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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 - 세상을 뒤바꾼 위대한 심리실험 10장면
로렌 슬레이터 지음, 조증열 옮김 / 에코의서재 / 2005년 7월
평점 :
이 책을 처음 만나게 된 곳은 작년 겨울 자학실 친구의 책꽂이. 또 다른 친구가 재미있다며 추천했단다. 나도 읽어볼까 해서 국시 끝나고 이 책을 주문했는데 앞에 몇장 읽고 그냥 책꽂이에서 방치해 두었다.
'세상을 뒤바꾼 위대한 심리 실험 10장면'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흥미진진한 실험으로 가득차 있지만, 아쉽게도 제목에 들어가는 스키너에 대한 이야기가 다른 아홉 장면에 비해 압도적으로 재미없다. 그래서 재미있는 심리실험에 대해 맛볼 기회를 놓친 채 책을 덮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 물론 책의 재미를 보려면 초반에 참고 읽어야 한다는 창명이 말처럼, 그때 참고 읽었어야 하나 싶지만. 어쨌든 그 다음부터는 너무 재미있고 놀라워서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있게 추천할 수 있는 책이다. 뭐랄까. 물론 이 책도 편견에 치우친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우리가 얼마나 스스로에게 조종 당하며 사는지, 무서운 편견에 치우쳐 사는지 일깨워주기에, 다수에게 '읽어보라'고 권하기 보다는 내 주위 소수에게 '읽을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픈 책.
기억의 조작
이 책을 읽는 내내 흥미롭고 두려웠던 것은 만약에 내가 이런 실험의 피실험자라면 어땠을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기억이 충분히 조작되고 이식될 수 있음을 증명한 '쇼핑몰에서 길을 잃다'라는 실험을 보면, 쇼핑몰에서 길을 잃은 적 없는 피실험자들에게 친척들이 "너 어렸을 때 쇼핑몰에서 엄마 잃어버린 채 한참 헤맸잖아." 라고 얘기하면 처음에 갸우뚱 하던 피실험자들이 마침내 굉장히 상세하게 20여년 전의 상황을 서술한다는 것이다. 길을 헤매고 있을 때 손을 내밀던 할아버지, 백화점 바닥의 촉감 같은 것을 놀랍도록 자세하게 말한다는 것. 얼핏 읽으면 우습지만 나도 그런 함정에 빠졌을 것 같아서, 내 기억이 조작되었을 것만 같고, 나 역시 다른 사람을 함정에 빠뜨린 적도 있을 것 같다. 내가 사는 방식을 보건데 두번째 경우가 더 많을 것 같다. 그리고 앞으로도.
잠시 사족. 내 기억을 가장 많이 조작하고 함정에 가장 많이 빠뜨리는 인물은 바로 우리 엄마로 6개월 전부터 당신의 MP3 플레이어를 내가 분명히 가져갔던게 기억난다고 주장하셔서 내가 새걸 사드렸으나 얼마 전 엄마 핸드백에서 발견되었다~ 흑. 물론 엄마는 그 사실을 나에게 말씀하지 않으셨고 동생에 의해 발각되었다. 무서운 것은 그동안 나 역시 내가 병원에 가져오면서 버스에서 듣다가 두고 내린 것 같은 기억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아아 무서운 우리 엄마!!! 이제까지 내가 잃어버렸다고 주장당한 물건들은 아마 엄마의 장롱이나 서랍 쓰지않는 핸드백 그 어딘가에 있을거야~! (엄마 이 글 좀 꼭 봐주세요^^)
물론 이런 기억의 조작을 방지하는 것은 기록이다.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는 말처럼. 그래서 나는 어느 순간부터 나에게 일어났던 일을 기록하는 일에 집착했고 지난 5년간 500페이지에 달하는 글을 썼다. 물론 이 책에서처럼 억울한 누명을 쓰는 사람들도 있지만, 지난 날의 기록을 볼 때, 기억은 어느 정도 조작되는게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이미 멀어져 버린 사람들을 좋아했던 느낌, 나쁜 결과를 내 노력의 부족으로 합리화했는데 실은 열심히 살았다는 것에 대한 인식...마치 마법거울이 "백설공주님이 세상에서 제일 예쁘세요"라고 말하는 목소리처럼, 내 삶이 행복했다고 믿는 나에게 던지는 내 자신의 서늘한 목소리를 느낀다.
기억을 조작하는 것, 혹은 기억을 보존하는 것, 살인사건의 목격자 중 한명이 되어도 신고하지 않는 것, 단 한명의 목격자일 경우에 적극적으로 돕는 것, 모두가 결국 사는데 필요해서 그러나봐.
정신의학의 실패?
3월부터 정신과 의사로 살아갈 사람으로서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정신의학의 진단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한 데이비드 로젠한의 실험이다. 응급실에서 틈이 나 그 부분을 읽는데, 겉으로 보는 신경학적 검사로도 너무나 저명한 중풍 환자가 한명 와서 신경과를 콜하고나니 신경과 선생님들이 내려와 CT를 보고 있는데 그게 왜그리 부럽던지!
아무 것도 모르고 정신과 의사 하겠다 했던 때와 달리 본과 4학년때 정신과 의사의 꿈을 굳힌 것은 정신과가 애매모호하다고 한 다른 사람들과 달리, 나에게는 정신과 역시 일정한 병리가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흥미가 있고 소질이 있다고 믿었고, 내 꿈에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상황 때문이었을까. 내가 전문의가 되어도 정상인을 병동에 입원시켜 놓으면 구분하지 못할까? 결국 정신과 의사들이 패배한 사례를 읽으며 열정만 있고 아무 것도 모르는 10년 전으로 되돌아간 느낌이 들었다. 멍해졌다. 어차피 그럴 것 같다. 그런 멍해진 느낌은 앞으로 공부하면서 환자를 보면서 수차례 겪을 것이다.
나의 길을 믿는다. 아직 혈관의 문제를 멋지게 보여주는 MRI같은 도구가 없어서 그렇지 정신병의 기전도 분명히 밝혀질거고, 바빈스키나 브로카처럼 현상과 두뇌의 일부를 지도처럼 밝혀내는 위인들이 나타날거라 믿는다. (물론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정신과 의사의 올바른 자세라고 할 수 있겠군.) 정신과 환자들은 그냥 좀 이상한 사람들이 아니라 도와야 할 사람들이라고 믿는다.
원하던 과에 합격하면 한 일주일 좋다가 그 다음부터는 걱정 투성이라더니, 사실 나도 앞으로 도대체 어떻게 해야하나 걱정이 많았는데, 태클에 의해 내 결심이 강해지는걸 보면, 이런 시기에 이 책을 읽을 수 있었다는게 참으로 감사하다.
조종 당하기 싫어!
이 책에 나오는 놀라운 결과에 '내가 이럴 수 있단 말인가'할테지만 그건 분명히 다수의 이야기이다. 마음의 원리대로 사는 다수가 되어, 불합리한 권위에 복종도 해보고 기억도 조작당해보고 그렇게 살아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거다. 어차피 '정상'이란건 '평균'의 개념을 포함하니까. 하지만 이 책을 읽을수록 분명히 존재했던 위대한 소수(어쩌면 그리 소수는 아니다. 25~35%정도니까)가 되고싶다는 욕심이 생긴다. 어떻게 하면 불합리한 내 자신에게 조종당하지 않을 것인가. 나와 남을 고통에 이르지 않게 하는 진짜 인간이 될 수 있을까. 내 고유의 의지대로 살 수 있을까. 또 고민이 생기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