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공평하지 않다 - 불공평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11가지 법칙
체탄 바갓 지음, 이선미 옮김 / 오픈도어북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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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불공평한 현실의 철문을 넘어서는 11가지 실천 지혜



“노력하면 누구나 공정하게 보상받는다.” 학교와 가정에서 배운 이 믿음은 냉혹한 현실 앞에서 흔들린다. 부모의 경제력과 배경이 학벌과 직업, 주거 환경으로 이어지는 사회에서 출발선의 차이는 개인의 의지만으로 극복하기 어렵다. 오픈도어북스에서 출간된 체탄 바갓의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는 공정한 세상이라는 환상을 걷어내고, 불리한 조건 속에서도 삶의 주도권을 되찾기 위한 실천 원칙을 제시한다.


인도 공과대학과 아마다바드 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금융업계에서 일한 저자는 소설가와 영화 제작자, 강연가로 활동하며 자신의 삶을 개척했다. 그는 배달기사 비라즈 슈클라와의 대화를 통해 성공에 필요한 11가지 원칙을 풀어낸다. 세상은 누구에게나 같은 기회를 제공하지 않으며, 착한 사람에게 반드시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계층을 가로막는 장벽에는 학력과 영어 능력뿐 아니라 의사소통 방식, 문화적 이해, 인맥과 취업 기회처럼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조건도 작용한다.


저자는 세상을 평평한 운동장이 아니라 높고 험준한 산에 비유한다. 누군가는 유리한 출발점에서 시작하지만, 다른 누군가는 가파른 경사와 바위틈을 헤치며 올라야 한다. 중요한 것은 출발선의 불평등을 부정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정상에 이르는 길을 찾는 것이다. “세상에 당신을 구하러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메시지는 냉정하지만, 타인의 도움과 사회의 배려만 기다리며 자신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말라는 현실적인 경고로 읽힌다.


책이 제시하는 원칙은 육체적 강인함과 정신적 안정, 자기 신뢰, 영어 능력, 작은 성공에 안주하지 않는 태도, 시대 변화에 대한 대응력, 인맥 관리, 주도적인 책임 의식, 재테크와 부동산 활용 등이다. 대부분 자기계발서에서 접할 수 있는 내용이지만, 이를 불공평한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 전략으로 묶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성공은 단번에 찾아오는 행운보다 역량을 축적하고 기회를 포착하며 실패 속에서도 방향을 수정하는 과정에 가깝다.


특히 인상적인 대목은 불평을 멈추고 자신의 잠재력을 실제 행동으로 전환하라는 주문이다. 변화의 시대에는 과거의 성공 방식에 안주할 수 없다. 새로운 기술을 익히고 사람들과 연결되며 작은 성취를 발판으로 더 큰 기회를 모색해야 한다. 다만 자기 책임을 강조하는 메시지가 사회 구조의 문제까지 개인의 노력 부족으로 돌리는 논리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불평등을 직시하는 일과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일은 분명히 다르다.


오늘날 한국 사회 역시 부모의 자산과 교육 환경에 따른 격차, 치열한 입시와 취업 경쟁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동시에 기술과 정보에 대한 접근성이 넓어지고 다양한 직업 경로가 등장하면서 기존의 성공 공식도 변화하고 있다. 대학 학위만이 유일한 길은 아니며, 숙련 기술과 현장 경험, 새로운 산업에 대한 적응력 역시 삶을 개척하는 자산이 될 수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남들이 정해 놓은 성공의 기준을 무작정 따르기보다 자신이 가진 자원과 역량을 냉정하게 평가하고 활용하는 능력이다.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의 11가지 원칙이 완전히 새로운 비밀을 알려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불공평한 현실을 탓하는 데 머물지 말고 그 안에서 자신이 바꿀 수 있는 것을 찾아 꾸준히 실행하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출발선은 선택할 수 없어도 그 이후의 모든 가능성까지 이미 결정된 것은 아니다. 현실을 직시하는 냉철함과 자신을 단련하는 끈기, 그리고 변화의 틈새를 찾아내는 지혜가 있다면 닫힌 문 앞에서도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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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네카의 지혜, 오늘에 충실하라 - 시간과 감정을 다스리는 세네카의 53가지 인생 지혜
세네카 지음, 정영훈 엮음, 이선미 옮김 / 메이트북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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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미래를 준비하느라 오늘을 잃어버린 현대인에게



우리는 더 많이 벌고 더 높은 곳에 오르며 노후를 준비하느라 오늘을 희생한다. 지나간 일은 후회하고 아직 오지 않은 일은 걱정한다. 그러다 문득 돌아보면 정작 자신의 삶을 살아온 시간이 언제였는지 묻게 된다. 메이트북스의 『세네카의 지혜: 오늘에 충실하라』는 이러한 현대인의 모순을 돌아보게 하는 책이다.


세네카는 후기 스토아철학을 대표하는 로마의 철학자이자 네로 황제의 스승이었다. 그의 삶은 권력의 중심과 정치적 격변을 두루 거쳤으며, 마지막에는 네로의 명령으로 죽음을 맞았다. 이 책은 『도덕 서한』, 『인생의 짧음에 관하여』, 『분노에 관하여』 등을 바탕으로 53가지 삶의 지혜를 오늘의 언어로 풀어낸다.


세네카가 강조하는 것은 모든 상황을 통제하는 능력이 아니라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서 자신의 판단과 품성을 지키는 힘이다. 돈과 지위, 건강과 인간관계가 흔들릴 수는 있지만, 그 상황에 어떻게 대응할지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좋은 삶은 더 많이 소유하거나 오래 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달려 있다.


특히 시간을 대하는 관점이 인상적이다. 하루를 긴 인생의 일부로만 여기지 말고 아침에 시작해 밤에 끝나는 하나의 완결된 삶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시간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모든 순간을 통제하는 일이 아니다. 중요한 일에는 충분한 시간을 쓰고, 중요하지 않은 일에는 마음과 시간을 빼앗기지 않는 것이다.


변화와 포기에 관한 조언도 현실적이다. 지금 하는 일이 힘들다고 무조건 떠나기보다 일이 자신에게 맞지 않는 것인지, 능력이 부족한 것인지, 성과가 늦어 조급한 것인지부터 살펴야 한다. 떠나기로 했다면 이전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원인을 돌아보고 부족한 점을 보완해야 한다. 습관을 바꾸지 않은 변화는 실패의 장소만 옮길 뿐이다.


‘지금, 바로, 여기’에 집중하려면 필요와 욕망을 구분해야 한다. 체면과 쾌락, 타인의 평가에 끌려가다 보면 정작 중요한 일을 놓치기 쉽다. 건강과 책임을 지키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불필요한 욕망을 덜어낼 때 삶의 중심도 선명해진다. 공적인 자리에서 물러나더라도 경험과 지혜를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다. 직책은 끝나도 나눔의 기회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세네카의 철학은 현실을 외면하거나 무조건 참으라는 가르침이 아니다.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되 바꿀 수 있는 일에는 행동하고, 분노가 일어나는 순간에는 잠시 멈춰 판단을 되찾으라는 실천적 지혜다. 죽음 또한 삶의 반대편에 있는 사건이 아니라 유한한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일깨우는 기준이다. 완벽한 사람이 되려 애쓰기보다 자신의 결점을 하나씩 줄여가는 태도가 중요하다.


『세네카의 지혜』가 전하는 메시지는 명료하다. 과거의 후회와 미래의 불안에 현재를 내주지 말라는 것이다. 삶은 조건이 완벽해질 때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주어진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하고 실행하는 순간 이미 시작된다. 인생에서 가장 확실한 시간은 미래가 아니라 오늘이다. 미래를 준비하되 오늘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이 세네카가 우리에게 전하는 삶의 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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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어린아이가 울고 있다면 - 오래된 상처를 알아차리고 다정하게 회복하기
멜라니 피그니터 지음, 김희상 옮김 / 서교책방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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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과거의 상처와 결핍을 넘어, 다정한 나를 만나는 내면 여행



아무 일도 없는데 마음이 무너질 때가 있다. 이유 없이 눈물이 흐르고, 이미 지나간 일이 현재의 나를 흔들기도 한다. 그때 어쩌면 오래전 상처받은 어린 내가 조용히 말을 걸어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서교책방에서 출간된 멜라니 피그니터의 『내 안의 어린아이가 울고 있다면』은 성인이 된 지금도 우리의 선택과 관계, 감정에 영향을 미치는 ‘내면 아이’를 들여다보는 심리 치유서다. 저자는 어린 시절 사랑과 안전을 얻기 위해 만들어낸 방어기제가 성인이 된 뒤에도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면서 불안, 완벽주의, 갈등 회피, 타인의 인정에 대한 집착 등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어린 시절에는 살아남기 위해 필요했던 ‘낡은 안전모와 무기’가 어른이 된 뒤에는 오히려 자신을 가두는 족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일찍 어른스러워지고 감정을 억누르거나, 타인에게 지나치게 맞추며 살아온 사람에게 이러한 방어기제는 낯설지 않다.


이 책의 중요한 메시지는 과거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과거가 현재의 나를 지배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이미 일어난 일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앞으로의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는 선택할 수 있다. 그래서 저자는 상처받은 어린 자신을 외면하거나 비난하기보다 따뜻하게 만나고 돌보라고 말한다.


이 대목에서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나는 오랫동안 ‘항상 강해야 한다’는 생각에 익숙해져 있었다. 기계나 질병 따위에 쉽게 무너지는 약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병원이나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것조차 자기관리의 실패처럼 여긴 적이 있다. 몸은 쇳덩이처럼 강해야 하고 정신은 그보다 더 강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책을 읽으며 그 강함이 정말 건강한 강함이었는지 되묻게 된다. 약점을 드러내는 것이 두렵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어렵다면 그것 역시 어린 시절부터 만들어진 하나의 방어기제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가 제안하는 자기 대화가 마음에 남는다.


“나는 지금껏 강해지기 위해 충분히 노력했어. 때로는 약해도 괜찮아. 도움을 받아들여. 내가 기꺼이 너를 도와줄게.”


강한 사람은 결코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흔들릴 때 자신의 약한 부분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책은 부모와의 관계뿐 아니라 친구와의 경험도 내면의 상처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바라본다. 어린 시절 부모의 품을 떠나 또래 집단과 관계를 맺기 시작하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따돌림이나 괴롭힘, 거절과 소외는 깊은 흔적을 남길 수 있다. 그렇게 형성된 부정적인 고정관념은 성인이 된 뒤에도 자신도 모르게 인간관계와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


특히 사랑의 방식이 서로 다를 수 있다는 설명도 흥미롭다. 저자는 도움을 베풀려는 각오, 함께 보내는 시간, 깊이 있는 대화, 스킨십, 선물, 인정이라는 여섯 가지 사랑의 언어를 제시한다.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관계가 어긋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상대에게 내가 주고 싶은 방식이 아니라 상대가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방식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어린 시절의 상처를 만든 사람 역시 또 다른 상처를 가진 존재일 수 있다. 그렇다고 그들의 행동을 무조건 정당화하라는 뜻은 아니다. 용서란 과거의 잘못을 없었던 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가 더 이상 현재의 나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내 삶의 주도권을 되찾는 일에 가깝다.


결국 내면 아이를 돌본다는 것은 과거로 돌아가는 일이 아니라 현재의 나를 자유롭게 하는 일이다. 우리는 익숙한 생각과 감정,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반복하는 습관의 노예가 되기 쉽다. 부정적인 생각이 부정적인 현실을 만들고, 그 현실이 다시 기존의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악순환도 그렇게 만들어진다.


『내 안의 어린아이가 울고 있다면』은 그 악순환을 끊기 위해 먼저 내 안에서 울고 있는 어린 나를 발견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 이제는 내가 보호자가 되어주어야 한다고 일깨운다.


어쩌면 진정한 성숙은 더 강한 사람이 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약했던 나를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는 데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과거의 상처가 내 삶의 이야기를 시작했을 수는 있지만, 그 상처가 내 미래까지 결정할 필요는 없다. 내 안의 어린아이에게 다정한 편이 되어주고 싶은 모든 이에게 따뜻한 내면 여행의 길잡이가 되어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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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방 PDE
이혜경 지음 / 북레시피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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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지식 권력의 오만과 심리 지배의 덫, 그리고 자멸의 미학



정신과 진료실은 상처 입은 사람이 자신의 내면을 가장 솔직하게 내보이는 공간이다. 그렇기에 의사와 환자 사이에는 지식과 정보의 비대칭성이 존재한다. 도서출판 북레시피에서 출간된 이혜경 작가의 장편소설 『처방 PDE』는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치유를 위해 사용되어야 할 전문 지식이 인간을 지배하고 파멸시키는 도구로 변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 작품은 그 섬뜩한 질문을 심리 스릴러의 형식으로 밀도 있게 풀어낸다.


소설의 중심에는 정신과 의사 이수현이 비밀리에 진행하는 프로그램 ‘PDE’가 있다. 수현은 환자의 결핍과 상처, 심리적 취약점을 집요하게 파악한 뒤 위로와 이해, 인내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판단에 개입한다. 직접적인 폭력을 행사하지 않으면서도 피해자가 스스로 파멸적인 선택을 하도록 유도한다는 점에서 그의 방식은 더욱 교묘하고 섬뜩하다.


선영 역시 그 희생자다. 술에 취해 폭력을 일삼는 남편 박민석에게 오랫동안 시달리며 심각한 정신적 고통을 겪던 선영은 수현이 운영하는 병원을 찾는다. 대학 선후배로 만나 결혼한 민석은 술에 절어 생을 마감한 아버지의 삶을 그대로 답습했고, 고아 출신인 선영은 그 폭력의 피해자가 된다. 수현의 암시와 묵언은 선영의 판단을 조금씩 잠식하고, 결국 민석의 죽음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선택으로 이어진다.


흥미로운 것은 선영의 삶이 비극으로 끝나는 것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민석이 들어둔 보험금으로 갑작스럽게 큰돈을 손에 쥔 선영은 이른바 ‘권력의 상황효과’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보여준다. 사람이 본질적으로 나빠서 권력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놓인 상황과 환경이 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심리학적 관점이 선영의 변화에 투영된다. 잠시나마 돈이 인간의 태도와 욕망을 어떻게 바꾸는지 보여주는 대목은 소설의 또 다른 흥미로운 층위다.


그러나 수현의 진짜 목적은 선영의 삶을 변화시키는 데 있지 않았다. 그녀 역시 하나의 ‘실험체’에 불과했다.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이던 선영은 결국 죄책감과 자괴감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 다만 죽음을 앞두고 어린 시절부터 꿈꾸었던 유화 그림을 완성하고 자신의 죽음에 대한 메시지를 남긴다. 수현이 완전범죄라고 믿었던 계획에 결정적인 균열을 만든 것도 바로 그 그림이다.

수현의 계획을 흔드는 변수는 또 있다. HI-002 지우는 수현이 통제한다고 믿었던 실험의 범위를 넘어 자생적으로 변화하고, 결국 부모를 살해하는 예측 불가능한 결과를 만들어낸다. 그 여파는 수현 자신에게까지 돌아온다. 인간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던 그의 프로그램이 오히려 통제할 수 없는 변수에 의해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여기서 수현의 본질이 드러난다. 약혼녀마저 실험 대상으로 바라보는 그의 사고방식은 타인을 한 사람의 인간이 아니라 자신의 가설을 검증하기 위한 객체로 취급한다. 결국 그의 통제강박과 자기 신격화는 자신이 구축한 세계의 붕괴와 함께 무너진다.

후반부의 혜리는 이러한 수현과 대비되는 인물이다. 감정적인 복수보다 냉철한 관찰과 판단으로 사건 곳곳에 흩어진 단서를 연결하고, 피해자들의 흔적과 수현의 조작을 하나씩 추적한다. 특히 수현의 몰락이 외부의 우연한 응징이 아니라 자신이 만든 완벽한 계획의 허점에서 시작된다는 점이 이 작품의 묘미다.


『처방 PDE』는 단순한 범죄소설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폭력과 정서적 학대, 이른바 가스라이팅이 인간의 판단과 자아를 어떻게 잠식하는지 보여주면서, 동시에 전문 지식과 권력이 윤리적 통제를 잃었을 때 얼마나 위험한 무기가 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사람을 완벽하게 조종할 수 있다고 믿는 순간, 인간은 오히려 자신의 통제 밖에 놓인 변수를 보지 못한다. 수현의 몰락은 바로 그 오만에서 시작된다.


결국 『처방 PDE』가 던지는 가장 서늘한 메시지는 이것인지도 모른다. 타인을 지배하려는 사람이 만든 가장 정교한 덫은 결국 자신을 향할 수 있다. 심리적 지배와 인간 본성의 어두운 심연을 지능적인 플롯으로 풀어낸 심리 스릴러를 찾는 독자라면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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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꽃 1
조정래 지음 / 해냄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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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의 시대를 건너는 무조건적 사랑과 나눔의 온기: 조정래의 『서리꽃 1』




모든 가치가 자본과 효율의 저울 위에서 계량되는 각박한 시대다. 눈부신 기술 발전과 물질적 풍요의 이면에는 타인의 고통에 둔감해진 메마른 개인주의와 황금만능주의가 서늘하게 자리 잡고 있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등 굵직한 대하소설을 통해 우리 민족의 격동하는 근현대사와 거대한 사회적 모순을 치열하게 고발해 온 거장 조정래 작가가 신작 장편소설 『서리꽃』(해냄출판사)을 들고 돌아왔다. 이번 1권에서 작가가 집요하게 파고드는 화두는 거대한 이데올로기가 아닌, 물질만능주의에 질식해가는 우리 시대가 끝내 회복해야 할 가장 원초적이고 순결한 가치인 ‘인간성’, 그리고 ‘무조건적인 사랑과 연대’다.


소설의 중심에는 철학을 공부하고 귀국한 청년 이재이가 있다. 그는 부와 권력만을 지상과제로 삼으며 가난한 이들을 멸시하는 부친의 완고한 가부장적 가치관과 집안의 속물성에 깊은 환멸을 느끼는 인물이다. 그런 그의 가슴속에 꺼지지 않는 불씨로 남아 있는 존재는 대학 시절 문학 동아리 ‘글밭’에서 자신의 시에 시화를 그려주었던 화가 지망생 윤소인이다. 5년 만에 다시 마주한 소인의 현실은 참혹했다. 부친의 사업 파산과 급작스러운 죽음 이후 막대한 빚더미를 떠안은 채, 빛 한 줌 들지 않는 지하 셋방을 전전하며 육체와 영혼이 송두리째 마모되어 있었던 것이다.


재이가 소인을 대하는 태도는 세속의 잣대를 완벽히 뛰어넘는다. 그는 조건과 손익을 따지는 세간의 계산법을 비웃듯, 소인을 향한 ‘일편단심 민들레’ 같은 순수한 연정을 온몸으로 증명한다. 가문의 후계 자리에 불안을 느끼던 형과의 비밀스러운 상속 포기 밀약을 통해 거액의 자금을 마련하고, 이를 통해 소인을 옭아매던 가혹한 부채의 사슬을 과감히 끊어낸다. 그러나 가혹한 지하 생활이 남긴 비극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밭은기침과 함께 찾아온 소인의 치명적인 질환과 대수술, 그리고 이어지는 남도 장흥(가지산 보림사 인근)에서의 요양 생활은 두 사람의 사랑을 한층 더 비장한 실존적 시험대로 몰아넣는다.


재이의 불교에 대한 신뢰는 여타 종교의 이단이나 자본축적의 수단으로 전용이라는 변형에 빗대어 오히려 그 순수함이나 상호 화합과 평등의 원리를 충실히 따르는 신성한 교리로 묘사되며, 타 종교의 절대자적 유일신의 이미지를 탈피한 대중적 신앙으로서 자리하고 있다. 여타 종교 신자들의 반발을 일으킬정도로 표현 되어 있으며 이는 재이의 결말을 암시하는 중요한 화두임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대목이다.


이 지점에서 소설은 단순한 남녀 간의 애틋한 로맨스를 훌쩍 뛰어넘어 숭고한 ‘자기헌신’의 차원으로 승화된다. 재이에게 사랑이란 화려한 말의 유희나 소유욕이 아니다. 그것은 병마와 절망의 늪에 빠진 한 영혼의 아픔을 온전히 제 몫으로 끌어안는 일이며, 추운 겨울밤 홀로 비바람을 맞는 상대의 곁에서 기꺼이 함께 비를 젖어주는 실천이다. 자신의 안락한 기득권을 망설임 없이 내려놓고 병든 연인의 곁을 묵묵히 지키는 재이의 헌신은, 메마른 시대를 살아가는 독자들의 가슴 깊은 곳을 서늘하게 적시며 깊은 감동을 자아낸다.


소인을 향한 헌신과 더불어 1권에서 참으로 보기 드문 감동을 자아내는 또 하나의 결정적 장면은 친구 민태석을 향한 변치 않는 우정과 신뢰, 그리고 자신의 ‘잉여자산’을 아낌없이 나누어주는 나눔의 모습이다. 가족들에게 돈은 군림과 과시의 수단이었지만, 재이에게 물질은 고통받는 생명을 살리고 신뢰하는 벗의 삶을 북돋우는 온기여야 했다. 물질을 제 몸에 축적하는 데 급급한 세상 속에서, 잉여의 몫을 타인에게 조건 없이 흘려보내는 재이의 태도는 진정한 ‘기부’와 ‘연대’의 참모습이 무엇인지를 묵직하게 웅변한다.


영하의 추위 속에서 홀로 피어나 찬란하게 반짝이다가 아침 햇살에 조용히 녹아내리는 ‘서리꽃’처럼, 유한한 삶 속에서 인간이 지켜낼 수 있는 가장 고결한 가치는 무엇인가. 조정래 작가는 이 비극적이면서도 눈부신 서사를 통해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함께 우는 것”이라는 묵직한 전언을 남긴다. 물질의 화려함 속에서 갈수록 빈곤해지는 영혼의 온도를 되찾고 싶은 이들에게, 『서리꽃 1』은 인간의 품격과 사랑의 참된 본질을 일깨우는 맑고 단단한 거울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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