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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유령 - 폭력의 시대, 불가능의 글쓰기는 어떻게 가능한가
W. G. 제발트 지음, 린 섀런 슈워츠 엮음, 공진호 옮김 / 아티초크 / 2025년 6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 읽고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 입니다.>
린 섀런 슈워츠가 엮어 펴낸 W.G. 제발트의 <기억의 유령>은 기억과 망각, 그리고 역사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담고 있다. 이 책은 제발트가 1997년부터 사망 직전까지 진행한 주요 인터뷰와 저명한 평론가들의 에세이를 엄선하여 엮은 것으로, 그의 독자적인 문학 세계와 사유의 근원을 조명한다.
제발트는 현대 소설에서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허무는 독특한 '산문 픽션' 형식을 개척했다. 그의 글 속에는 소설화된 회고록, 기행문, 자연 및 인공 사물에 대한 관찰, 회화, 건축 등 다양한 요소들이 혼재되어 있다. 길고 유려하며 멜랑콜리한 문체와 함께, 텍스트 중간에 삽입된 우울한 흑백 사진들은 죽은 사람들과 사라진 장소들을 상기시키며 독자에게 깊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픽션이라는 사실을 잊게 만든다. 이러한 사진들은 제발트가 그곳을 다녀갔다는 증거이자, 잃어버린 기억과 존재를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 책이 독자에게 전하는 핵심 메시지는 '기억하는 일의 도덕적, 정치적 중요성'이다. 제발트는 나치즘의 비극 이후 독일 사회에 만연했던 '집단 기억 상실'과 '모의된 침묵'을 비판하며, 과거의 참화를 기억하는 것이 개인과 사회의 윤리적 책무임을 역설한다. 역사적 폭력의 끔찍함을 겪은 이들이 가해자로서의 경험이나 그로 인한 대가로서의 피해경험을 말로 표현하기 어려워하며 생겨난 '모의된 침묵'은 강력한 금기가 되어 기억의 왜곡과 망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제발트는 이러한 침묵을 깨고 홀로코스트와 같은 역사적 비극을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는 글쓰기를 통해, 기억의 관리인으로서 역사의 희생자들이 잊히지 않도록 헌신하는 작가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문학의 효용이 "기억을 돕고 어떤 일은 인과의 논리로 설명되지 않음을 가르쳐주는 것"이라고 말하며, 독자로 하여금 역사의 복잡성과 인간 경험의 불가해함을 성찰하도록 한다. 인생의 방대한 부분이 망각으로 사라지지만 기억에 남는 부분의 밀도는 높아져 때로는 정서적인 짐, 즉 트라우마가 된다고 말한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과거의 기억을 어떻게 보존하고 그 속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지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책 부록에 소개 된 '글쓰기에 관한 제발트 어록'은 제발트가 독특한 문체의 산문을 쓸 수 있었던 구체적인 방법들이 소개 되어있다. 글을 쓰는 목적에 대해 '이제까지 보이지 않던 것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명확하게 제시해두었다, 이는 미켈란젤로가 조각을 '돌 속에 이미 존재하는 형상을 나타내는것'이라고 표현 했던것과 일맥 상통하는 이야기다. 사물을 관찰함에 세심한 관심과 집중을 통해 표상의 이면에 감추어진 아름다움을 끊임 없이 추구하는 과정이 글쓰기라는 점은 오늘날 글을 쓰고 읽는 모든이들이 귀담아 들어둘 명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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