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뿐만 아니라 신이나 사제(司祭)로 보이는 남성의 모습도 보인다. 머리에 뿔이 달린 장식을 하고, 낮은 평상 위에 책상다리로 앉아 있으며, 왼편엔 코끼리와 호랑이가, 오른편엔 외뿔소와 물소가 그리고 정면 밑에는 역시 뿔 달린 동물들이 함께 있는 것으로 보아 동물의 주인이거나 신적인 존재로 추정된다. 동물과 더불어 나무도 성스러운 것으로서 예배 대상이 된 듯하다. 한 인장에선 길게 머리를 늘어뜨리고 높다란 머리장식을 한 남자가 나무 밑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데 뒤에서 거대한 염소가 굽어보고 있는 장면이 있다. 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는 인물 옆에 무릎을 꿇고 있는 예배자를 두 마리의 코브라가 뒤에서 지키고 있는 모습이 조각된 인장도 있다.

뿔 달린 동물의 수컷이나, 남근이 발기된 상태에서 뿔 달린 머리장식을 한 남성상은 모두 자연의 생산력 혹은 생명력을 나타낸다. 이런 해석을 뒷받침해 주는 좋은 증거는 인더스 부지에서 발굴된 많은 양의 돌로 만든 링가(linga : 男根)상이다.

동물의 수컷이나 뿔, 링가 등이 상징하는 남성적 힘과 성력(性力)에 대한 숭배가 주로 상위 계층의 종교였다면 풍요와 다산(多産)을 상징하는 여성신, 혹은 지모신(地母神)에 대한 신앙은 대중과 가정적 차원에서 행해졌던 것 같다.

한때 영화를 누렸던 인더스 문명도 BC 1600년경엔 지진이나 강물의 범람 등 확인되지 않는 어떤 원인으로 몰락의 길에 들어섰고, B.C. 1500년경 아리안 족이 침입하기 시작했을 땐 이미 인더스 문명의 생명력이 다해 가고 있었다. 철제무기와 말이 끄는 전차를 사용했던 유목민인 아리안 족은 큰 어려움 없이 원주민을 정복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더스의 도시가 몰락했다고 문화까지 갑자기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인더스 문명은 민중 속에 살아남아 갠지스 강 유역이나 남인도로 확산되었다. 비록 정복당했지만 인더스 문화는 아리안 족 문화에 영향을 주어 베다 문화의 변화를 초래했으며, 아리안 문화와 혼융하여 더 커다란 종합을 이루었다.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책상다리로 앉아 있는 인장의 조각은 베다나 불교문화의 핵심인 요가나 선정의 모습으로 되살아났으며, 성스러운 뱀의 수호를 받으면서 보리수 밑에 앉아 명상에 잠긴 석가모니 부처님의 모습에서도 인더스 문명의 영향이 뚜렷하게 전해지고 있다.

인더스의 종교는 베다 문화가 대중화된 힌두교에서 시바(siva)의 모습으로 다시 나타난다. 위대한 요기(yogi : 요가수행자)이자 동물의 주(主)인 시바는 수소 난디를 타고 다니며, 우주적 창조력의 상징인 링가로 표상된다. 또 정화(淨化)의 의식인 목욕하는 관행도 아리안 족의 문화가 아니며 인더스 문명의 영향이라고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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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옛정문 '인화문' 찾았다.

덕수궁의 옛 정문 인화문. 현재 정동 도로변 옛 대법원청사 부근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 1900년 구한말 정부의 양지아문(측량, 지도제작을 맡은 관청)에서 발행한 한성부 지도 가운데 덕수궁 부분.

덕수궁. 구한말 열강이 집어삼키려 각축했던 곳, 승자인 일제의 의한 을사보호조약 체결부터 병탄에 이르기까지 왕조의 몰락을 한 가운데서 경험한 비극의 궁전이다. 고종은 병탄후 그곳에 유폐됐다가 결국 거기서 숨졌다. 과거의 쓰라린 기억을 잊고 싶어서일까? 비극의 덕수궁은 지금도 사실상 버려져 있다. 정문이었던 인화문은 자취도 없고, 본전인 중화전은 변형된 형태로 서있다. <한겨레>는 원로 서지학자 이종학씨가 오랜 노력끝에 발굴해 공개한 구한말 덕수궁 희귀사진과 그림·문헌자료들을 세차례에 걸쳐 게재한다. 편집자

덕수궁의 옛 정문 인화문과 임금이 집무하는 2층짜리 장대한 건물로 지어졌다가 1904년 큰 불로 타버린 궁궐정전 중화전의 옛 모습 정면을 담은 희귀사진자료가 90여 년만에 4일 다시 빛을 보게됐다. 이들 사진은 국망과 국권상실의 아픔을 증언하는 역사자료인 동시에 훼손·변형된 덕수궁의 옛 건물의 배치와 양식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희귀사료들이어서 복원에 좋은 근거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인화문 옛 사진은 러·일전쟁 당시 발행된 <만한사진첩>에 실려있던 것으로 찍은 때는 1905년께로 추정된다. 사진에 보이는 인화문은 정면3칸, 측면 2칸으로 위풍당당한 3문 형식과 단청을 갖췄다. 인화문은 덕수궁의 최초 정문으로 현재 정동쪽 옛 대법원 청사 앞길자리에 있던 것으로 추정되나 자세한 건립연대는 밝혀져 있지않다. 일제시대 오다 세요의 <덕수궁사> 등 기록에 따르면 인화문은 1906년에 정문의 자리를 동문인 대안문(현 대한문)에 넘겨주고 건극문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나 이후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1902년 덕수궁을 대표하는 장대한 2층지붕 건물로 지어졌다 불과 2년만에 불타버린 옛 중화전은 중충지붕에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경복궁 근정전이나 창덕궁 인정전에 손색없는 기품과 격조를 갖추고 있다. 특히 옛 중화전의 모습을 담은 자료는 건립 당시의 공사기록인 의궤와 먼거리에 찍은 흐릿한 전경사진 밖에 없다.

이종학씨는 인화문과 중화전의 옛 사진은 덕수궁 원궁 복원의 가장 유력한 근거자료인 만큼 건물들을 시급히 원상태로 복원해야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문화재청쪽은 정식복원에는 200백 억원 이상의 예산이 들어 섣불리 복원여부를 단정지을 수 없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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