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여행자의 로망 백서
박사.이명석 지음 / 북하우스 / 2005년 7월
평점 :
절판
나는 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평범한 일상에서도 충분히 소소한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데, 지금 여기와 다른 공간을 갈망한다는 것이 마치 일상의 패배처럼 느껴지기도 했으며, 가만히 앉아 책읽고 영화보는 것도 충분히 재미있었으니까.
이랬던 내가 왜 지난 밤에도 달콤한 잠을 쪼개 여행지에 대한 꿈을 꾸는지. 거슬러 올라가면 예과 때 과외해서 모은 돈으로 남들 다 가는 유럽 배낭여행을 한게 실수였다. 한번 가봤으면 됐다 싶었고 거기서 보고 들은 것들은 서서히 잊혀졌지만, 좀 심심하고 볼건 별로 없었던 독일의 공기, 여기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지구 반대편 나라의 공기가 5년 넘도록 잊혀지지 않았다.
문제는 공기였다.
짧은 인턴 휴가 때 굳이 예전에 가봤던 먼 나라로 간 까닭은 그 공기가 그리웠기 때문이다. 차갑고, 적당히만 가볍고, 담백하고, 매끄러운 그 공기의 냄새와 맛. 우리나라에는 없는 분자가 몇개 추가된 느낌이 그리웠기 때문이다. 너그러운 치프 선생님이 휴가를 10일 모두 주신 덕분에 그리움이 증폭되는 부작용만 생겼다. 아침에 잠이 깨지 않아 당직실 창문을 열 때, 한밤중 응급실에 술취한 환자들이 밀려 들어올 때, 수술방 세면대에서 스프린트를 담글 때, 문득 북해의 소금을 머금은 함부르크의 공기가 내 몸을 스쳐갔다. 하지만 아주 잠깐. 매번 그걸로 끝이었다. 마치 aura만 있고 attack은 없을 때 더 불안하다고 했던 어느 eplilepsy 환자처럼, 나는 여행을 다녀온 뒤로 자주 불안해졌다.
특별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도 아니고, 순차적인 여행기도 아니라서 산만한 느낌이 있다. 이 사람들처럼 여행을 많이 해본 것도 아니고 무작정 떠나는 것보다는 오랜 시간 계획해서 여행하는 것을 좋아하기에 각 '로망'에 대한 세부적인 내용을 모두 공감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책은 공감을 바라지도 않는다. 가볍게 넘길 수 있는 페이지마다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기에 읽는 내내 그동안 스쳐간 곳에 대해 떠올리고, 앞으로 가고 싶은 곳에 대해 상상하면서 즐거웠다.
이 책은 언제든지 여행할 수 있는 3%를 위한 책이 아니다. 나처럼 떠나고 싶지만 바로 떠나지 못하는 평범한 97%를 위한 책이다. 97%의 가슴에 문득 스치는 여행에 대한 그리움과 갈망. 좋았던 추억으로 다시는 돌아가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알 수 없는 불안감. 떠나고 싶지만 떠나지 못할 때가 더 많은 내 미래에 대한 불안감. 내 여행의 로망은 그리움을 넘어선 불안감이다.
주의 : 여행지에서 읽을만한 책이 아님! 집안에서 혹은 퇴근길에 여행하고 싶다고 강렬히 바라며 읽을만한 책!!! 특히 낯 모를 곳에 대한 향수로 거의 울 지경의 사람의 경우에는 별다섯개로도 모자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