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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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워하지 말아라, 너만 아픈 게 아니란다.” 
 

책을 읽자는 목록에서 가장 눈에 띈 구절이다. 어쩌면 지금의 내가, 나도 의식하지 못하는 중에, 외로움을 타고 있는 중 일는지도 모르겠다.  

일본 소설은 때로는 세밀한 문체로 깊은 공감과 감동을 이끌어내는 반면 때로는 지나친 제재나 주제의 파격성으로 다소 동질적 이해를 떨어뜨려 설핏, 그 선택을 주춤거리게 하기도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또한 이 논지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한마디로 말해 <상실의 시대>는 연애소설이다. 그러나 결코 가볍되 가볍지 않은, 무겁되 무겁지 않은, 무라카미 하루키, 그만의 무게를 가지고 있다. 사실 이 소설은 그의 자전적인 소설이라고 한다. 이야기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단짝이던 주인공 ‘나(와타나베)’를 중심으로, 절친한 친구 기즈키와 그의 여자 친구 나오코와의 삼각관계로 시작된다. 나오코와 깊이 사랑하는 사이였던 기즈키가, 돌연 자살을 하게 되자, ‘나’는 나오코와 급속도로 사랑에 빠져, 두 사람은 심신이 하나로 녹아든, 황홀하고 감미로운 첫날밤을 보낸다. 그 후 돌연 나오코는 실종되고 한참 후 그녀가 깊은 산중 정신 요양원에 입원 중이라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나오코와 떨어져 고민하던 ‘나’앞에, 나오코의 내성적인 성격과는 정반대인 풋풋한 젊은 매력과 적극적인 행동파인 미도리가 나타나, 두 사람은 점점 가까워져, 파격적인 러브 스토리가 전개된다. 그렇듯 이 소설은 ‘나’와 기즈키와 나오코에 이어, ‘나’와 나오코와 미도리를 둘러싼 두 여자 친구 사이에 벌어지는, 삼각관계의 연애로 주류를 이룬다. 그러나 미도리와 그 전 애인과 ‘나’, 혹은 ‘나’와 나가사와와 하쓰미, 그리고 ‘나’와 미도리와 연상의 여인 레이코 등과의 몇 가지 부차적인 삼각관계까지 합치면 숱한 삼각관계가 얽히고설킨 연애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어쩌면 진부하다고도 볼 수 있는 뻔 한 연애소설 레퍼토리를 가지고도, <상실의 시대>가 전혀 그러한 느낌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건 아마 우리 모두가 지금,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다소 혼란스러운 사회 정치적 상황 속에서 주인공인 ‘나’는 진정한 삶에 대해서 그리고 진정한 사랑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고 번뇌하며 갈등한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일본의 사회 상황은, 사실 오늘날의 우리 사회와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처럼 작품은 다소 이념적이고 무거운 소재들을 묘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데올로기에 불과할 수밖에 없는 이데올로기는 철저히 배격하고, 보수주의자도 진보주의자도 모두 냉정한 시선에서 바라보고 있다. “제가 이 소설에 그려내고 싶었던 것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일의 의미입니다.”라는 작가의 서두처럼, 혼란한 사회상 속에서 그에 영향을 받고 있지만, 또한 스스로 그 자체로서 실존적 존재의 의미를 가지는 개인을 두고 새로운 사회관과 가치관을 이끌어 ‘사랑’을 논하고 있다.

소설 속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어딘가 병들어 있거나 비뚤어져 있거나 온전하지 못하다. 심지어 객관적으로는 완벽해 보이는 캐릭터일지언정 모두 그들만의 고독과 외로움 그리고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슬프게도 누군가는 그 쓰라림을 견디지 못하고, 살아남지 못하기도 한다. 아마 3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상실의 시대’가 현대인들에게 많은 공감을 얻는 것은 바로 현대인의 이런 마음의 병폐에 귀의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요즘, 자신의 상처에서, 그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자살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 지금, 사실은 우리 모두가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아니, 그 상실감을 안고 이 시대를 처절하게 살아남고 있는 것이 아닐까.

젊은 날의 감미롭고 황홀한 사랑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하기에는 그 사랑은 너무나 아프고 슬프고 고독하고 괴롭다. 투명한 핑크빛보다는 차라리 검붉은 핏빛에 가까운 사랑이다.

“나는 내가 이제까지 살아오는 여러 길목에서 잃어버린 많은 것들을 생각했다. 잃어버린 시간, 죽었거나 또는 사라져 간 사람들,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지난 추억들, 그리고 그 모든 상실의 아픔들을.”

23살. 아직 젊은 날이라 반추하기에는 다소 어색하고 짧기만 한 시간들이지만, 난 그동안 무엇을 잃었나, 조금씩 조금씩 나도 모르게 무엇을 흘리며 살아왔나하는 생각들을 해 보게 되었다. 옆도 뒤도 돌아볼 틈도 없이 그저 앞으로만 달려온 지금, 사실은 멈춰 서서 고개 돌려도 그저 나 혼자 밖에 덩그러니 남아있지 않더라고, 그 누구도 내 곁에서 손잡아 줄 이가 없더라고, 그게 무서워 혼자 속으로만 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괜찮아. 외로워하지 말렴. 너만 아픈 게 아니란다.” 어쩌면 그 위로가 듣고 싶어, 난 다시 한 번 이 책을 읽게 되려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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