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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사이코 - 상 ㅣ 밀리언셀러 클럽 15
브렛 이스턴 엘리스 지음, 이옥진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8월
평점 :
새천년을 맞으며 온 세계 들썩였다 좀 가라앉았을 금세기 초.
졸업 준비에 여념이 없어 찌들고 지쳐버린 스터디 친구들과
너나 할 것 없이 오늘은 좀 쉬자, 하는 마음을 먹었으나
극히 소심하게도 멀리 가지 못하고 학교 앞 분식집에서 저녁을 때우고
술은 그렇고 그냥 영화나 한번 보자, 해서 들어갔던 비디오 방.
아무런 정보도 없이 그냥 골라서 (우린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쉬는 것이 중요했기에)
틀었던 영화가 바로 <아메리칸 사이코>였다.
지금은 수퍼 스타가 되어 버렸지만 당시에는 코 참 높다, 싶은 잘생긴 사이코가 등장하는..
원래 원작이 있는 영화는 원작을 먼저 읽기 전에는 잘 보지 않지만
당시에는 원작이 있는 것 조차 몰랐으니
같이 봤던 친구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황당한 사이코 짓에 웃으며 봤던 기억이 난다..
판금 조치까지 겪으며 우여 곡절 끝에 출간된 이 책을 드디어 읽었다.
이제는 잘 기억도 나지 않는 영화의 느낌은 뒤로 하더라도
이 텍스트는 겉보기와 달리 매우 복잡하게 읽힌다.
언뜻 보면 엽기적인 묘사로 가득한 희안한 소설이지만
이 책에서 작가가 늘어놓은 각종 서술은 실제로는 매우 계산적으로 배치한 장치들이며
점점 미쳐가는 주인공의 심리 상태를 구구절절히 묘사한 것이 아닌,
꽤 까다로운 방법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끝없이 튀어 나오는 수백 가지의 명품 브랜드와 가격과 드레스 코드.
돈많고 학벌좋고 잘 나가는 뉴욕 속물들의 식당과 음식에 대한 과시적 집착.
그 가운데 공허한 연애질.
과시적 소비와 대칭점에 있는 하류층에 대한 멸시와 조소.
날뛰는 듯한 섹스 행각.
그야말로 사이코적이고 엽기스러운 살인과 폭력.
뜬금없이 튀어나오는 대중 음악에 대한 취향과 분석 등등..
스토리와 상관없이 튀어나오며 이리저리 배치된 이 다양한 텍스트들은 끊임없이 변주되며
미처 따라가기 버거울 정도이다.
그것은 점점 정신분열증이 심해지는 주인공의 상태가 그러하기에
일반적인 정신 상태의 독자라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저러한 장치들의 공통점인
미국 사회 혹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라고 원하며 동경하는 저러한 소비들이
주인공 베이트먼을 사이코로 만들어 버리는 피폐함의 근원임을 암시하고 있음을 짐작할 뿐이다.
뚜렷한 결말이 없이 어물쩡 넘어가며
그 모든 엽기 행각들이 과연 실제로 벌어진 일인지 아니면
망가진 주인공의 심리가 단순히 상상하고 있는 일인지 조차 불분명해 버린 후,
독자들에게 남는 것은 여러 가지 느낌일 것이다.
허탈하고 황당한 공허일 수도 있고 엽기 코드를 웃어 넘기는 유머와 여유일 수도 있으며,
지독한 묘사에 대한 짜증과 분노일 수도 있다.
모든 책이 그렇듯 이 책에 대한 해석은 온전히 독자들의 몫으로 넘어간다.
나 자신의 평가만 간략하게 적어 본다면
이 책의 주인공은
많고 많은 사이코 중에서도 내가 가장 싫어하는 부류의 사이코이며 극단적으로 혐오스러운데,
그를 너무도 자세히 묘사한 이 책은,
역설적이지만 그러한 이유 때문에 조금더 끌리는 이율배반적인 느낌이라고 할 수 있을 듯.
묘한 경험을 주는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