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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꽃 1
조정래 지음 / 해냄 / 2026년 8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로 작성한 리뷰 입니다>
물질의 시대를 건너는 무조건적 사랑과 나눔의 온기: 조정래의 『서리꽃 1』



모든 가치가 자본과 효율의 저울 위에서 계량되는 각박한 시대다. 눈부신 기술 발전과 물질적 풍요의 이면에는 타인의 고통에 둔감해진 메마른 개인주의와 황금만능주의가 서늘하게 자리 잡고 있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등 굵직한 대하소설을 통해 우리 민족의 격동하는 근현대사와 거대한 사회적 모순을 치열하게 고발해 온 거장 조정래 작가가 신작 장편소설 『서리꽃』(해냄출판사)을 들고 돌아왔다. 이번 1권에서 작가가 집요하게 파고드는 화두는 거대한 이데올로기가 아닌, 물질만능주의에 질식해가는 우리 시대가 끝내 회복해야 할 가장 원초적이고 순결한 가치인 ‘인간성’, 그리고 ‘무조건적인 사랑과 연대’다.
소설의 중심에는 철학을 공부하고 귀국한 청년 이재이가 있다. 그는 부와 권력만을 지상과제로 삼으며 가난한 이들을 멸시하는 부친의 완고한 가부장적 가치관과 집안의 속물성에 깊은 환멸을 느끼는 인물이다. 그런 그의 가슴속에 꺼지지 않는 불씨로 남아 있는 존재는 대학 시절 문학 동아리 ‘글밭’에서 자신의 시에 시화를 그려주었던 화가 지망생 윤소인이다. 5년 만에 다시 마주한 소인의 현실은 참혹했다. 부친의 사업 파산과 급작스러운 죽음 이후 막대한 빚더미를 떠안은 채, 빛 한 줌 들지 않는 지하 셋방을 전전하며 육체와 영혼이 송두리째 마모되어 있었던 것이다.
재이가 소인을 대하는 태도는 세속의 잣대를 완벽히 뛰어넘는다. 그는 조건과 손익을 따지는 세간의 계산법을 비웃듯, 소인을 향한 ‘일편단심 민들레’ 같은 순수한 연정을 온몸으로 증명한다. 가문의 후계 자리에 불안을 느끼던 형과의 비밀스러운 상속 포기 밀약을 통해 거액의 자금을 마련하고, 이를 통해 소인을 옭아매던 가혹한 부채의 사슬을 과감히 끊어낸다. 그러나 가혹한 지하 생활이 남긴 비극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밭은기침과 함께 찾아온 소인의 치명적인 질환과 대수술, 그리고 이어지는 남도 장흥(가지산 보림사 인근)에서의 요양 생활은 두 사람의 사랑을 한층 더 비장한 실존적 시험대로 몰아넣는다.
재이의 불교에 대한 신뢰는 여타 종교의 이단이나 자본축적의 수단으로 전용이라는 변형에 빗대어 오히려 그 순수함이나 상호 화합과 평등의 원리를 충실히 따르는 신성한 교리로 묘사되며, 타 종교의 절대자적 유일신의 이미지를 탈피한 대중적 신앙으로서 자리하고 있다. 여타 종교 신자들의 반발을 일으킬정도로 표현 되어 있으며 이는 재이의 결말을 암시하는 중요한 화두임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대목이다.
이 지점에서 소설은 단순한 남녀 간의 애틋한 로맨스를 훌쩍 뛰어넘어 숭고한 ‘자기헌신’의 차원으로 승화된다. 재이에게 사랑이란 화려한 말의 유희나 소유욕이 아니다. 그것은 병마와 절망의 늪에 빠진 한 영혼의 아픔을 온전히 제 몫으로 끌어안는 일이며, 추운 겨울밤 홀로 비바람을 맞는 상대의 곁에서 기꺼이 함께 비를 젖어주는 실천이다. 자신의 안락한 기득권을 망설임 없이 내려놓고 병든 연인의 곁을 묵묵히 지키는 재이의 헌신은, 메마른 시대를 살아가는 독자들의 가슴 깊은 곳을 서늘하게 적시며 깊은 감동을 자아낸다.
소인을 향한 헌신과 더불어 1권에서 참으로 보기 드문 감동을 자아내는 또 하나의 결정적 장면은 친구 민태석을 향한 변치 않는 우정과 신뢰, 그리고 자신의 ‘잉여자산’을 아낌없이 나누어주는 나눔의 모습이다. 가족들에게 돈은 군림과 과시의 수단이었지만, 재이에게 물질은 고통받는 생명을 살리고 신뢰하는 벗의 삶을 북돋우는 온기여야 했다. 물질을 제 몸에 축적하는 데 급급한 세상 속에서, 잉여의 몫을 타인에게 조건 없이 흘려보내는 재이의 태도는 진정한 ‘기부’와 ‘연대’의 참모습이 무엇인지를 묵직하게 웅변한다.
영하의 추위 속에서 홀로 피어나 찬란하게 반짝이다가 아침 햇살에 조용히 녹아내리는 ‘서리꽃’처럼, 유한한 삶 속에서 인간이 지켜낼 수 있는 가장 고결한 가치는 무엇인가. 조정래 작가는 이 비극적이면서도 눈부신 서사를 통해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함께 우는 것”이라는 묵직한 전언을 남긴다. 물질의 화려함 속에서 갈수록 빈곤해지는 영혼의 온도를 되찾고 싶은 이들에게, 『서리꽃 1』은 인간의 품격과 사랑의 참된 본질을 일깨우는 맑고 단단한 거울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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