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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목 ㅣ 박완서 소설전집 10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02년 7월
평점 :
품절
박완서 같은 작가가 있다는 것은, 한국여자로써 참 큰 행운이다. 아무리 문단에 여류가 많다지만, 그래도 박완서가 없다면 한국 소설들이 얼마나 팍팍하고 건조하고 일상과 떨어져있을까.섣달그믐에서 설로 넘어가는 그날 밤, 나는 침대위에 벌렁 엎드려 박완서의 처녀작-裸木을 읽었다. 몇몇 박완서의 작품들을 읽어왔지만, 아직 처녀작은 읽지 못한터였다. 40대의 젊은 박완서가 쓴 그 신선한 작품.
박완서의 다른 작품들이 그렇듯이 이 작품 역시 지독히 일상적이면서, 지독히도 사람을 힘들게 하는 그 '가정사', '가족사'를 박완서는 지나친 자책이나, 지나친 자학없이, 그러면서도 말도 안되는 동화로 포장하지 않으면서 담담하지 않은 일들을 꽤나 담담하게 풀어간다.
하지만, 이 裸木에서는 박완서의 다른 작품들과 다른 또 하나의 매력으로 인해, 나는 걷잡을 수 없는 쾌감에 빠져들었다. 소설은 지독히도 색채없는 회색의 전쟁도시 분위기를 나타내면서도, 그 안에 있는 스무살언저리 여자아이가 가진 감성과 자그마한 욕망들을 놓치지 않는다. 그게 어찌나 세밀하고, 정확한 묘사인지, 나는 한숨마저 나왔다.
황태수의 사다리를 잡아주며 그의 턱을 올려다보다가 문득 그 파리한 턱에 이마를 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든가, 황태수와의 첫키스에 대한 묘사라든가, 옥희도씨와의 포옹 때에 느닷없이 시를 읊어버린 일이라든가. 어찌나 나의 스무살 시절을 생각나게 하던지....
나 조차 5-6년 지났다고 까맣게 잊어버린 그 감성들이 소설을 읽는 동안 바닥에서 하나씩 하나씩 떠올랐다.
지독한 사건들-가족이 2년새에 모두 죽어버리는- 뒤에 성장하는 지독히 잔인한 성장. 섣달그믐에서 설날로 넘어가는 그날밤에 소설을 읽고 혼자 엉엉 울면서, 나는 너무 큰 황홀경에 붙들렸다. p.s. 이렇게 짧은 쪽글 쓰면서 '지독히'라는 말은 한 10번 쓴것 같다. 크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