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문한 이정록 시집 아버지학교(열림원, 2013)를 받았다

먼저 읽는 <시인의 말>이 가슴에 와 박힌다.


아버지는 쉰여섯, 입춘에 운명했다. 소한 지나 입춘까지, 원고지라는 멀고도 척박한 땅에 아버지를 모셨다. (어머니학교를 포함하여) 두 시집을 나란히 읽어보니 성숙시집같다. 생의 여로가 이렇게 이어진 듯싶다. 두 학교를 모두 마쳐도 졸업은 없다. 죽어서도 무릎 아픈 학생부군이다. 우리는 모두 아버지학교의 불량학생들이다. 내가 먼저 회초리를 맞겠다.”(6~7p)


시집을 읽으면서 이정록 시인이 먼저 맞는 회초리에 나도 내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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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게도 나는 오랫동안 내 인생의 한 권의 책이 있으리라는 믿음을 가져왔다. 나를 기다리는 책, 내가 그 책을 향하여 긴 시간을 걸어왔을 것 같은 책이 분명 있으리라는 생각을 품어 왔다.

그러나 그러한 책은 없다. 단 한 권의 책이 인생을 바꿨다는 얘기는 간혹 들었지만, 곧이곧대로 믿을 말은 아니다. 모색과 탐독 과정에서 임펙트 강한 책은 있을 것이다. 전환의 계기가 된 책, 새로운 싹을 틔운 촉매로서의 책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생을 통째로 바꾸는 한 권의 책을 만나는 경험은 드물 것이다.


아까운 책 2013(부키, 2013)을 받아들면서 내가 미처 알아보지 못한 책 가운데 나를 기다리는, 내가 기다려온 한 권의 책은 없는가 하는 생각을 다시 해보았다. 결국에는 내가 읽은 모든 책이 합해져서 한 권의 책을 이루게 될 것임을 알면서도 말이다.

어쩌면 아닌 것을 알면서도 기다리는 미련한 짓과 나를 붙들고 쉽사리 놓아주지 않는 미련이 나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책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아까운 책 2013》에 수록된 데이비드 호크니와의 대화라는 부제가 붙은 다시, 그림이다에 이런 구절이 있다.

오랫동안 바라보기, 그리고 열심히 바라보기

예술과 관련짓지 않더라도 관찰과 관조는 대상의 핵심을 명징하게 이해하는 중요한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나는 책을 통하여 인문과 사회, 예술과 문화, 인간과 과학을 오랫동안, 그리고 열심히 바라보고자 하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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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대회의 『선비답게 산다는 것』(푸른역사)은 이 출판사에서 출간한 정민 著 『미쳐야 미친다』와 같은 선상에 놓인 기획서라고 할 수 있다.

유려한 문체를 구사하는 학자들의 문장을 읽는 일은 고전과 현대를 넘나드는 시간의 소통을 얼마나 매끄럽게 연결시켜 놓는지 마음을 달뜨게 할 정도이다. 청소년들이, 일반인들이 고전을 많이 읽게 하기 위해서는 고전을 다양하게 끌어들이고 유려하면서도 재미있게 펼쳐놓는 저작자들이 더 많이 필요하다. 그러한 역할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는 사람들로 안대회, 이종묵, 정민, 김풍기, 심경호 등이 퍼뜩 떠오른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으면서 드는 아쉬움은 필요한 핵심만을 취하다 보니 다양성을 확보하는 대신 깊이와 두터움을 챙기기 어려웠다는 점이다.『선비답게 산다는 것』은 큰 테마를 따라가는 소재와 주제의 꼭지글들로 엮여져 있다. 그러나 이 책에는 하나의 꼭지를 가지고 한 권을 쓸 수 있는 소재와 주제들이 넘쳐난다. 단순한 뻥튀기 방식으로 한 권의 책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주제를 파고들면 들수록 넓고 깊은 바다가 펼쳐져 질과 양에서 모두 풍성함을 획득할 것으로 여겨지는 소재거리가 많다. 저자가 나열하는 인물들과 저서 목록들을 보면 그것들을 다 언급하지 않은 채 꼭지글이 마쳐지는 것에 아쉬움이 일 정도이다.

저자가 쓰거나 옮긴 책들 가운데 『고전 산문 산책』(휴머니스트), 『조선의 프로페셔날(개정판: 벽광나치오)』(휴머니스트),  『궁핍한 날의 벗』(태학사), 『조선후기 소품문의 실체』(태학사), 『원야』(예경)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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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이그 테일러의 <런더너>(최세희 역, 오브제, 2012)는 제목만 놓고 보면 충분히 낚일 법한 책이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런던 관련 책을 꽤나 사 읽은 나 역시 제목에 눈길을 먼저 주고, 그 다음에 내용을 살펴보았으니 제목의 비중이 그만큼 크다는 의미이겠다.

‘파리지엔’이나 ‘뉴요커’라는 말처럼 ‘런더너’라는 말에 눈길이 한 번 더 가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러나 15쪽에 이르는 꽤 긴 ‘들어가는 말’을 읽고 나면 이 책이 독자를 낚기 위한 의도에서 ‘런더너’라고 제목을 달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베이징의 10분의 1 크기에 약 300개 언어를 사용하는 750만명이 살고 있는 런던. ‘들어가는 말’만 놓고 보면 저자에게 런던은 그다지 우호적이지도 매력적이지도 않았던 것 같다. 심지어 “나는 도시가 자체적으로 날 밀쳐내고 있다고 느꼈다.”(14p)고 말할 정도이다.

      

     

언어소통이 자유로운 캐나다인이 그렇게 느꼈을 정도이니 의사소통이 불편하고 문화 차이가 큰 동양인에게 런던은 어떻게 다가오겠는가. 그러나 이 책은 그와는 조금 다르게 접근한다.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저자가 왜 제목을 ‘런더너’라고 지었는지 이해가 간다. 저자는 “나는 한 번도 누가 런더너이고, 누가 런더너가 아닌지 구분한 적이 없다.”(22p)고 했다. 이는 진정한 런더너라면 “런던 토박이이고, 마리르보 교회 종소리가 들리는 곳에서 태어난 존재여야만 한다.”라고 말할 수 있겠다 싶겠지만, 그렇지 않다. 많은 사람들에게서 런더너에 대한 규정 대신 진정한 런더너를 만나려면 어찌 해야 한다는 대답을 들을 뿐이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런더너를 정의하는 말들 중에서 내가 유일하게 이해한 건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사람들이 런더너라는 것이었다.”(23p) 저자 크레이그 테일러는 5년간 런던 전역을 돌며 200명의 ‘런더너’를 만나 인터뷰한 결과,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이 책은 바로 그 말을 내놓는 데 이르기까지 저자가 인터뷰한 기록이다. 3장에 걸쳐 18개의 테마에 85명의 인터뷰이들이 등장한다. 그들 중에는 이란, 우간다에서 온 사람들도 있고, 다채로운 일을 하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들 모두가 ‘런더너’이다. 그들 얘기를 들어보고 싶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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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현(한양대 건축학과 교수)의 <사라진 건축의 그림자>(효형출판, 2012)를 읽다. 기대했던 것처처럼 근본적인 물음을 가지고 한국전통건축에 접근한다. 서현은 건축에 대한 대중적 관심과 이해를 높이는 데 앞장서왔다. <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효형출판, 2004), <건축을 묻다>(효형출판, 2009) 등은 많은 이들로부터 꾸준하게 사랑받아 왔다.

     

공교육의 전통건축교육은 추상에 가까웠다.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와 양식을 줄줄이 늘어놓고는 그것이 각각의 특징이라고 가르쳤다. 우리 공교육 방식은 머리에 쉽게 그려지지 않는, '고차원적'이었다. 우리 건축의 절대적 아름다움을 강요하다시피 가르쳤다. 시각 효과가 가미된 안정감의 미학 '배흘림기둥', 우리나라의 산 능선과 버선코, 궁체의 선조미를 닮은 '유려한 처마곡선', 이러한 말만 기계적으로 가르렸고, 그렇게만 배웠다. 이유와 타당성에 대한 질문과 다른 미학적 관점은 들어서볼 자리가 없었다. 20년이 지나도 되풀이해서 그렇게만 가르쳤다. 벗어나지도, 더 추가되지도, 새로운 해석이 가마되지도 않았다. 찬사만을 고스란히 외워야 했다. '민족적 미의식'이라는 말로 모든 해석의 근원을 삼았다. 그러니 예술과 문화를 보는 안목이 키워질 리가 있겠는가.

어떠한 이유 때문에 전통 건축 양식 변화가 생겨났으며, 그 양식의 차이에는 어떠한 역사적 배경과 건축미학이 들어 있는가, 하는 의문을 당연히 가져보았을 법한데, 친절하게 가르쳐준 책들은 드물었다. 서현의 <사라진 건축의 그림자>는 부제에서 암시하듯 그러한 근원적인 의문에서부터 출발한다.

이 참에 건축 관련 도서 몇 권을 더해 놓는다.

<사라진 건축의 그림자>에는 몇 가지 틀린 사실과 오자가 있었는데, 수정하고 가다듬어 재판이 출간되었다. <배흘림기둥의 고백 - 옛건축의 창조와 진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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