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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꾸었다고 말했다 - 2018년 제42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손홍규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8년 1월
평점 :
가장 흥미로운 점은 작품의 에센스가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는 서술형의 문장에 모두 담겨있다는 것이다.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는 간접 인용절을 안은 문장인데, 간접 인용절은 직접 인용절과 확연한 구분점을 갖는다.
그것은 직접 인용절이 원 발화자의 개성이 담긴 문말 억양을 훼손하지 않고 그대로 인용한 것에 비해 간접 인용절은 원 발화자의 문말 억양을 중화시켜 인용한다는 것이다. 즉 원 발화자가 ‘꿈을 꾸었어요’, ‘꿈을 꿨어!’와 같이 말해도 간접 인용절로 전환될 때는 다소 중립적인 느낌마저도 드는 ‘꿈을 꾸었다’는 중화된 표현으로 전환된다.
중화된 표현은 중립적인 느낌을 주면서도 일종의 진리나 보편타당한 사실을 단순하게 진술하는 느낌을 준다. 즉 간접 인용절에 담긴 사실은 그 누구에게나 보편타당하게 경험될 수 있는 진리처럼 느껴진다.
다시 말해 인간은 그 누구나 ‘꿈을 꿀 수 있다’는 말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꾼다’도 아니고 ‘꾸었다’는 인용절의 서술어에 확인할 수 있듯 꿈은 현재와 현저히 단절된 과거에 존재했거나, 이미 완료된 것으로 해석된다. 하여, 인간 누구에게나 ‘꿈’은 한때에는 존재했었지만 현재에는 단절되어 있는 ‘그 무엇이다’라는 의미가 함의된 것처럼 읽혔다.
그렇다면 그 '꿈'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꿈’이라는 개념 안에는 현실성이 배제되어 있다. 즉 꿈은 현실에 반대편에 서 있는 비현실성을 함의한다. 작품 속에서 말하는 ‘꿈’이란 훼손되어 버려서 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순수한 인간성을 이른다.
작품에 등장하는 두 인물은 작품이 시작하는 시점에서부터 무너져버린 가정의 폐허 위에서 방황하는 부부이다.
누가 이 가정을 폐허로 만들었는가. 겉으로 보기엔 ‘폭력’, ‘소통의 단절’과 같은 인간성의 상실이 원인인 것처럼 보이지만 엄밀하게 원인을 짚으려 한다면 사실 그 누구도 의도적으로 이 가정을 폐허로 만들지 않았다.
심지어 이 부부는 폐허 위를 전전하는 비루한 삶 속에서도 순간 순간 잃어버린 줄 알았던 순수한 인간성을 드러낸다.
남자는 상실의 슬픔으로 방황하는 청년을 위해 수고스러움을 마다하지 않고
여자는 굴욕감 앞에 절망하는 한 청년을 위해 대신 추문의 대상이 되어준다.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처럼 이 작품의 마지막 장은 이 부부가 처음 만났던 때로 회귀한다.
마치 꿈과 같이 그려지는 그때는 오로지 무조건적인 상대를 향한 애정과 귀 기울임만이 존재한다. 작품이 규정하는 순수한 인간성이란 어떤 댓가를 바라지 않고 건내는 상대를 향한 헌신과 위로, 그리고 같은 인간으로서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기 위한 소통의 노력을 함의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그것이 왜 현실과 대척하는 ‘꿈’이자 ‘꾸었다’는 단절된 과거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것일까.
그것은 순수한 인간성이 성립할 수 없는 현실의 여건 때문이다.
경제적 불평등과 이를 뒷받침하는 노동시장의 왜곡된 구조, 빈곤, 개인화, 심적인 여유마저 박탈하는 효율 제일주의 등등
모순으로 가득 찬 현실의 여건들이 모두가 자연히 타고났을 인간성을 마치 저 멀리에 있는 아득한 꿈처럼 만들어버린다. 그래서 이 작품이 찬 물처럼 시리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