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순이 언니 - MBC 느낌표 선정도서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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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공지영의 소설에는 386세대의 향수가 자주 배어나온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작가 자신이 그 세대이고 또 그 시대엔 모든 것이 너무나 급작스럽고 혼란스러웠던 시기였기 때문에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많은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 대다수의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자유로이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였다. 화려한 경제 성장에도 불구하고 암울한 시기이기도 했다.

소설 속 나의 가족은 그 변화의 한 가운데에 있다. 달동네에서 주택으로 경제 성장의 상징인 아파트로 이사가면서 시대의 부흥을 직접 경험하며 중산층으로 진입한다. 그 가족의 일부이기도 또는 아니기도 한 식모살이하는 봉순이 언니는 중산층인 그들에겐 이젠 그만 잊고 싶은 과거와도 같은 존재이다. 어린시절 창경원에서 버려지고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하며 첫사랑에게 속고 다음 남자, 또 그 다음 남자와도 행복하지 못한 삶을 지탱해야만 했던 봉순이 언니.

토스트와 우유로 아침을 대신하며 세련된 서구화된 식생활을 하는 식구들과는 달리 구석진 부엌에서 미련스레 누른밥으로 아침을 때우는 봉순이 언니는 서구문명에 쉽싸리 휩쓸리지 않는 민중들을 상징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 대단한 상징과는 전혀 상관없이 미련스럽고 우왁스러운 봉순이 언니의 삶은 그 자체만으로도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의 실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과거보다 더 많은 땀을 흘리고 치열하게 살았던 많은 사람들이 소수의 선택받은 자들이 중산층이 되고 국가적 수준의 삶이 향상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우했다. 그 한가운데에 봉순이 언니의 인생이 있다.

소설 속 나는 엄마와 같은 정을 느끼던 봉순이 언니로부터 차츰 멀어지면서 이내 기억을 지워버린다. 그러다 결국 정신이 이상한 여인에게서 봉순이 언니를 느끼지만 끝내 눈길을 주지 않는다. 아니 눈길을 줄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 최악의 상황에서도 봉순이 언니의 눈빛은 희망을 말하고 있었으니깐…

징그럽게도 희망이었다. 더 이상 나아질게 없는 것 같은데, 더 이상 발버둥쳐도 남들처럼 버젓하게 잘 살아질것 같지 않은데도 정말 미련스럽게 희망을 놓지 않은 그녀의 눈빛…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녀에 비하면 훨씬 나은 상황에 있으면서도 ‘희망’이란 단어에 막역한 거리감을 느끼는 나는, 정말이지 그녀를 이해할 수 없다. 삶에 대한 소름끼치도록 진저리나는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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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게 본 중국의 주택 - 중국의 주거문화 -하
손세관 지음 / 열화당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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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우연히 이 책을 접하게 됐다. 건축학도도 아니고 건축관련된 일도 하지 않지만 어렴풋이 건축에 관심이 있었고 또 워낙히 잡독을 하는 편이라서 이 책을 선택하면서 주저함은 없었다. 단지 전문가들을 위한 책이며 어쩌나 하는 걱정은 약간 됐지만 많은 삽화와 도판으로 일반인들도 충분히 흥미와 관심을 가질만했다. 중국여행을 가본 적도 없고 해서 내가 아는 중국 주택이란 그저 영화에서 본 단편적인 영상뿐이였다. 이 책에서 소개한 4종류의 주택들을 보고 눈이 휘둥그래진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첫번째 중국 주택의 사례로서 사합원이라 불리는 죽국을 대표하는 도시형 주거형식이다. 즉, 가운데 마당이 있고 건물이 그 주위를 둘러싸는 형식을 취하는 주택이다. 중정을 중심으로 생화공간이 배열되는 것은 동양의 주거형식이라고 할 만큼 동양문화권에서는 보편적인 것이지만, 사합원의 경우와 같이 좌우대칭의 완전한 口자형을 이루는 주거형식은 그 사례를 찾기 어렵다.

두번째 사례는 휘주의 주택이다. 휘주는 중국에서도 자연경관이 빼어난 곳이다. 휘주주택의 특이성과 독자성은 우선 천정(天井)이라 불리는 두 층 또는 세 층 규모의 건물로 둘러싸인 일정의 광정(光井)이다. 휘주 주택이 독특한 공간 구성을 취하는 배경에는 이 지역이 지니는 기후조건의 영향을 배제할 수 없다. 휘주는 전반적으로 공기가 습윤하고, 연간 기온 차이가 상당히 심하다. 따라서 겨울에는 추운 바람이 들어오는 것을 막고 내부의 열이 밖으로 발산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높은 담을 사방으로 둘러쳤다. 또한 휘주는 산지가 많고 평지가 협소한 반면 인구가 많아 두 층 이상의 주거형식이 일반화했을 것이다.

세번째 사레는 황토 고원의 요동이다. 요동은 중국 고유의 동굴 주거를 뜻한다. 황토고원은 겨울이 매우 길고 기온의 일교차가 큰 것이 특징이다.

마지막으로 복건성의 토루이다. 토루는 외부는 두터운 흙벽으로 구축되고 내부는 목구조로 짜맞추어지는 혼합구조를 갖는 세 층 내지 다섯 층 규모의 집합주택이다. 한족의 하나인 객가인에 의해 건축된 토루는 동그란 형태와 사각형의 두 종류의 형태가 있다.
객가족은 독립심과 강한 단결력을 지니고 토착민과는 쉽사리 융화하지 않는 결속력을 갖는 민족으로 유명하다. 이런 객가인의 특성이 반영된 토루는 방어의 목적으로 창과 문이 극히 제한된 두터운 흙벽은 마치 성채와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

중국과 우리나라 주거환경에서 여러가지 공통점이 있다고 한다. 우선 주택의 한 가운데에 마당을 두고 건물이 그 주변을 둘러싸는 공간구성을 하는 중정형(中庭型)주거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또한 주택의 구축을 위해서 나무를 사용한다. 물론 중국은 목구조와 벽구조를 혼합하는 방식이 일반화한 반면 우리는 주로 목조를 사용한다는 차이가 있다. 또한 주택 내에서 공간의 우계적 사용이라는 측면에서 유사하다. 즉, 주택 내부에 있어서 남녀와 상하의 구분이 비교적 엄격하게 적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가부장제를 바탕으로 하는 유교적인 공간질서가 주거공간의 구성에 크게 작용했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하지만 이러한 유사점 이외에도 양국사이의 차이점 또한 명확하다. 중국의 주거환경은 완전하게 폐쇄된 공간구성과 좌우대칭의 축적 구성을 기본으로 하는데 우리의 주거환경은 좀더 개방적이고 자유롭다 할 수 있다.

이렇게 두 나라의 주택에서 보이는 공간구성의 차이를 학자들은 지형적인 이유로 설명하고 있다. 즉 중국의 주요 인구 밀집지역이 평야지대에 있어 환경적으로 개방되어 있기 때문에 주택을 폐쇄적으로 구축한 반면 우리는 산야가 이미 영역감을 주므로 집을 휠씬 느슨하게 배치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단지 이런 이유때문만이 아니라 그곳의 문화적, 사회적 특성을 바타아으로 하고 부수적으로는 기후, 지형, 재료, 구축방식등의 차이에서 기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지형적 특성, 기후조건 등 여러 요인과 상호작용하여 양국 주거형식의 차이를 만들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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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비쿠스 1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원작, 파스칼 라바테 그림, 이재형 옮김 / 현실문화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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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세기 초 혼돈과 혁명의 러시아를 배경으로 지극히 평범한 회계원인 시메온의 인생사가 펼쳐진다. 1910년대의 러시아의 사회상이 지금의 우리들에겐 낯설지만 그건 중요치 않은 것 같다. 시메온이라는 인간상은 그가 살았던 시대가 19세기이든 훨씬 앞선 어느 옛날이든가에 관계없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원초적인 내면의 모습인 듯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서평이나 옮긴이의 짧은 글을 읽다보면 시메온을 ‘말하는 해골’ 즉 이비쿠스와 같은 악의적이고 타락한 인간으로 동일시한다. 그렇지만 나는 시메온의 모습 곳곳에서 나 자신의 숨기고 싶은 치부를 보는 듯 했다. 시메온은 그가 속한 세계에서 뭐하나 내세울 것 없는 그야말로 보잘것없는 평범한 직장인이다. 그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그 또한 막연한 일확천금을 꿈꾸기도 하지만 그걸 이룰 특별한 길이 있으리란 생각이나 노력같은 건 애당초 하지 않는다.

단지 믿는 건 어느날 손금을 봐준 짚시 여인의 부자가 될 거라는 말뿐이다. 그건 그에 대한 어떤 확신이나 믿음이 아니라 오히려 잡히지 않을 신기루에 대한 부질없는 기대에 가깝다. 그럼에도 놓아버릴 수 없는 쓸데없는 기대는 그 자체만으로도 자칫 희망없는 삶의 유일한 희망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실망과 기대를 동시에 느끼며 여전히 복권판매대에 긴 줄을 선다.

우리와 시메온이 다른 것은 단지 시메온에게 기회가 우연히 왔다는 것 뿐이다. 물론 그 기회 앞에서도 선택의 갈림길이 있었지만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양심을 택하겠는가? 그리고 우연챦은 기회 앞에서 양심을 저버렸다고 해서 과연 그에게 우리는 떳떳하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시메온은 그 갈림길들에서 많은 부분 양심을 저버리는 선택을 한다. 그럼에도 그런 그에게 난 동정심을 느낀다. 그의 뒷모습은 여느 소시민의 그것들과 아직도 너무도 흡사하다.

세상에 대해 떳떳할 수 없이 주눅들고, 혼돈과 공포앞에서 맞서기보다는 제 몸 하나 숨을 자리를 비굴하게 둘러보는 나약한 그의 너무나도 작고 초라한 뒷모습에서 …. 나는 어쩔 수 없이 나를 느끼게 된다. 내게도 그와 같은 기회와 갈림길이 찾아온다면 나 역시 또 하나의 이비쿠스가 되지 않으리란 법도 없을 것 같다. 우리 안의 이비쿠스는 단지 제 모습을 드러낼 기회를 만나지 못해서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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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굽는 타자기 - 젊은 날 닥치는 대로 글쓰기
폴 오스터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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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폴 오스터를 좋아한다. 그의 작품들에선 삶에서 흔히 보는 우연들이 범상치 않은 인생의 사건으로 치닫기도 하고 깃털처럼 가벼운 농담같은 삶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가도 우연과 필연이 뒤섞인 심오한 인생철학을 늘어놓기도 한다. 그의 가벼우면서도 심각하고 진중한 이야기들을 좋아한다. 그리고 그처럼.. 아니 그보다는 못하겠지만 그냥 나만의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큰 호홉을 하고 흰 백지앞의 떨리는 마음으로 앉기도 하지만 늘 그렇듯이 생각은 그저 생각으로 끝나버린다. 작가가 되는 것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되는 것이라고 폴 오스터는 말한다. 글쓰는 것 말고는 어떤 일도 자기한테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평생동안 멀고도 험한 길을 걸어갈 각오를 해야만 작가가 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역설적이게도 작가가 된다는 것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젊은 날 닥치는 대로 글쓰기라는 부제대로 이 책은 폴 오스터의 젊은 날의 이야기이다. 그는 대개 보수가 더 많은 일거리들을 마다하고 수입은 작지만 시간이 많은 직업들을 선택했다. 오직 글을 쓸 수 있는 최소한의 경제적인 벌이와 최대한의 시간이 안락한 사회적 안정보다 더 중요했던 것이다. 이미 유명해져 버린 극소수의 작가들을 제외하곤, 아니 그들도 유명해지기 전까지는 그랬겠지만 대부분의 글쓰는 이들은 이중, 삼중의 직업을 가진다. 자신이 쓰고 싶은 글을 쓰는 것 만으로는 살아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폴오스터의 말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고 싶다면 글을 써야 할 것이다. 그래서, 대다수의 어정쩡한 작가 지망생들은 작가가 되기를 선택하지 않는다. 경제적 안정과 풍요를 위해서 피말리는 글쓰기 대신에 가볍게 즐기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이미 가시밭길을 택한 소수의 사람들의 작품들을 안락한 소파에 앉아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느긋하게 즐기는 것이다. 그러한 편안함은 잠시나마 가슴 한켠에 뭉글뭉글 솟아오르는 글쓰기의 욕구를 누룰만큼은 충분하다. 그리고 그 후에도 늘 편안할 수 있다면 그들은 그 생활을 지속할 자격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아쉬움이 뒤통수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면…. 이제라도 시도해봐도 늦지는 않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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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마 클럽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지음, 정창 옮김 / 시공사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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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장마가 지난 줄 알았는데 며칠째 심상치 않은 비가 내린다. 이렇게 추적거리며 비가 오는 날이면 좋아하는 음악에 빗소리를 곁들여 책을 읽는 것이 가장 좋다. 적어도 내게는 비오는 날이면 가장 하고 싶은 일이 그런 것이다. 야근과 철야를 번갈아가며 일을 겨우 끝내고 집어든 책이 레베르테의 뒤마클럽이다. 몸과 마음의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책읽기에는 역시 추리소설이 제격이다.

레베르테를 처음 알게 된 것은 <플랑드르 거장의 그림>에서였다. 추리소설도 이렇게 지적이고 고급스러울 수가 있구나 하는 감탄을 마지 않았던 책이였다. <뒤마클럽>은 로만 폴라스키 감독의 조니 뎁 주연의 영화 ‘나인스 게이트’로 만들어졌고 책보다 먼저 영화를 본 탓에 책 읽기를 주저 했었다. 더군다나 추리소설에서 그 줄거리를 미리 알아버렸다는 것은 얼마나 맥빠지는 일인가는 다들 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순전히 레베르테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그리고 레베르테는 역시 그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뒤마클럽은 뒤마의 육필본인 ‘앙주의 포도주’와 악마를 부르는 교본인 ‘아홉개의 문’이라는 두 권의 책을 중심으로 사건이 펼쳐진다. 이 두 권의 책은 의뢰인에 의해 고서와 희귀본을 사고 파는 중개자의 역할을 하는 책사냥꾼 루카스 코르소에게 가게 되고 코르소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사건의 중심에 서게 된다. 우리에겐 그저 ‘삼총사’의 저자 정도로 알려진 뒤마를 추종하는 뒤마클럽이 책 내용 중에 나오듯이 레베르테는 뒤마를 철저히 분석한다. 삼총사의 텍스트를 이 잡듯이 파헤치고 털어낸 그의 끈기와 치밀함에 그저 놀랄 뿐이다. 거기에 중세시대 악마의 왕국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한다는 마법서인 ‘아홉개의 문’에서는 신비함과 마술적인 환상이 뒤마의 치밀한 분석과 묘한 조화를 이룬다.

추리소설 하면 그저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그 사건을 해결하기까지의 여러 에피소드들이 나열된 책일뿐 그 이상의 문학적 문체나 지적 내용은 없다고 내리깍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레베르테의 추리소설은 그런 단순한 사고방식의 사람들의 뒤통수를 내리친다. 그의 책에서는 기본적인 추리소설의 법칙들과 재미외에도 충분하고도 넘칠만큼의 지적 허영이 있다. <플랑드르 거장의 그림>에서는 플랑드르 학파의 그림들과 체스게임에 대해서 그랬었고 이 책에서는 뒤마와 그의 저서들에 대해 거의 전문적인 논문이라 해도 뒤떨어지지 않을 만큼의 지식들이 가득차 있다.

내가 레베르테의 책에 열광하는 것은 따분할 수도 있는 전문적 지식들을 일반 문학 서적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잘 풀어놓았다는 것이고 거기다 더해서 치밀함과 긴장감을 끝까지 유지하는 추리소설로서의 미덕도 잃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늦은 여름 휴가를 갈 내 손엔 이미 또 한 권의 레베르테의 신작이 쥐어져 있다. 레베르테의 다른 작품들도 빨리 번역됐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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