮어 보여준다.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도 부엔디아 집안은 세상과 동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그들의 집안도 전쟁과 바나나 리퍼블릭에 의해 영향받는다.)

 

소설의 묘사를 통해 보여주는 현실은 그야말로 '리얼'해서, 얼추 비슷한 시대를 살아왔지만, 내가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그 공간을 정말 내가 알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착각을 줄 정도이다. 그러면서 '현실'을 그리는 소설이 빠지기 쉬운 '촌스러움' '선전성'에 빠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소설에 있는 마술적 장치들이 그저 '현실'을 멋부려 표현하기 위한 장식이나 눈속임인 것은 절대 아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 우리 모두의 이야기

조셉 캠벨이 우리에게 전래된 각종 신화의 이야기들이 어떻게 인류의 원형적인 이야기들은 결국 삶의 원리와 인간의 정신구조를 표현하는 것이라는 요지의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손홍규가 도입한 마술적 장치들은, 신화(보다는 설화)와 엮이면서 우리의 '무의식'을 건드리고, 개인을 이야기하면서도 우리 모두를 이야기한다. "사람의 신화"에서 차용된 [환웅 설화], "아이는 가끔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난다"에서 차용된 [아기장수 설화], 등은 설화를 소설의 서사를 위한 단순한 도구로써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신화와 설화 속에 축적되고 있는 우리네의 과거와 현재를 읽어내고 재창조하여 다시금 우리에게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조금 쪽 팔린 개인적인 감상을 이야기 해 볼까? 나는 모교 도서관 일반열람실 구석에서 "아이는 가끔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난다"를 읽으면서, 작가의 놀라운 과거 시공간의 복원과 놀라운 유머감각에 혼자 키득 키득 웃음을 참지 못하다가, 소설 말미에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어버렸다. 모든 부모에게 있어 (특히나 부모세대와 자식세대간의 간극이 엄청나게 벌어져버린 우리의 근대 이후부터는) 그들의 자식들은 그토록 소중하게 얻은 자식이면서도 자신들과 전혀 다른 종족이었고 - 설화에서는 빠른 성장속도와 겨드랑이의 날개로 상징되는-, 그런 아이의 남다른 면(날개)을 사회 안에서의 생존을 위해 그들의 손으로 제거해야 했으며, 결국 아이는 부모를 떠나 전쟁터(같은 사회)로 향해야 했다.

모든 부모는 대나무에 싹이 트기를 기다리는 아기장수의 부모이며, 모든 자식들은 전쟁터로 떠나 싸워야 하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이제는 돌아가기 어려운 아기장수인 것이다.

한국인의 '무의식'을 건드리고 우리 모두의 현실을 복원하는 그의 소설에 가슴이 먹먹해질 만큼의 감명을 받았다.

 

p.s. 작가의 다음 소설이, 기대된다. 개인적으로 (우리 문학이 아직 가지지 못한) 80-90년대를 그리는 대하드라마를 쓸 수 있는 소설가라 생각된다. (혹은 내 취향에 맞추어 마음대로 기대를 마구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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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바람 2006-02-05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보았습니다. 한동안 소설을 읽지 않아 시큰둥하다가 이 책을 읽고 싶어서 검색하니 님의 서재글이 제 마음을 잡아끄네요. 잘 보겠습니다.
 
나목 박완서 소설전집 10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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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박완서 같은 작가가 있다는 것은, 한국여자로써 참 큰 행운이다. 아무리 문단에 여류가 많다지만, 그래도 박완서가 없다면 한국 소설들이 얼마나 팍팍하고 건조하고 일상과 떨어져있을까.섣달그믐에서 설로 넘어가는 그날 밤, 나는 침대위에 벌렁 엎드려 박완서의 처녀작-裸木을 읽었다. 몇몇 박완서의 작품들을 읽어왔지만, 아직 처녀작은 읽지 못한터였다. 40대의 젊은 박완서가 쓴 그 신선한 작품.

박완서의 다른 작품들이 그렇듯이 이 작품 역시 지독히 일상적이면서, 지독히도 사람을 힘들게 하는 그 '가정사', '가족사'를 박완서는 지나친 자책이나, 지나친 자학없이, 그러면서도 말도 안되는 동화로 포장하지 않으면서 담담하지 않은 일들을 꽤나 담담하게 풀어간다.

하지만, 이 裸木에서는 박완서의 다른 작품들과 다른 또 하나의 매력으로 인해, 나는 걷잡을 수 없는 쾌감에 빠져들었다. 소설은 지독히도 색채없는 회색의 전쟁도시 분위기를 나타내면서도, 그 안에 있는 스무살언저리 여자아이가 가진 감성과 자그마한 욕망들을 놓치지 않는다. 그게 어찌나 세밀하고, 정확한 묘사인지, 나는 한숨마저 나왔다.
황태수의 사다리를 잡아주며 그의 턱을 올려다보다가 문득 그 파리한 턱에 이마를 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든가, 황태수와의 첫키스에 대한 묘사라든가, 옥희도씨와의 포옹 때에 느닷없이 시를 읊어버린 일이라든가. 어찌나 나의 스무살 시절을 생각나게 하던지....
나 조차 5-6년 지났다고 까맣게 잊어버린 그 감성들이 소설을 읽는 동안 바닥에서 하나씩 하나씩 떠올랐다.

지독한 사건들-가족이 2년새에 모두 죽어버리는- 뒤에 성장하는 지독히 잔인한 성장. 섣달그믐에서 설날로 넘어가는 그날밤에 소설을 읽고 혼자 엉엉 울면서, 나는 너무 큰 황홀경에 붙들렸다. p.s. 이렇게 짧은 쪽글 쓰면서 '지독히'라는 말은 한 10번 쓴것 같다. 크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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