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 행복한 변화로 이끄는 내 삶의 기관차 - Develop Me Success Master 1
존 템플턴 지음, 노먼 빈센트 필 서문, 남문희 옮김 / 거름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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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인간에게 있어서 그들 삶의 하루하루를 영위해 나가고, 미래를 향해 한 발짝 내딛을 수 있게 만드는 힘의 원동력은 과연 무엇일까? 물론 이 물음에 관한 답은 개인에 따라 다를 것이다. 어떤 이들은 부모님이나 친구를 그들의 원동력이라 말할 것이고 혹은 사랑하는 이성을 꼽을 수도 있다. 나 역시 가족이라는 큰 울타리는 나를 이끄는 더 없이 큰 존재이다.

하지만, 사실 요즘의 나를 돌이켜 보면 과연 내가 진정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고 또 나는 그것을 위해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든다. 이는 나의 버팀목인 가족이 있다는 사실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내 삶을 이끌어갈 주인은 바로 내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 거울에 비춰진 나의 모습이 단지 이미 내 앞에 주어진 길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맹목적으로 따르려고만 하고 있지는 않은 건지, 혹은 너무 현실적인 측면만을 고려한 채 나의 20대를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 내 스스로가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이렇게 내가 방황 속에 있을 때 만난 책이 바로 존 템플턴의 <열정> 이다.



<열정>은 얼핏 봐서는 기존의 자기개발서와 다르지 않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만한 좋은 글귀들로 채워져 더 이상은 반박할 수 없도록 만들어 놓은, 그래서 흥미가 없는 책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책이란 읽는 이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접근하느냐에 따라 충분히 가치 있고 흥미로운 이야기로 다가온다. 책에 적힌 당연한 말들 하나하나가 마음속에 새겨질 때 비로소 내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책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만들어나가는‘행복한 인생’에 주목하고 있다. 과연 행복한 인생을 만들어 나가는데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저자는 이에 대한 대답으로 우리들의 마음가짐을 꼽는다. 인간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그들의 인생을 살아가느냐에 따라 행복할 수도, 때로는 불행에 직면할 수도 있다. 나 역시 이 책을 접하기 전까지만 해도, 내 마음은 보이지 않는 불안과 초조함으로 휩싸여 있었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는 현실이 때로는 못마땅했다. 하지만 내가 뭔가 새롭고 관심이 가는 무엇인가에 도전하기란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다. 그것은 바로 내 속에 존재하는 열정이 부족한 탓이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지금 나에겐 녹초가 된 순간에도 다시 일어서는 활력과 어떤 장애물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열정이 필요한 때이다. 그리고 이렇게 단순하고도 어려운 과제를 해결하는데 이 책은 오아시스와도 같은 존재로 내게 다가왔다. 내 스스로에 대해서 깊이 있고 진솔하게 생각해 볼 시간이 많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핑계로 투덜거리기만 했던 나에게 ‘과연 내 마음엔 열정이 있는 것일까? 있다면 이는 어떤 모습으로 내 삶을 이끌어나가고 있는 것일까?’하는 마음속 질문을 던지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내 삶에 대해 다시 한 번 다잡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 지금의 내 모습에 대해 후회하지 않고, 좀 더 성숙하고 자랑스러워 할 수 있도록 용기와 열정을 가지고 도전하는 나를 그려보고자 한다. 저자가 말했듯, 위대한 열정의 씨앗은 이미 내 안에 있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그저 가지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잘 가꾸고 보살피고자 하는 것이다.

 행복한 인생’이란 비단 명예와 부를 얻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스스로 내 삶의 열정을 찾아 그것을 향해 노력하고 한 발짝씩 다가가는 것도 행복한 인생이 될 수 있다. 나는 <열정>이란 한 권의 책을 통해 그동안의 나를 반추해 보고 새로운 기회를 찾아 나설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 물론 기회를 발견했을 때 그것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나를 다잡아 가는 것은 내 몫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존 템플턴이 일러준 대로, 시작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경험들을 내게 새로운 차원의 비전이 열리고 지혜가 쌓이는 행복한 변화들로 바꾸어나갈 것이다. 즉, 이번 계기로 얻게 된 내 인생의 새로운 원동력을 통해 또 다른 나의 모습을 그려나가는 데 힘쓰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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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공장
데이비드 플로츠 지음, 이경식 옮김 / 북앳북스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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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아인슈타인, 빌 게이츠, 최근래에는 송유근 군 같은 천재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사람들을 가슴 떨리게 만드는 동시에 ‘나는 왜 그렇게 태어나지 못했을까’라는 열등감을 일으킨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돈과는 달리 지능은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 선조에게 물려받는 것이라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학은 이것마저도 가능케 했다. 불임 부부에게 출산의 기쁨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정자 은행은 불임 부부 뿐만 아니라 일반 여성에게까지 더 우수한 정자를 선택 가능하게 함으로써 이제는 천재를 ‘만들 수 있는’ 시대가 가까이 오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자유경쟁시대가 도래하면서 ‘더 우수한 자가 살아 남는다’라는 다윈의 철학이 새롭게 이행되고 있으며 이것은 기업뿐만 아니라 인간에게까지 적용 되고 있다. 이 책에서 다루어진 그레이엄 역시 이러한 관점을 바탕으로 노벨상 수상자들의 정자은행(실제로는 노벨상 수상자들의 정자들이 아니었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졌지만)인 ‘후손 선택을 위한 저장고’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가 주장한 ‘높은 지능을 가진 열 명이 천 명의 바보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다’라는 주장이 우리나라 모 대기업 총수가 말한 것과 매우 비슷하다는 사실은 우리나라 역시 그와 같은 사고로부터 벗어나기 어려움을 시사한다.

탁월함을 만드는데 있어서 유전자는 결코 무시할 바가 되지 못하며(운동가나 예술가 집안을 보라!) 이는 Nature 對 Nurture의 논쟁에서 Nature 측의 중요한 논거가 되었다. 지능을 포함하여 유전적으로 물려받는 특성은 모두 신체와 관련된 것인데, 짐승의 세계 뿐 만 아니라 인간의 세계에서도 더 나은 신체 조건은 행복을 누릴 가능성을 더 높이는데 기여한다. 멋진 외모와, 탁월한 운동 신경과, 우수한 두뇌를 가진 사람은 그저 그런 외모와, 박약한 체력과, 집중력이 딸리는 사람보다 행복을 누릴 가능성이 더 높을 것이라는 것은 깊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사람이 ‘행복을 누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지, ‘행복하다’는 것은 아닌 것임에 주목해야 한다. 유전자 조작을 통해 IQ 뿐만 아니라 GI를 고루 높인다고 할지언정 그 사람의 행복을 보장할 수는 없다. 더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는 유전자나, 사랑하는 사람을 기쁘게 해주는 유전자란 없다. 그것은 모두 삶에서 중요한 영역을 차지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결정되는 것이 아닌, 살아가면서 배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생학자의 판단 오류는 ‘지능(또는 능력)이 곧 행복을 결정한다’라는 생각으로부터 비롯된다. ‘후손 선택을 위한 저장고’의 스타였던 도론이 ‘만일 내가 IQ 180이 아니라 100으로 태어났다 하더라도 내 인생을 충분히 잘 살 겁니다. 훌륭한 사람을 단순히 유전자만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한 것이나, 정자를 받은 어머니들의 교육열이 높았기 때문에 천재의 유전자를 받지 않아도 양질의 교육 환경을 제공하여 아마 그 사람이 우수한 사람이 되었을 거라는 작가의 언급, 그리고 같은 사람의 유전자를 받았음에도 전혀 다른 사람으로 성장한 엘튼과 톰의 일화는 이를 뒷받침 한다.

이 책에서는 정자은행으로 태어난 일부 사람들의 이야기 ― 생물학적 아버지의 스펙에서 밀린 사회학적 아버지의 가내 위상 추락, 다른 사람의 정자를 받아 태어났다는 소식을 접한 자식들의 정체성 혼란, 기증자와 어머니와 자식 간의 새로운 가족 관계 형성 등 ― 을 다루고 있지만, 나는 이 책 초반에서 잠깐 다루어졌다가 묻혀버린 우생학자들의 생각을 책을 읽는 내내 곱씹어 보았다. 과연 그들이 원하는 대로 IQ 60대나 신체 불구자의 유전자는 남김없이 해치워버리고, 최소 키 165cm 이상, IQ 120 이상 등등의 ‘유전자 우수자의 나라’를 만든다면 그 나라는 과연 행복할까? 답은 ‘아니오’다. 인간이 짐승과 다른 점은 환경이 전자의 생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심지어 누군가 가르치지 않으면 두 발로 걸을 수도 없다! 환경, 교육, 노력은 우수한 유전자를 지닌 사람과 덜 우수한 유전자를 지닌 사람 간의 예상된 성공, 나아가서는 행복의 정도를 충분히 뒤엎을 수 있다. 때문에 노벨상 수상 여부를 우수한 유전자 보유 여부로 판단한 그레이엄은 틀렸다. 노벨상을 탄 것은 우수한 유전자를 보유한 것과 더불어, 극단적으로는 우수한 유전자를 보유하든지 말든지 피나는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것, 나는 ‘사주’를 생각해 보았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매우 절대시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최고의 사주를 타고 났든 혹은 이상한 사주를 타고 났든 간에 자신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며 산다. 설령 몇 날 몇 시에 죽을 운명이라고 사주에서 일러준다고 할지언정 그 날에 맞춰 관을 짤 사람은 없을 것이다. 유전자도 마찬가지다. 우수한 유전자라고, 혹은 열등한 유전자라고 자신의 인생을 넋 놓고 보낼 사람은 없다.

시험관 아기와 정자은행 반대 피켓을 들던 시대는 이제 지났다. 혹자가 말한 것처럼 카탈로그에서 기증자의 특성에 맞춰 정자를 고르는 흐름은 이제 막을 수 없다. 과학이 점점 발달하면 기증자 한 사람의 유전자를 온전히 받는 것이 아닌, 여러 사람의 장점만을 골라 담은 유전자가 등장하게 될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의 삶에서 타고나는 유전자가 맞게 되는 변수는 매우 크지만, 그래도 재력이나 성적처럼 눈에 보이는 결과를 그들이 가지게 되었을 경우, 교사로서의 내가 그들에게, 그리고 다른 평범한 학생들에게 어떻게 교육을 시켜야 할지는 더 생각해보아야 할 과제로 남겨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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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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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워하지 말아라, 너만 아픈 게 아니란다.” 
 

책을 읽자는 목록에서 가장 눈에 띈 구절이다. 어쩌면 지금의 내가, 나도 의식하지 못하는 중에, 외로움을 타고 있는 중 일는지도 모르겠다.  

일본 소설은 때로는 세밀한 문체로 깊은 공감과 감동을 이끌어내는 반면 때로는 지나친 제재나 주제의 파격성으로 다소 동질적 이해를 떨어뜨려 설핏, 그 선택을 주춤거리게 하기도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또한 이 논지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한마디로 말해 <상실의 시대>는 연애소설이다. 그러나 결코 가볍되 가볍지 않은, 무겁되 무겁지 않은, 무라카미 하루키, 그만의 무게를 가지고 있다. 사실 이 소설은 그의 자전적인 소설이라고 한다. 이야기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단짝이던 주인공 ‘나(와타나베)’를 중심으로, 절친한 친구 기즈키와 그의 여자 친구 나오코와의 삼각관계로 시작된다. 나오코와 깊이 사랑하는 사이였던 기즈키가, 돌연 자살을 하게 되자, ‘나’는 나오코와 급속도로 사랑에 빠져, 두 사람은 심신이 하나로 녹아든, 황홀하고 감미로운 첫날밤을 보낸다. 그 후 돌연 나오코는 실종되고 한참 후 그녀가 깊은 산중 정신 요양원에 입원 중이라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나오코와 떨어져 고민하던 ‘나’앞에, 나오코의 내성적인 성격과는 정반대인 풋풋한 젊은 매력과 적극적인 행동파인 미도리가 나타나, 두 사람은 점점 가까워져, 파격적인 러브 스토리가 전개된다. 그렇듯 이 소설은 ‘나’와 기즈키와 나오코에 이어, ‘나’와 나오코와 미도리를 둘러싼 두 여자 친구 사이에 벌어지는, 삼각관계의 연애로 주류를 이룬다. 그러나 미도리와 그 전 애인과 ‘나’, 혹은 ‘나’와 나가사와와 하쓰미, 그리고 ‘나’와 미도리와 연상의 여인 레이코 등과의 몇 가지 부차적인 삼각관계까지 합치면 숱한 삼각관계가 얽히고설킨 연애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어쩌면 진부하다고도 볼 수 있는 뻔 한 연애소설 레퍼토리를 가지고도, <상실의 시대>가 전혀 그러한 느낌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건 아마 우리 모두가 지금,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다소 혼란스러운 사회 정치적 상황 속에서 주인공인 ‘나’는 진정한 삶에 대해서 그리고 진정한 사랑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고 번뇌하며 갈등한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일본의 사회 상황은, 사실 오늘날의 우리 사회와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처럼 작품은 다소 이념적이고 무거운 소재들을 묘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데올로기에 불과할 수밖에 없는 이데올로기는 철저히 배격하고, 보수주의자도 진보주의자도 모두 냉정한 시선에서 바라보고 있다. “제가 이 소설에 그려내고 싶었던 것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일의 의미입니다.”라는 작가의 서두처럼, 혼란한 사회상 속에서 그에 영향을 받고 있지만, 또한 스스로 그 자체로서 실존적 존재의 의미를 가지는 개인을 두고 새로운 사회관과 가치관을 이끌어 ‘사랑’을 논하고 있다.

소설 속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어딘가 병들어 있거나 비뚤어져 있거나 온전하지 못하다. 심지어 객관적으로는 완벽해 보이는 캐릭터일지언정 모두 그들만의 고독과 외로움 그리고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슬프게도 누군가는 그 쓰라림을 견디지 못하고, 살아남지 못하기도 한다. 아마 3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상실의 시대’가 현대인들에게 많은 공감을 얻는 것은 바로 현대인의 이런 마음의 병폐에 귀의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요즘, 자신의 상처에서, 그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자살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 지금, 사실은 우리 모두가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아니, 그 상실감을 안고 이 시대를 처절하게 살아남고 있는 것이 아닐까.

젊은 날의 감미롭고 황홀한 사랑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하기에는 그 사랑은 너무나 아프고 슬프고 고독하고 괴롭다. 투명한 핑크빛보다는 차라리 검붉은 핏빛에 가까운 사랑이다.

“나는 내가 이제까지 살아오는 여러 길목에서 잃어버린 많은 것들을 생각했다. 잃어버린 시간, 죽었거나 또는 사라져 간 사람들,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지난 추억들, 그리고 그 모든 상실의 아픔들을.”

23살. 아직 젊은 날이라 반추하기에는 다소 어색하고 짧기만 한 시간들이지만, 난 그동안 무엇을 잃었나, 조금씩 조금씩 나도 모르게 무엇을 흘리며 살아왔나하는 생각들을 해 보게 되었다. 옆도 뒤도 돌아볼 틈도 없이 그저 앞으로만 달려온 지금, 사실은 멈춰 서서 고개 돌려도 그저 나 혼자 밖에 덩그러니 남아있지 않더라고, 그 누구도 내 곁에서 손잡아 줄 이가 없더라고, 그게 무서워 혼자 속으로만 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괜찮아. 외로워하지 말렴. 너만 아픈 게 아니란다.” 어쩌면 그 위로가 듣고 싶어, 난 다시 한 번 이 책을 읽게 되려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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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 글쓰기
셰퍼드 코미나스 지음, 임옥희 옮김 / 홍익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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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로서의 글쓰기’란 쓰기를 통해서 무의식에 잠재해 있던 내면의 갈등을 어루만지는 것을 말한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서는 환자를 치료할 때, 환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말하는 과정 자체에서 환자의 갈등이 어느 정도 치유된다고 본다. 이러한 ‘말을 통한 치유’에서 비롯하여 글을 읽고 쓰는 것에도 치유의 기능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특히, 일기나 자서전 같은 자전적인 글을 통해 ‘치유로서의 글쓰기’를 할 수 있다. 자신의 인생을 재구성하여 글을 쓰면서 상처를 끄집어내며 이를 통해 그 상처에 대면하고 치유할 수 있는 본능적 욕구가 발현된다.

이렇듯 내면의 상처를 성찰하고 표현하여 다른 사람들까지 공감할 수 있도록 만드는 사람들이 바로 작가다. 작가들의 창작은 단순히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자가 치유를 위한 무의식적 충동을 반영한 것이다. 그들은 창작심리 속에 자신의 상처와 갈등을 분출하고 이를 무디게 하며 결국에는 보다 성숙해질 수 있다.

그렇다면 창작을 통해서 치유의 기능을 실현하려면 어떻게 글을 써야 하는가. 모든 글이 치유의 기능을 가진 것은 아니다. 치유로서의 글쓰기를 위해서는 일단 생각을 정리함으로써 내면의 상처를 명료화하여 끄집어내고, 그것을 전제로 최대한 솔직하게 글을 써야 한다. 이 과정을 통해서 자신도 제대로 알지 못했던 내면의 문제들을 발견하고 이를 뒤흔들어 치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와 같은 창작을 통해 치유를 경험하지는 못한다. 치유는 글쓰기뿐만 아니라 읽기를 통해서도 가능하다. 작가는 개인적 경험을 일반화하여 내면의 갈등과 치유를 독자도 경험할 수 있도록 해준다. 따라서 읽는 이는 글을 통해서 감동을 받고 상처를 어루만질 수 있으며 보다 성숙해짐으로써 자가발전을 꾀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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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포 가는 길 황석영 중단편전집 2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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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포 가는 길>을 읽으면서 하얀 눈밭을 서로 의지하며 걸어가는 세 명이 그려졌다. 두 명의 남자, 정씨와 영달, 한 명의 여자, 백화가 말이다. 그들은 처음 만났지만 서로에게 관심을 느끼고 마치 옛 친구인 것처럼 대하며 서로를 챙긴다. 아마도 그들 모두가 힘들게 살아온 인생이란 것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영달은 부랑하면서 이곳저곳 일을 찾아 돌아다닌다. 그러면서 여자와 동거도 하지만 떠돌이의 삶에서 여자와의 언약을 지키기는 힘들었다. 정씨는 ‘큰집’, 감옥에서 목공 ․ 용접 ․ 구두 수선 등 여러 기술을 배워 가지고 있지만 어디서도 정착하지 못하고 고향 삼포를 찾아 길을 떠나다가 영달과 백화를 만난다. 백화 또한 인생이 순탄하지 못하였다. ‘열여덟에 가출해서, 쓰리게 당한 일이 많기 때문에 삼십이 훨씬 넘은 여자처럼 조로해 있는’ 그녀는 창녀로 사는 것에 이미 익숙해져 버려 몸을 도구로 삼아 살아간다. 영달과 정씨는 식당 주인이 준다는 만 원도 마다하고 백화를 오히려 도와주며 여비도 나누어준다. 백화는 그런 영달에게 감동하고 자신의 본명, 아무에게도 가르쳐 주지 않는 다는 ‘이점례’라는 이름을 가르쳐 준다. 아마도 그녀는 그 이름을 순수하게 간직해왔을 것이다. ‘백화’라는 이름으로 자신이 살아온 인생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본래 순수함을 간직한 그 본명을 보물처럼 감쳐두었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영달에게 그런 본명을 가르쳐 준 것은 다른 남자들과 달리 자신을 작부로 대하지 않고 따뜻하고 순수하게 대해 주었기 때문이리라. 이 세 명의 주인공은 모두다 사회의 중심인물이 아닌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이다. 소설은 이들이 모여 삼포로, 정확히 말하면 감천 읍내 역에 이르기까지의 짧지만 길지도 모를 동행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정씨에게는 큰 혼란이 찾아온다. 노인에게서 들은 삼포의 소식으로 인해 정씨는 꿈에 그리던 고향의 모습을 상실한 것이다. ‘고기잡이나 하고 감자나 매던’ 삼포가 관광호텔이 들어서고 공사판이 되어 산업화가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당시 사회상을 알 수 있다. 이 소설이 쓰인 1970년대는 근대화로 인한 경제 발전이 한창이던 시기이다. 물론 경제가 발전하고 소득이 증대되는 등 긍정적인 면도 있었지만, 농어촌이 해체되고 그로 인해 농어민이 고향을 상실하고 노동자로 변하기도 했다. 이 작품에서 삼포가 근대화라는 미명 아래 관광지로 변해 가는 모습을 통해 농어촌의 해체 과정을 그리며, 또한 유랑만 거듭하는 백화, 정씨, 영달 세 사람을 통해 농어민의 고향 상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노인이 “사람이 많아지면 하늘을 잊는 법이거든.”하는 말에는 산업화로 인해 초래되었던 부정적인 단면을 지적하는 작가의 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결국 정씨는 산업화된 삼포를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곳으로 여기는 영달처럼 마음속의 고향마저 상실하고 부랑하는 입장이 되어버렸다.

물론 이 소설을 이처럼 당시의 사회상과 연결하여 이해하는 데에 큰 무리가 없다. 또한 고등학교 때도 이 소설을 이런 식으로 배웠다. 하지만 꼭 사회상과 연결하지 않더라도 이 소설은 ‘인생’을 그리고 있다는 데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대사는 정씨가 “감옥뿐 아니라, 세상이란 게 따지면 고해 아닌가……”라고 한 것이다. 세 사람의 인생은 정말 힘든 나날의 연속이었고 이렇다 할 기쁨을 느껴보지 못했다. 부랑노동자로, 창녀로,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는 이들의 인생은 정말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힘든 인생을 산 사람만이 인생을 ‘고해’라고 느끼는 것은 아니다. 많은 돈과 높은 명예를 다 가진 사람이라도 인생이 즐거운 것만은 아닐 것이다. 누구나 삶에 있어서 즐거운 날보다 힘들고 고된 나날이 더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잠시의 행복을 맛보기 위해 우리는 ‘고해’같은 세상을 견디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그 잠시의 행복이 우리네 인생에 큰 기쁨을 주기 때문에 힘들더라도 견디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소설 속에서 세상을 단순히 즐겁고 낭만적인 것으로 그리는 것은 어쩌면 삶을 아름답게 포장함으로써 독자를 기만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보다는 이 소설에서처럼 진정한 인간의 삶이란 힘들고 괴롭게 살아가지만 살다보면 같이 이겨내는 타인에게 동질감도 느끼며 서로 인정을 베풀며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그리는 것이 더 진실하게 다가온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아름다운 한 편의 동화가 아니라 속세에 더러워지고 찌든, 삶에서의 괴로움을 보여주는 소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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