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자형 도시의 발전과 방향(Poar 2003 08)

1950년대 냉전의 시대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도시계획이 확연하게 구분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추구하는 도시형태는 비록 사상이나 이상의 차이로 인해 도시 내부에서 만들어지는 구성물은 다를지 모르지만 도시형태는 별다른 차별성이 보이고 있지 않으며 모두 격자형 패턴을 고수하였다. 먼저, 사회주의 국가에서 농촌과 도시를 계획하는데 가장 기본적인 골격은 소생활권(자족적 생활공간)을 기본으로 주택, 식당, 위락, 탁아소, 유치원, 학교, 의료시설, 판매시설 및 기타서비스 기능을 집합시키고 공동집단생활을 원칙으로 농장과의 접근이 용이하도록 하는 한편, 주거와의 사이에 완충녹지대를 배치하고 있다. 또한, 교육시설의 경우에 행정시설, 병원시설 등과 근접시켜서 배치하고 있는데, 이것은 교육과 노동이 병행하여야 한다는 엥겔스의 원칙에 기초하고 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1900년대 영국에서 제시된 버킹햄의 빅토리아타운계획과 하워드의 전원도시계획과 유사한 구성을 가지고 있으며, 마르크스, 엥겔스, 밀리우틴 등의 이론에 부합되어서 가족들의 집단화, 공동화를 중심으로 계획하고자 했다는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자본주의 국가들은 보편적으로 토지이용계획에 의거한 용도지정을 통해서 토지의 가치와 건축밀도가 결정된다. 그러나, 격자형 구조가 균등하게 슈퍼블럭(약 1mile)을 구획해서 생활권을 구분시키는 것은 사회주의의 도시계획개념과 대단히 유사하다. 사회주의 도시계획방식인 신주거단위(NUS, New Unit of Settlement)와 비교해보면 이들은 직주 근접 원칙을 우선으로 하기 때문에 거주지역은 그들 주위에 있는 녹지와 커뮤니티센터와 동일한 거리상에 배치하고 있다. 이러한 거리개념은 인간행태실험을 통해서 검증된 평균시간대에 맞춰 규정된 것이었으며, 이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그들이 속한 커뮤니티, 커뮤니티와 또 다른 커뮤니티간에 가치를 균등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이러한 배치개념은 과거 1800년대 제시된 이상도시이론들을 따르고 있었다. 이에 반해서, 자본주의도시들은 용도에 따라서 건축물의 높이와 넓이가 다르며, 부속 규정들이 적용되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레벨조정이 이루어졌다. 이와 같이 양 체제가 모두 격자패턴을 사용한 궁극적인 이유는 커뮤니티(생활권)를 나누기 쉽고, 각각의 공공시설간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으며, 획지가 균등하게 분배되기 때문에 효율적으로 용도를 조절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그림 15>.
  냉전이후, 생태경제학이 도입되고 환경에 대한 중요성이 인식되면서, 자연의 경제적 이용 및 환경공생을 위한 지속가능(Sustainable)한 개발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과거의 도시들은 성장은 하되 자연과 격리되어 있었지만 앞으로의 도시는 자연의 순환법칙에 저촉되지 않는 순환형 시스템을 제시하고 있으며, 즉, 오픈스페이스 및 보행공간 등의 인간적 요소와 자연지형의 복원 및 도시내 녹지시스템구축 등의 자연적 요소를 하나의 통합된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이들의 초기 도시형태는 자연적인 이미지를 부각시킨 유기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었지만, 최근의 계획들을 보면 격자형 패턴에 의한 기능적이고 경제적인 면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는 도시하부구조(지하)와 상부구조(지상)를 연결하고, 자연으로부터 얻은 우수를 공급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시스템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격자형 구조를 가진 도시형태는 앞으로의 미래형 도시에도 지속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인간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할 수 있다.

한양대 동아시아 건축역사 연구실(한동수, 김영재, 도윤수, 장재혁, 정수인, 황보영희, 신혜원, 최지영, 박진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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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시아의 식민도시의 발생과 확산(Poar(건축인), 2003 08)


일본은 전국시대(12C말)와 실정시대에, 봉건영주의 세력이 강력해지고, 교통과 상공업이 발전하면서 봉건영주가 살고 있는 성하정(城下町,정치도시), 宿場町(여관도시), 港田(해운도시)등이 건설된다. 이들 상업도시들은 어느 정도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봉건제도가 너무 강력해서 곧 해체되었다. 城下町의 발전은 정치, 군사도시로서의 소비의 중심지가 되며, 일본의 북해도, 중국과 한국에 건설된 식민도시와 일본영단의 설립후, 일본, 중국, 한국 등지에 소규모로 건설된 영단주택단지에 영향을 준다.
  일본의 식민도시의 시작은 삿포로(札幌, Sapporo)로서 도시건설은 1869년에 착수되었으며, 일본의 식민지경영의 출발점이 되었다. 에도막부 시대의 말기에 점령된 이 지역은 러시아의 남하정책으로 인해 심각한 국방문제가 대두되고 이를 이어 받은 명치정부가 북해도에 1869년에 개척식민도시를 건설했는데, 총 80명정도의 외국인이 참여한 국제적인 플랜이었다. 특히, 이들 기술자들은 미국인 호레스 프로를 비롯하여, 미국인이 대부분이었으며, 미국의 Los Angeles, Denver, Hoston과 같은 개척도시 건설경험에서 얻어진 도시기술이 북해도개척의 기초가 된다. 무한한 격자형 구조가 창을 짜맞춘 것 같이 나열시켰으며, 이러한 기술은 오비히로(帶廣, Obihiro)을 비롯한 다른 도시들의 건설에도 적용되었다. 1878년에 E.S. Moss는 삿포르를 방문해, 시가지를 보면서, 미국의 서부시가지를 보는 것과 같다고 도시의 인상을 피력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격자형 구조는 외래기술이 아니라는 가설이 제기되고 있는데, 이는 건설이전에 삿포르시에 대한 언급에서 미국인 기사들이 들어오기 이전에 계획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일본의 독자식민도시였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하지만, 실제로 시공은 미국인기술자들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이루어 진 것은 확실하며, 명치정부가 미국인 기사 케푸론에 부과한 직무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섬 전체의 形勢 및 地質·鑛山 等을 측량·검사하고,  ②도로, 강과 도랑등을 소통시키고, 군과 통단위의 마을 도시를 구획해 각처의 편리를 도모하며,  ③나무가꾸기 및 가축기르기, 채광·수렵 방법을 연구하며, ④그것들 사업 비용을 계산하여 성공가능성을 예측 결정하고, ⑤ 이 모든 사항은 일본정부와 의논해서 시행할 것이며, ⑥ 항상 개척장관을 보좌해 사무를 하며, 식민지 전체와 그 경영 프로세서 전체를 하나의 구축물로서 강력하게 조직화시키고자 하는 것이 고용외국인 1호인 케프론 이하의 미국인들의 역할이 이었다. 또한, 도시계획에서 중요한 위치인 인프라 스트럭처의 건설도, 이들 기술자들에 의해서 맡겨졌다.
  그렇지만, 삿포로 도시계획이 고용외국인들에 의해서 건설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언급했던 바와 같이 부정설이 지배적이다. 외국인 설계설이 否定되는 최대의 논거는 단순한 편년상의 사실이다. 문헌을 보면 삿포로의 실제 건설은  1869(明治2)년초 겨울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고용 외국인 등용은 1871(明治4)년 이후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약간의 왜곡이 있을 수 있지만, 최종적으로는 1871년 5월에 측량에 의해 계획이 확정된 때의『札幌 區劃圖』에 계획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측량 및 토목과 관련된 주임기사(A·G·Warfield)는 같은 해 같은 달에 고용되지만, 일본에 와서 북해도 시찰한 것은 같은 해 8월이기 때문에 관여할 수 있는 가능성이 대부분 없다는 것이다. 삿포로의 도시건설을 둘러싼 일본인과 외국인의 전후관계의 편년 작업은 이렇게 해서 보면, 사실일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미국 서부의 정(町)"를 방불케 하는 경관이, 근세 이래의 측량 계획기술의 역사적 연속성 위에 성립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외국인 기술자가 초기의 삿포로를 계획하는데 역할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며, 역사적으로도 와필드(Warfield)는 삿포로본도(現國道 36호)를 결정해 도시가로와 외부를 연결하는 중요한 가로계획를 수행한 것은 증명된 사실이다. 또한, 공작소의 설치, 농학교 농원 용지의 설정, 철도선의 결정 등도 외국인기술로 만들어 졌다. 외국인기술자가 도시상가의 골격을 주기보다는 이미 결정된 계획에 대해서, 용도계획과 교통계획을 검토하고, 서양풍의 의장을 세우는 투시도적 비례 만을  관여했다고 한다. 이러한 측면은 개척부 본청부계획에서의 기하학적인 앞뜰 구성과 획지분할체계가 일본인들의 방식을 고수하고 있었는데, 이는 건설이 시작되면서 외국인기술자(Wafield)들이 일본인의 작성계획을 이후에 바로잡아 준 것이 아닌가 보여진다.
앞에서 언급된 일본인들에 의한 독자적인 도시계획이었다는 가설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도시로 三本木原이라는 에도막부 말에 건설된 도시가 있는데, 이 도시는 19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한촌이었다. 이 곳에 개척을 위해 계획한 것은 新渡戶 傳(1793-1871)이었으며, 1855(安政2)해에 새로운 농지개발은 시가지개발을 포함하는 장대한 구상에 의해서 1859(安政6)년 보다 확장된 타운형태로 개발된다. 시가범위를 12町을 四方(한 쪽 약1.4km의 正方形)으로 하여, 1町= 60間의 가구를 정연히 늘어놓은 격자패턴으로 계획되었다. 가로(街路)의 너비는 8間, 6間으로 통일성있게 배치하였으며, 시가(市街)에는 수로가 설치되어 있으며, 큰 길에는 2층 건물들로 건축되었다. 1861년에 시가지와 개간지의 분할한 후 입주가 시작되었다. 이 도시도 미국서부 개척도시를 연상케하며, 일본의 경도(京都, Kyoto, 平安京)와 같은 고대 도성들의 격자패턴을 따르고 있다. 시가주위에는 큰 둑을 두르고, 방풍림을 심었다. 시가 북부의 큰길은 약간 굴곡시키고 있는데, 이는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전술적 방편이었다.  계획도시로서의 이러한 三本木原의 특징를 염두에 두고 1871(메이지 4년(대화))년에 건설된 삿포로으로 되돌아가 보면, 유사한 공통점이나 차이가 나타난다.  실제적으로 삿포로의 경우, 가로폭은 압도적으로 넓지만, 가구는 방 1町(= 60間)으로 三本木原과 같으며, 1町의 가구규모는 일본도시사에 빈번한 숫자이다. 三本木原과 동시기의 예와 함께 1859(安政6)년에 계획되었던 개항장인 요코하마(橫浜, Yokohama)의 일본인거주구가 이러한 규모로 선택되면서, 다른 근세의 도시계획에 60間이라고 하는 가구단위가 자주 적용되게 된다. 강호(江戶, 동경의 옛이름, Edo)에서도 정인지(町人地)가 60間정도로 계획되었다. 이러한 패턴은 1615년 계획된 사카이(堺, Sakai)에서도 보여지는데, 가로간의 폭이 60間이었다(가구는 60間×40間)으로 정확하게 계획되었다<그림 11>. 
  같은 1間이라도, 1間를 6尺 5寸로 보는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에는 1町은 118m이며, 江戶(동경), 三本木原의 가로와 일치한다. 반면, 1間을 6尺이라고 하는 경우에 1町은 109m이며, 도시들은 橫浜(요코하마), 札幌(삿포로) 등이 있으며, 또한, 치수적으로는 일치하지는 않지만, 모듈대비로 볼 때는 교토(平安京)의 40丈(=121m)과도 일치하며, 동일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삿포로에 계획된 치수법은 서양의 미터법이 아니며, 고대도성들의 치수법을 참조했으며, 고대 시가지 계획에 이용된 1町에 60間을 기본으로 하는 격자패턴을 이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삿포로는 너비 58間의 광로계획이 특징인데, 광로를 경계로 관용지구와 주택지로 구분되고 있다. 이는 근세 성하정의 계획개념이 내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본청부지는 동서 3가구, 남북 5가구를 점유하고 있으며, 일본의 관청건축통념과는 지나치게 크게 계획되었는데, 본청을 성곽, 관용지구를 무가지(武家地)로하고, 정가(町家)지구를 정인지(町人地)로 간주하였다. 게다가 학교, 병원, 관청건물들이 길을 따라 나란히 배치했는데 이는 마치 고대도성의 주작대로를 연상시키고 있었다.
요약하면, 삿포르의 계획은 일본인들에게 내재되어 있었던 고대도성의 계획패턴과 서양의 근대적 도시계획과 접목시켰으며, 세부적으로 그들이 자주 사용되었던 치수법을 근거로 한 격자형 도시를 만들어 냈으며, 이러한 도시패턴은 한국, 중국의 식민도시들에 적용되며, 식민도시들은 일본에서 할 수 없었던 새로운 서구적 계획개념들을 반영하였다.
중국의 경우, 근대도시는 일제와 서구열강(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 등)에 의한 일방적인 도시계획과 국민당 정부에 의해 계획된 도시계획으로 나누어 질 수 있다. 먼저, 일제와 서구열강에 의한 도시들 중에서 일제에 의해 만주국에 건설한 식민도시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일제는 러시아의 식민경영을 답습하여, 만주철도를 경유하는 15개 도시들에 대한 계획을 입안했다. 기존에 건설된 대련(大連, 뤼다(旅大, Luda))을 제외한 만철부속지의 3가지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는데, 기존 비교적 큰 도시근교에 건설된 부속지로 봉천(奉天, 선양(瀋陽,Shenyang), 장춘(長春,Changchun)에서는 구시가와 만철부속지간의 지역에 상부지(商埠地)가 건설되었다.  두번째로는 한촌이나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미개척지에 건설된 부속지로 농산물의 집산지로 성장한 도시로서 그 예로는 개원(開原), 사평가(四平街,Siping), 공주령(公主嶺) 등을 들 수 있다. 마지막으로 공광업도시의 성격을 지닌 부속지를 목적으로 건설되었는데, 안산, 무순(撫順,Fushun), 본계호(本溪湖)가 그것이다. 이들 도시들의 특징은 격자형 도로체계를 따르고 있으며, 역을 중심으로 방사형의 간선도로가 만들어진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가로패턴을 도입한 것은 물자의 운반을 위한 경제적 성격, 전시에 대비한 빠른 물자수송과 건설비용을 줄이는 것이 큰 요인이었다. 그리고, 일본인들을 원할하게 수용하기 위한 기능도 포함된 이들 식민도시들은 기존도시들은 점차 쇠퇴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 중에서 장춘은 지리적 위치, 철도, 구정치세력과의 연계성으로 인해서 1932년 만주국의 수도로 선정되었으며, 주택부족을 해결하기 위해서 일본주택영단보다 1년 앞서 만주방산을 설립하고, 자재절약, 경제성을 목적으로한 주택규격화를 목표로, 택지분할과 마스터플랜에 의해서 40-70㎡의 일계규격형과 20-55㎡의 만계규격형주택들을 일률적으로 배치하였다<그림 12, 그림 13>.
국민당정권이 주도한 중국의 근대도시건설에 영향을 준 것은 인구증가, 외세의 침입과 선진 자본주의 도시사상의 유입, 교통수단 변화 등으로 구분해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철도개통이 종래의 성곽도시의 내부에는 큰 변화를 주지는 못하였으며, 이는 철도가 성곽을 피하여 통과하고, 성밖에 역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부근에 새로운 신시가지가 발달될 수 있는 계기가 되며, 구도시와 신도시간에 2가지 형태로 통합화가 이루어진다. 합비(合肥, Hefei), 북경(北京, Beijing) 등과 같이 신시가지가 구시가지를 중심으로 방사형형태로 발전하는 형태와 낙양(落陽)등과 같이 신시가지가 구시가지를 향해서 발전하는 형태로 도시가 확장되게 된다.
 특히 남경은 1927년 국민당의 수도가 되면서, 중앙정치구, 시행정치구, 상업구, 공업구, 주거구, 문화구로 크게 구분했으며, 수도계획은 중앙정치구에 중점을 두었는데, 중산문밖 자금산 남쪽에 계획되었는데, 황제의 묘를 등지고, 신성함과 권위성을 높이기 위함이었으며, 기존 도시와 분리된 것은 과거의 것은 버리고, 새것을 받아들이자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또한, 군사상 이곳은 방어에 유리하고, 군용기계창, 비행장 등이 남쪽에 있고, 병영이 가까우니 군대파견이 빠르다는 장점이 있었다. 시청사를 중심으로 4개의 중국식 정원이 배치되어 있으며, 외곽은 큰 숲으로 들러있으며, 길은 방사형으로 중심을 강조하고, 정원에는 손문의 중산릉의 중국후기건축양식을 본뜬 네오-명왕조식 콘크리트 건물군등으로 구성되었다. 또한, 손문의 장례식을 위해 건설된 50m 폭의 중국식 최초의 서양가도에는 양쪽면에 수목들이 다양한 형태로 일렬로 나열되어 있었다.
한국의 경우, 격자도시 형태는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 도성을 건설하는 주개념이 되지 못하지만, 부분적으로 읍성계획에서 응용되어 사용되었다. 대한제국과 국권침탈기에 일본인에 의한 식민도시(용산(1922), 진해, 군산 등)들과 영단주택단지들(문래정, 대방정, 상도정(1941) 등)이 격자형태로 개발되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그림 14>. 일제강점기시대의 도시들은 철도를 따라서 일제의 전쟁군수물자운송와 자국의 물건을 팔기 위한 소비시장개척, 한국내자원수탈, 자국민보호 등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철도주변에 있는 한촌에 일본인들을 거주시키기 위해서 신도시들을 건설하였는데, 이들은 기존 지방전통도시들을 쇠퇴시키는 계기를 만든다. 이러한 식민정책들은 만주국에 보다 발전된 형태로 응용된다.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들은 손정목교수의『일제강점기 도시화과정연구』, 『일제강점기 도시화과정연구』, 『도시변화과정연구:개항장.개시장.조계.거류지』, 『일제강점기 도시계획연구』 같은 문헌들을 참고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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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jwow 2004-01-31 0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도미술
인도의 지리적 특성을 언급하자면, 커다란 강들에 의해 문화적으로 인더스강 유역, 갠지스강유역, 데칸고원, 남인도 등으로 나뉜다. 서인도에는 인더스 강과 그 지류가 흐르는 펀잡이라고 불리는 평원이 있다. 인더스 강하류는 신드지방이다. 이곳은 지금은 사막이만 기원전 2000 년에서 1000년까지만 해도 무성한 정글이었다고 한다. 인도지역은 기후에 따라서 종족적 지적특성에 영향을 미쳤는데, 열대지역에서는 자연이 인간을 지배하기 때문에 거대하고 무자비한 힘에 신성을 부여했으며, 온대지역에서는 사람이 환경을 지배하는 일신교가 발달하였다고 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인도문화를 서양중심적이고, 비호적인 편견을 갖고 이 책을 쓰지 않았다. 그는 역사서술에서 너무 개인적 감상과 국수적인 글을 써온 사람들에게 일침을 가하고 있다. 그는 건축,회화, 조각과 같은 큰 덩어리와 공예, 직물, 도자와 같은 세부적인 항목으로 구분해서 서술하고 있다. 또한, 인도의 역사와 미술에 밀접한 지형, 기후, 민족, 역사적 사건들을 객관적인 시각에서 바라봄으로서 다소 난해한 면도 있는 인도미술을 쉽게 이해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인도미술은 그리스 로마의 미술이나 신화에서 나오는 합리성과 다르며, 그것은 사실적이기 보다는 암시적으로 보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낫다. 인도미술의 상징은 인도의 철학이나 신화와 동일한 진리를 표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순례자의 역정에서 인간의 에너지를 변성이라는 궁극적인 정신적 목표로 이끌어가는 지표이다. 따라서 인도의 미술과 상징을 연구하는 목적은 철학적 교의와 추상적 개념들을 상징과 미술을 통해 나타난 형태와 패턴에 대한 일종의 해석으로서 이해하는 것이며, 역으로 불변의 지혜를 표현하는 상형문자들에서 그러한 상징들을 이책에서 간접적으로 나마 읽어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