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에어 납치사건
재스퍼 포드 지음, 송경아 옮김 / 북하우스 / 2003년 7월
평점 :
절판


책 속의 인물들은 더 이상 종이 위의 잉크의 자취가 아니다. 그들은 이 세계에서의 우리와 마찬가지로 책이라는 세상에서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이다. 우리가 책을 읽지 않을 때는 그들은 나름대로의 삶을 살아간다. 마치 영화판의 엑스트라처럼 우리의 눈길이 가지 않을 때 그들은 빈둥거리거나 잡담을 하는 등 우리가 전혀 상상 할 수 없는 딴짓(?)을 한다.

책벌레들이 동경할 만한 직업인 특수작전망의 문학조사반.. 고전의 초판들을 훔치거나 위조해서 파는 불법상인들, 저작권 침해자들 사기꾼들을 다루는 직업이다. 그 시대는 문학을 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고, 그럴 수 밖에 없는 분위기의 세계이다. 정말로 책벌레들이 좋아할 만한 세상 아닌가? 부러울 따름이다.

벌레들의 움직임을 이용해서 책의 텍스트로 들어갈 수 있는 이상한 기계와 시간속을 마음대로 여행하며 범죄를 소탕하는 시간경비대.. 복잡하고 뒤죽박죽일 것 같은 상상의 세계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제인에어를 텍스트에서 납치하자 제인에어의 책에서 순식간에 제인에어는 사라지고 텍스트 사이로 들어간 주인공은 로체스터와 협동작전으로 뒤틀린 줄거리를 바로잡으려 한다.

이 얼마나 유쾌하고 기발한 상상인가? 단지 이런 발상 하나만으로도 이 책은 재미와 흥미가 만점일 수 밖에 없다. 감수성이 좀 더 예민했던 시절에는 책을 읽으면 정말로 책안에 내가 있는 듯 한 적이 많았다. 책 속의 인물들이 현실세계에서도 내 옆에 있는 듯 분명히 인식되었고, 내가 걷고 있는 거리와 풍경들이 책 속의 거리와 풍경이 되어서 현실과 책안의 세상사이의 경계가 흐릿해진 적도 종종 있었다.

솔직히 그럴때면 난 참 많이 혼란스러워했다. 너무 깊이 빠져버린 낭패감. 책 속에 깊이 빠지면 빠질수록 현실에서의 적응은 힘이 들었으니깐. 애써 빠지지 않으려 노력했고, 책속의 이야기는 그저 허구일 뿐이라며 한 때는 아예 책읽기를 멀리한 적도 있었다.
서른이 훌쩍 넘어버린 지금, 이제는 책을 읽으면 그저 책이려니 할 뿐이다. 물론 책읽기의 재미와 흥미가 없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독서 삼매경에 빠진다 하더라도 책 장을 덮는 순간 나는 바로 현실로 돌아온다. 몇 초간의 짧은 여운뒤에..
더 이상 책 속 세상과 이 세계의 경계에서 위태롭게 서 있지 않아도 되는 나는 다시 혼란스러웠던 그 때가 그립다. 그래서 이 책이 더 큰 충격으로 신선하게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잃어버렸던 사춘기의 흥분을 다시 느끼게 해 준 고마운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해변의 카프카 (상)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춘미 옮김 / 문학사상사 / 200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상실의 시대 이후 또 하나의 하루키 문학의 걸작이라고 선전되어지는 ‘해변의 카프카’
‘카프카’라는 단어에 까마기라는 의미가 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됐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서 계속 언급되는 해변의 카프카라는 그림 대신 난 고흐의 밀밭의 까마귀(제목이 맞는지 모르겠다..)가 자꾸 연상됐다.
그 신비하고 침울한 그림의 이미지가 책의 분위기를 한마디로 말해주는 것 같다.

여러명의 등장인물이 나오지만 주인공인 카프카 못지 않게 아니 어쩔 땐 그 보다 더 강한 개성으로 독자를 매혹시킨다. 각각의 인물들에겐 독특한 그만의 사연이 있고 하루키는 자상하게 그들의 속내를 독자에게 보여준다. 그들의 인연은 과거로부터 짜여지기 시작한 거미줄처럼 알게 모르게 서로 얽혀있어 필연적으로 현재 만날 수 밖에 없다. 세계는 개인의 삶으로 나누어진 것이 아니라 원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서로에게 영향을 받는다고 작가는 말하는 듯 하다. 그것이 이 세계이든 저 세계이든 말이다.

이야기는 원죄와도 같은 저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소년으로부터 시작된다.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누이와 관계를 갖게 될 거라는 저주를 받은 열다섯 소년은 도망치듯 가출을 한다.

어머니같은 여인과 사랑을 하고 남자도 여자도 아닌 그 또는 그녀와 우정을 나눈다. 세상에 속한 것 같지 않은 외진 도서관에서 유령과 실제의 두 현상으로 존재하는 한 여자를 사랑한다. 까마귀라 불리는 소년은 그의 일부이기도 하고 또는 그와 동등한 한 객체이기도 한다. 이 세상의 경계를 너머 저 세상에 머물기도 하지만 결국 그가 택한 곳은 이 세상이었다. 언제나 세상의 언저리에 머물며 뿌리 내리지 못했던 소년은 다시 눈을 뜬 세상에서 결국 세계의 일부가 된다.

열다섯살이라는 소년의 나이탓이였을까? 항상 경계에서 위태로운 방황으로 혼란스러워하는 그가 내게는 단지 사춘기의 방황정도로만 인식되었다. 하기사 작가가 굳이 열다섯 살을 택한 것은 그 나이가 희망과 절망 사이를 격렬하게 왕래하고, 세계의 현실성과 비현실성 사이를 방황하며, 신체는 도약과 질주 사이를 반복하는 그야말로 과도기인 때문이란 걸 보면 내 감상이 작가의 의도와 얼추 맞아 떨어지는 것 같기도 하지만…..

평범한 가출 청소년의 이미지가 절대 아닌 하루도 운동과 스트레칭을 빼먹지 않는 절도있는 생활패턴을 유지하는 건장하고 미래가 창창한 소년은 왠지 내겐 이미 가질 수 없는 꿈과 같은 존재이다.

오히려 내게는 어린 시절 우연챦은 사고로 그가 가진 모든 기억과 지식을 잃은 채, 그림자마저도 절반을 잃고 자기 안을 훤히 내 보일 만큼 비워두고 살아가는 나카타라는 노인에 더 애착이 갔다.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무시당하지만 고양이와 대화를 할 수 있는 노인은 그 누구도 미워하지 않고 하루 하루 만족해하며 살아간다. 바라지 않고 욕심내지 않아서 오히려 삶에 만족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 자신의 순수함으로 소년 대신 사람을 죽이게 되고, 어딘지도 모를 세상으로의 입구를 열고 닫는 신비한 임무를 묵묵히 행하다 마침내는 평화롭게 혹은 허무하게 죽어가는 나카타.

글을 읽어보고 도서관에서 맘껏 책을 볼 수 있는 게 꿈이라던 나카타는 결국 이 세계에서는 그 꿈을 이루지 못한다.

제대로 사람답게 살아보지도 못하고 죽어버렸다는 동정을 하는 것은 어쩌면 내 자신의 욕심때문일 것이다.

세상 사람들 틈에 정겹게 끼이지도 못했지만 결코 욕심부리지 않고 만족한 삶을 살았던 나카타에게 난 부러움과 한편으론 알 수 없는 연민을 느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봉순이 언니 - MBC 느낌표 선정도서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4년 9월
평점 :
절판


공지영의 소설에는 386세대의 향수가 자주 배어나온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작가 자신이 그 세대이고 또 그 시대엔 모든 것이 너무나 급작스럽고 혼란스러웠던 시기였기 때문에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많은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 대다수의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자유로이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였다. 화려한 경제 성장에도 불구하고 암울한 시기이기도 했다.

소설 속 나의 가족은 그 변화의 한 가운데에 있다. 달동네에서 주택으로 경제 성장의 상징인 아파트로 이사가면서 시대의 부흥을 직접 경험하며 중산층으로 진입한다. 그 가족의 일부이기도 또는 아니기도 한 식모살이하는 봉순이 언니는 중산층인 그들에겐 이젠 그만 잊고 싶은 과거와도 같은 존재이다. 어린시절 창경원에서 버려지고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하며 첫사랑에게 속고 다음 남자, 또 그 다음 남자와도 행복하지 못한 삶을 지탱해야만 했던 봉순이 언니.

토스트와 우유로 아침을 대신하며 세련된 서구화된 식생활을 하는 식구들과는 달리 구석진 부엌에서 미련스레 누른밥으로 아침을 때우는 봉순이 언니는 서구문명에 쉽싸리 휩쓸리지 않는 민중들을 상징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 대단한 상징과는 전혀 상관없이 미련스럽고 우왁스러운 봉순이 언니의 삶은 그 자체만으로도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의 실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과거보다 더 많은 땀을 흘리고 치열하게 살았던 많은 사람들이 소수의 선택받은 자들이 중산층이 되고 국가적 수준의 삶이 향상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우했다. 그 한가운데에 봉순이 언니의 인생이 있다.

소설 속 나는 엄마와 같은 정을 느끼던 봉순이 언니로부터 차츰 멀어지면서 이내 기억을 지워버린다. 그러다 결국 정신이 이상한 여인에게서 봉순이 언니를 느끼지만 끝내 눈길을 주지 않는다. 아니 눈길을 줄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 최악의 상황에서도 봉순이 언니의 눈빛은 희망을 말하고 있었으니깐…

징그럽게도 희망이었다. 더 이상 나아질게 없는 것 같은데, 더 이상 발버둥쳐도 남들처럼 버젓하게 잘 살아질것 같지 않은데도 정말 미련스럽게 희망을 놓지 않은 그녀의 눈빛…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녀에 비하면 훨씬 나은 상황에 있으면서도 ‘희망’이란 단어에 막역한 거리감을 느끼는 나는, 정말이지 그녀를 이해할 수 없다. 삶에 대한 소름끼치도록 진저리나는 희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깊게 본 중국의 주택 - 중국의 주거문화 -하
손세관 지음 / 열화당 / 200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주 우연히 이 책을 접하게 됐다. 건축학도도 아니고 건축관련된 일도 하지 않지만 어렴풋이 건축에 관심이 있었고 또 워낙히 잡독을 하는 편이라서 이 책을 선택하면서 주저함은 없었다. 단지 전문가들을 위한 책이며 어쩌나 하는 걱정은 약간 됐지만 많은 삽화와 도판으로 일반인들도 충분히 흥미와 관심을 가질만했다. 중국여행을 가본 적도 없고 해서 내가 아는 중국 주택이란 그저 영화에서 본 단편적인 영상뿐이였다. 이 책에서 소개한 4종류의 주택들을 보고 눈이 휘둥그래진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첫번째 중국 주택의 사례로서 사합원이라 불리는 죽국을 대표하는 도시형 주거형식이다. 즉, 가운데 마당이 있고 건물이 그 주위를 둘러싸는 형식을 취하는 주택이다. 중정을 중심으로 생화공간이 배열되는 것은 동양의 주거형식이라고 할 만큼 동양문화권에서는 보편적인 것이지만, 사합원의 경우와 같이 좌우대칭의 완전한 口자형을 이루는 주거형식은 그 사례를 찾기 어렵다.

두번째 사례는 휘주의 주택이다. 휘주는 중국에서도 자연경관이 빼어난 곳이다. 휘주주택의 특이성과 독자성은 우선 천정(天井)이라 불리는 두 층 또는 세 층 규모의 건물로 둘러싸인 일정의 광정(光井)이다. 휘주 주택이 독특한 공간 구성을 취하는 배경에는 이 지역이 지니는 기후조건의 영향을 배제할 수 없다. 휘주는 전반적으로 공기가 습윤하고, 연간 기온 차이가 상당히 심하다. 따라서 겨울에는 추운 바람이 들어오는 것을 막고 내부의 열이 밖으로 발산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높은 담을 사방으로 둘러쳤다. 또한 휘주는 산지가 많고 평지가 협소한 반면 인구가 많아 두 층 이상의 주거형식이 일반화했을 것이다.

세번째 사레는 황토 고원의 요동이다. 요동은 중국 고유의 동굴 주거를 뜻한다. 황토고원은 겨울이 매우 길고 기온의 일교차가 큰 것이 특징이다.

마지막으로 복건성의 토루이다. 토루는 외부는 두터운 흙벽으로 구축되고 내부는 목구조로 짜맞추어지는 혼합구조를 갖는 세 층 내지 다섯 층 규모의 집합주택이다. 한족의 하나인 객가인에 의해 건축된 토루는 동그란 형태와 사각형의 두 종류의 형태가 있다.
객가족은 독립심과 강한 단결력을 지니고 토착민과는 쉽사리 융화하지 않는 결속력을 갖는 민족으로 유명하다. 이런 객가인의 특성이 반영된 토루는 방어의 목적으로 창과 문이 극히 제한된 두터운 흙벽은 마치 성채와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

중국과 우리나라 주거환경에서 여러가지 공통점이 있다고 한다. 우선 주택의 한 가운데에 마당을 두고 건물이 그 주변을 둘러싸는 공간구성을 하는 중정형(中庭型)주거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또한 주택의 구축을 위해서 나무를 사용한다. 물론 중국은 목구조와 벽구조를 혼합하는 방식이 일반화한 반면 우리는 주로 목조를 사용한다는 차이가 있다. 또한 주택 내에서 공간의 우계적 사용이라는 측면에서 유사하다. 즉, 주택 내부에 있어서 남녀와 상하의 구분이 비교적 엄격하게 적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가부장제를 바탕으로 하는 유교적인 공간질서가 주거공간의 구성에 크게 작용했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하지만 이러한 유사점 이외에도 양국사이의 차이점 또한 명확하다. 중국의 주거환경은 완전하게 폐쇄된 공간구성과 좌우대칭의 축적 구성을 기본으로 하는데 우리의 주거환경은 좀더 개방적이고 자유롭다 할 수 있다.

이렇게 두 나라의 주택에서 보이는 공간구성의 차이를 학자들은 지형적인 이유로 설명하고 있다. 즉 중국의 주요 인구 밀집지역이 평야지대에 있어 환경적으로 개방되어 있기 때문에 주택을 폐쇄적으로 구축한 반면 우리는 산야가 이미 영역감을 주므로 집을 휠씬 느슨하게 배치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단지 이런 이유때문만이 아니라 그곳의 문화적, 사회적 특성을 바타아으로 하고 부수적으로는 기후, 지형, 재료, 구축방식등의 차이에서 기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지형적 특성, 기후조건 등 여러 요인과 상호작용하여 양국 주거형식의 차이를 만들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비쿠스 1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원작, 파스칼 라바테 그림, 이재형 옮김 / 현실문화 / 2000년 9월
평점 :
절판


20세기 초 혼돈과 혁명의 러시아를 배경으로 지극히 평범한 회계원인 시메온의 인생사가 펼쳐진다. 1910년대의 러시아의 사회상이 지금의 우리들에겐 낯설지만 그건 중요치 않은 것 같다. 시메온이라는 인간상은 그가 살았던 시대가 19세기이든 훨씬 앞선 어느 옛날이든가에 관계없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원초적인 내면의 모습인 듯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서평이나 옮긴이의 짧은 글을 읽다보면 시메온을 ‘말하는 해골’ 즉 이비쿠스와 같은 악의적이고 타락한 인간으로 동일시한다. 그렇지만 나는 시메온의 모습 곳곳에서 나 자신의 숨기고 싶은 치부를 보는 듯 했다. 시메온은 그가 속한 세계에서 뭐하나 내세울 것 없는 그야말로 보잘것없는 평범한 직장인이다. 그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그 또한 막연한 일확천금을 꿈꾸기도 하지만 그걸 이룰 특별한 길이 있으리란 생각이나 노력같은 건 애당초 하지 않는다.

단지 믿는 건 어느날 손금을 봐준 짚시 여인의 부자가 될 거라는 말뿐이다. 그건 그에 대한 어떤 확신이나 믿음이 아니라 오히려 잡히지 않을 신기루에 대한 부질없는 기대에 가깝다. 그럼에도 놓아버릴 수 없는 쓸데없는 기대는 그 자체만으로도 자칫 희망없는 삶의 유일한 희망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실망과 기대를 동시에 느끼며 여전히 복권판매대에 긴 줄을 선다.

우리와 시메온이 다른 것은 단지 시메온에게 기회가 우연히 왔다는 것 뿐이다. 물론 그 기회 앞에서도 선택의 갈림길이 있었지만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양심을 택하겠는가? 그리고 우연챦은 기회 앞에서 양심을 저버렸다고 해서 과연 그에게 우리는 떳떳하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시메온은 그 갈림길들에서 많은 부분 양심을 저버리는 선택을 한다. 그럼에도 그런 그에게 난 동정심을 느낀다. 그의 뒷모습은 여느 소시민의 그것들과 아직도 너무도 흡사하다.

세상에 대해 떳떳할 수 없이 주눅들고, 혼돈과 공포앞에서 맞서기보다는 제 몸 하나 숨을 자리를 비굴하게 둘러보는 나약한 그의 너무나도 작고 초라한 뒷모습에서 …. 나는 어쩔 수 없이 나를 느끼게 된다. 내게도 그와 같은 기회와 갈림길이 찾아온다면 나 역시 또 하나의 이비쿠스가 되지 않으리란 법도 없을 것 같다. 우리 안의 이비쿠스는 단지 제 모습을 드러낼 기회를 만나지 못해서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