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전나무, 손수건, 그리고 작은 모자가 있는 숲 ㅣ 열다
로베르트 발저 지음, 자비네 아이켄로트 외 엮음, 박종대 옮김 / 열림원 / 2025년 7월
평점 :
<열림원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 읽고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 입니다>
작품 후기에 로베르트 발저의 숲은 낭만주의와 마찬가지로 무의식의 영역으로 볼수 있다고 하였다. 발저의 많은 숲 텍스트는 대개 여성적이고 매력적인 에로티시즘을 다룬다. "숲은 넓고 살갑고 관능적인 전체로서 우리의 땅을 지배한다"에 나타난 그의 숲은 유혹과 위험이라는 양가 감정을 깔고 있다. 이 책은 신문 문예란에 기고한 글을 비롯해서 발저 생전에 출간되지 않은 글까지 연대순으로 모았다. 이 책의 내용 대부분이 '숲','숲에서', '숲속'과 같은 비슷한 제목들과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다.
발저는 숲을 통해 어떤 기쁨이나 감동을 얻는다는 것은 자격이 요구된다고 말한다. 적어도 직접 숲으로 가서 숲을 귀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느끼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밝고 명랑한 시가 머리속에 가득한 사람만이 숲이라는 아름다운 세계에서 값비싼 혜택을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산불로 인한 참혹함을 잘 묘사하고 있는 면이 우리나라에서 최근 자주 겪게되는 대형산불을 떠올리게 한다.
"이튿날, 초록빛 산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검은 산으로 바뀌었다. 아름다운 숲은 타버렸고, 은밀한 밀회장소, 바위 위의 이끼, 관목과 덤불, 가지에 상큼한 초록 잎을 가득 매단 키 큰 전나무와 떡갈나무, 이 모두가 처참하게 망가졌다."
작가는 초록을 때로는 섬뜩하고 위협적이며 접근자체를 거부하는 독선적인 존재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무섭고, 멋지고, 찬란하다."고 표현하였다. 일상적인 풍경과 사물, 그리고 사소한 감정의 움직임 속에서 철학적 통찰과 문학적 감수성을 끌어올렸다.
발저의 문장은 마치 숲 속의 가벼운 산책처럼 시작되지만, 어느 순간 독자는 자신도 모르게 사색의 깊은 곳에 닿아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자연의 사소한 대상들—전나무, 손수건, 모자 같은 평범한 것들—을 통해 인간 존재의 근원과 고독, 그리고 삶의 덧없음을 은근히 환기한다. 그러나 그 표현은 결코 무겁지 않으며 오히려 경쾌하고 가볍다. 그는 비극적 감정을 유머와 아이러니로 감싸 안으며, 독자에게 삶에 대한 따뜻한 이해와 관용을 일깨운다.
“한 그루의 전나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나는 그것이 내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고요와 평화, 그리고 조용한 자존심.” 이 문장은 자연과 인간이 맺을 수 있는 가장 고요한 관계를 암시하며, 외부의 소란과 단절된 채 자신만의 고요를 지키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성찰하게 만든다. 발저는 자연과의 소통을 통해 자기 성찰을 이끌어내며, 그것을 독자에게 고스란히 전해준다.
또한 이 책은 문학이 가질 수 있는 미학적 가능성을 탐색하는 실험의 장이기도 하다. 그는 문장의 리듬을 조절하고, 때로는 무의미해 보이는 단어의 나열을 통해 의미의 빈틈을 만들며, 독자 스스로 그것을 채워가게 한다. 이는 단순한 서사적 쾌감이 아니라, 독자가 적극적으로 사유에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문학적 장치로 작용한다.
<전나무, 손수건, 그리고 모자가 있는 숲>은 한 편의 에세이이자 시, 산문이며 동시에 철학적 독백이다. 이 책은 독자에게 문학이 줄 수 있는 가장 순수한 위로와 평온을 제공한다. 일상에 지친 이들이 잠시 머물며 사유하고, 자연과 삶의 숨결을 다시금 느낄 수 있는, 조용한 안식처와도 같은 작품이다.
#로베르트발저 #전나무손수건모자 #열림원 #문학서평 #자연과사유 #감성산문 #북유럽카페 #북유럽서평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