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이상과 백석이 이야기 하는 80여 년 전 여름의 낭만과 추억, 맛 이야기 


80여 년 전, 1935년 여름. 한 시인은 거듭된 실패와 세상의 몰이해에 좌절한다. 그리고 어느 날 자취를 감춘다. 자신을 몰라주는 세상과 사람들로부터의 도피였다. 몸도 마음도 이미 지친 터였다. 기차를 타고 북쪽으로 향하던 그는 태어나서 처음 보는 낯선 곳의 여름 풍경에 주목하고, 그곳에 한 달 동안 머물며 지친 심신을 위로하고 새로운 각오를 다진다.  


이상. 1935년 여름, 그는 설계부터 인테리어까지 직접 선보이며 의욕적으로 시작한 다방 <제비>의 참담한 실패를 맛본다. 급기야 연인 금홍도 그의 곁을 떠났고, 그때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그의 낯선 작품에 관한 사람들의 시선은 냉대함 그 자체였다. 결국, 실의에 빠진 그는 한동안 자취를 감춘다.  


오랜 방황 끝에 그가 도착한 곳은 성천이라는 낯선 고장이었다. 도시에서 태어나 성장한 모더니스트였던 그의 눈에 비친 시골 풍경은 생경함 그 자체였을 것이다. 실의에서 벗어난 그는 곧 자신의 산문 중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꼽히는 두 작품을 이곳을 무대로 쓴다. <산촌여정>과 <권태>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같은 공간, 같은 시간의 경험임에도 두 작품이 보여주는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산촌여정>이 시종일관 경쾌한 어조로 여름날 자연의 풍광을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는 반면, <권태>는 무미건조한 일상이 불러오는 허무와 우울, 권태 그 자체로 성천의 풍경과 여름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어떤 이는 <산촌여정>이 세상을 내다보며 쓴 글이라면, <권태>는 작가 이상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쓴 글이기 때문에 그 분위기가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그 이유야 어찌 되었건 이상이라는 걸출한 작가로 인해 우리는 80여 전 여름의 추억과 낭만, 그리고 그것을 대하는 작가의 서정을 지금도 느낄 수 있다. 



잔잔한 흑백영화처럼 펼쳐지는 80여 년 전 여름의 낡은 풍경과 아름다운 서정


[녀름입니다, 녀름]은 80년 전, 우리 문학을 화려하게 수놓은 작가들의 여름 이야기를 담고 있다. 총 3장으로 구성된 책 속에는 이상, 백석, 이태준, 채만식, 이효석, 현진건 등 우리 문학을 대표하는 열여섯 명의 내로라하는 작가들의 여름 이야기와 잊을 수 없는 추억, 여름 별미에 얽힌 이야기가 달큼하고 진한 참외 향기처럼 오롯이 펼쳐지고 있다.  


첫여름을 맞는 기쁨과 즐거움부터 더위를 피해 잠시 연인과 바다를 찾았던 이야기, 입맛 없는 여름 자신을 사로잡은 별미에 얽힌 추억까지, 1930~40년대 여름의 낭만과 추억, 서정이 우리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으며, 80여 년 전 여름으로 우리를 이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작가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여름 별미에 관한 이야기로, 소파 방정환은 서울 시내 유명 빙숫집 상호 및 위치, 맛의 비밀까지 숨김없이 공개하고 있다. 


경성(京城) 안에서 조선 사람의 빙숫집치고 제일 잘 갈아주는 집은 내가 아는 범위에서는 종로 광충교 옆에 있는 환대상점이라는 조그만 빙수 점이다. … (중략) … 삼청동 올라가는 소격동 길에 있는 야트막한 초가집은 딸깃물도 아끼지 않지만, 건포도 네다섯 개를 얹어주는 것도 싫지만은 않다.   

─ 방정환, <빙수> 


평양냉면을 두고 벌이는 김남천과 이효석의 이야기는 또 어떤가. 이가 나기도 전부터 냉면을 먹었다는 평안도 출신 김남천과 멀건 육수의 평양냉면의 진미를 도저히 알 수 없어 냉면 먹기를 끊어버렸다는 강원도 출신의 이효석. 두 사람의 이야기 다툼은 글을 읽는 이들의 입가를 흐뭇하게 하다못해 입맛을 다시게 하기에 충분하다.  


불현듯 냉면 생각이 나서 관철동이나 모교 다리 옆을 찾아갈 때가 드물지 않다. 모든 자유를 잃고, 음식 선택의 자유까지 잃었을 경우, 항상 애끊는 향수같이 엄습하여 마음을 괴롭히는 식욕의 대상은 우선 냉면이다. 

─ 김남천, <냉면> 중에서 


평양에 온 후로는 까딱 냉면을 끊어버린 까닭에 평양냉면의 진미를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육수 그릇을 대하면 그 멀겋고 멋없는 꼴에 처음에는 구역질이 납니다.

─ 이효석, <유경 식보> 중에서 


같은 시기, 같은 장소에서 쓰인 <산촌여정>과 <권태>를 비교해서 읽는 재미 못지않게 ‘수박’이란 과일을 두고 최서해와 계용묵이 쓴 <수박> 역시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렇듯 진한 향수와 페이소스, 그리움이 담긴 그들의 글을 읽노라면 때로는 연민에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하지만, 또 때로는 이야기를 풀어가는 넘치는 재치와 발랄함에 미소가 저절로 지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진한 여운이 남지 않는 것이 없어,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적지 않은 감동에 빠지게 된다.   


시대적 상황과 글쓴이만의 글의 특징을 살리기 위해 가능한 한 원문을 그대로 실었지만, 내용 이해가 어려운 경우에 한해 괄호 속에 현대어를 함께 풀어써서 가독성을 높인 것 역시 이 책의 특징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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