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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 - 노재희 소설집
노재희 지음 / 작가정신 / 2013년 5월
평점 :
노재희의 소설집 <너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는 희한하다. 200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그의 첫 소설집이다. 직전 년도에 천운영, 전전년도에는 윤성희가 동아일보를 통해 등단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는 점을 볼 때 여러모로 의문점이 드는 구석이 있다. 혹시 그는 오래도록 글을 쓰지(혹은 발표하지)못할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것만으로도 이 책은 독자로 하여금 궁금증이 일어나게 한다. 등단 후 십여년, 작가에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의 등단작 제목처럼, '그는 (그동안) 어디로 가버린' 걸까?
첫 소설인 <고독의 발명>은 시를 쓰려는 엄복태와 그를 둘러싼 가족, 선배와의 이야기이다. 어딘가 기시감이 드는 내용이 아닐 수 없다. 과거 한국사회, 특히 70~80년대가 시와 소설의 시대였다는 점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온국민이 문학청년, 문학소년이었으며 대학 다닐 때 시집 한 권 옆구리에 끼고 다니지 않은 사람이 어딨었겠는가. 조금 비약해서 이렇게 말하지만은, <고독의 발명>의 엄복태는 '시와 소설의 시대를 청춘으로 보낸, 조금 나이가 든 전형적인 386세대 소시민 가장인 시인 지망생'이다. 이것만으로도 짐작가능한 수많은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고독의 발명>에는 생생하게 재현된다. 시를 쓰고자 퇴근 후 고군분투하는 남자, 칸막이 책상을 인터넷에서 구입해 들여놓고 시를 쓰려 끙끙대는 남자. 회사 상사인 '감부장'과 조금이라도 말싸움에서 지고 싶어하지 않고 '이성복', '허수경', '황지우', '신경숙'등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한국 문단의 중견 작가들의 책을 옆구리에 끼고 그들과 함께 술자리를 가졌다고 말하는 선배와, 그런 선배와 함께 술을 마시는 남자. 나는 아니라고 말할수도 있겠지만 가슴 한켠에는 '나도 나중에 저렇게 되면 어쩌지?'라고 느껴질만큼 문청들의 유사한 미래가 될 수도 있는, 그래서 더 웃기고 가슴아픈 오늘날 '고독의 가까운 미래'가 바로 이 소설에서 보여진다.
잡지도 보이지도 않는 시간이라는 존재에게 인간은 무력하다. <시간의 속>은 사랑했던 여자와 헤어진 후 수상한 부자와 함께 살면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보여준다. 이 소설집에는 남성 화자와 여성 화자가 적당히 버무려져 있다. 정미경, 정지아, 전경린, 조경란 등 중견 여성 작가들이 여성 화자나 소설의 장치들로 여성성을 부각하는 것과 차별되는 지점이 있는 것이다. 위에도 언급한 천운영이나 윤성희의 경우 극단적 여성성과 중성적인 인물 등 일견의 뚜렷한 개성을 갖는데, 노재희도 그 선상에서 자신만의 화법을 구축하려는 움직임을 예측해볼 수 있다.
나는 너를 때리지 않고도 네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게 할 수 있다. 네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있어. 우리에겐 영혼이 있으니까.(<당신 손목을 붙드는 그림자>, 본문 291쪽)
소설집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중편 <당신 손목을 붙드는 그림자>에는 자석산과 영혼에 대한 기가막힌 비유와 상징이 등장한다. 일명 '서재' 인테리어가 직업인 '나'는 어머니가 해준 이야기와 책을 둘러싼 사람들 사이에서 '빌어먹을 아름다움의 자장인지 뭔지'(338쪽)를 생각하며 살아간다. 이 소설에는 정확히 세 개의 욕망이 등장하는데, 물질과 허영으로 마음의 빈자리를 채우려는 박무석의 욕망, 다 망하고 부서진 창고처럼 마음도 녹아내린, 그러나 재기의 의지를 숨기고 있는 윤의 욕망, 그리고 그 사이에서 아름다움, 빛나는 것, 가족의 붕괴 등을 느끼며 괴로워하는 나의 욕망들을 통해 인간세의 지리멸렬하고도 어쩔 수 없는 애환을 보여준다.
그런데 말야,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그걸 싫어한다는 것은 참, 견디기 어려운 일이야. 대체 내가 뭘 잘못한 걸까, 그러면서도 계속 그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는 것도. 있잖아, 우리가 인생의 어느 순간, 빛나는 것을 보게 되면 나머지 인생 동안엔 그 그림자에 붙들려 살아야 하는 것 같아. 일단 어떤 아름다움을 알게 되면 우리는 평생 그 아름다움의 자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337쪽)
그렇다, 우리는 어쩌면 평생 처음 본 최초의 아름다움을 가슴속에 품고 살아가는 것이다. 시인이 되고픈 자, 누군가의 남편이 되고픈 자, 행복해지고 싶은 자, 이상적인 가족을 꾸리고 싶은 자 모두모두 사실은 너나 할것 없이 나약하고 비루한 사람들일 뿐인 것이다. 그래서 '너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고 말하는 이 소설집의 제목이 여전히 유효하다. 누군가는 초인이 되기 위한 전초전으로 고독 속으로의 도피를 말했지만 이제 도피는 사람들에겐 필수 덕목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은 것 같지 않다. 엔터테이먼트 마저도 필수가 되어버린 피로사회에서 고독은 어쩌면 사람들에게 '블루오션'으로 남아 있는 발굴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독에게 속세의 그런 이름을 붙이는 것은 실례다. 미래는 가까이 있고 이 소설집의 인물들은 오래 전부터 우리 곁에 있던 사람들이다. 오래된 미래, 가까운 청춘들. 마치 고독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