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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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는 자동사로 필수적 부사어나 보어를 요구하지 않는다. 즉 ‘오다’는 자동사이기 때문에 부사어가 없어도 그 자체로 자족할 수 있는 문장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오다’ 앞에 부사어를 넣을 때 구체적인 의미를 드러낼 수 있다. 따라서 ‘소년이 온다’는 비문은 아니지만, ‘소년이 ( ) 온다’와 같이 독자로 하여금 빈칸에 들어갈 수 있는 부사어를 마음껏 넣어볼 여지를 준다. 이때 ‘오다’가 갖는 의미적 특성에 호응할 수 있는 부사어를 넣을 때 문장이 자연스러워진다. 따라서 크게 두 가지 의미 부류의 부사어를 넣을 수 있다.

 

우선 의도나 목적의 의미를 갖는 어미 ‘-러’를 갖는 부사어이다. 이 부사어를 넣으면 소년이 의도(혹은 의도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를 가진 행위를 하기 위해 ‘온다’는 문장을 만들 수 있다. 그것은 소설의 첫 번째 장인 ‘어린 새’에서 확인할 수 있듯 ‘애도’의 행위를 하기 위해 온 것이다. 즉 ‘소년이 애도하러 온다’와 같은 문장을 떠올릴 수 있다.

 

소년의 ‘애도’는 한림원의 선정 이유에서도 언급된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떠올리게 한다. 소년이 도청에서 몰두한 염은 안티고네가 오라버니의 시신을 수습하고 먼지를 덮어 한 장례를 떠올리게 한다. 이 행위들은 망자에 대한 ‘애도’의 의미를 갖는다. 애도는 망자를 잘 보내주고 싶은 예우와 존중의 의미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애정하는 대상을 영원히 잊고 싶지 않아하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문제는 이러한 애도를 가로막는 부당한 억압이 이 세계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안티고네’의 오라버니인 폴뤼네이케스는 반역자로 규정되어 있다. 반역자의 시신을 수습하지 않고 길거리의 새나 개에게 뜯어 먹히도록 방치하는 것이 테베의 법이다. 즉 테베의 참주인 크레온이 지엄한 명령으로 제정한 법률이다. 안티고네가 크레온에게 맞선 근거는 애도 행위가 신이 부여한 의무라는 것이다. 즉 신이 인간에게 부여하여 자연스럽게 생겨난 천성과도 같은 것이다. 안티고네는 인간이 제정한 법과 신(자연)으로부터 부여받은 천성의 불문율이 충돌할 때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묻는다.

 

인간이 제정한 실질법은 외부의 힘에 의해 강제적으로 혹은 의무적으로 부과된 법이다. 하지만 천성의 불문율은 인간의 내부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입 밖으로 표현되지 않는 양심이 부과한 법이다. 전자가 후자를 반영하면 그것이 진정한 정의라고 할 수 있지만, 양자 간의 괴리가 생길 때 우리는 종종 불의를 목격하게 된다.

 

안티고네에서 애도는 ‘경건한 범행’으로 표현되는데, 소년이 반역자로 규정된 시민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염하는 행위 역시 ‘경건한 범행’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소년이 온다’가 반영하는 역사적 사건의 비극은 반역자가 무고한 시민을 반역자로 규정한다는 데 있다. 따라서 소년의 애도는 양심이 부과한 의무를 다하는 행위이지만, 한편으로는 사회적·역사적 모순을 바로잡고자 하는 경건하면서도 숭고한 행위이다.

 

한편 ‘오다’는 이동동사이기 때문에 그 앞에 방향성의 의미를 갖는 부사어를 삽입할 수 있다. 따라서 ‘이쪽으로’라는 부사어를 삽입할 수 있다. 이는 ‘오다’가 이동동사로서 갖는 의미적 특성 때문에 생기는 부사어의 선택 제약과도 관련이 있다. 즉 ‘오다’ 앞에 방향성의 의미를 갖는 부사어를 삽입하려면 ‘이쪽으로’는 가능하지만, ‘저쪽으로’는 불가능한 제약이 존재한다.

 

‘이쪽’은 화자나 독자에게 가까운 쪽을 의미한다. 이에 반해 ‘저쪽’은 화자나 독자로부터 멀리 떨어진 쪽을 의미한다. 따라서 소년은 독자에게 ‘다가오는’ 주체이다.

 

‘소년’은 첫 번째 장 이후로는 등장하지 않는 망자이기 때문에 그가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독자의 머릿속에서 재구성된 의미로서 다가온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소년이 남긴 잔해와도 같은 유산을 통해 그의 존재 의의를 되새긴다. 그리고 그러한 ‘소년들’을 만든 역사적 사건의 의미를 되묻게 된다. 따라서 독자 가까운 쪽으로 온 소년은 독자의 마음 속에서 재구성됨으로써 독자에게 기억의 의무를 지운다.

 

‘소년이 온다’의 영제목은 ‘Human Acts’이다. 의미적으로 신이 하신(부과한) 일이라는 의미의 ‘Divine Acts’와 대응되는 의미의 제목이라고 한다. 신이 부여한 일은 앞서 밝힌 것처럼 내면의 양심의 목소리에 대응될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신성하면서도 단면적인 속성을 지닌 ‘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한 일을 양면성을 지닌다. 무고한 인간을 짓밟고 죽이는 '일'도, 그리고 신(자연)이 부과한 양심을 실천한 행위도 모두 인간의 '일'이다. 어떤 일을 실천해야하는지 자명함에도 같은 실수와 과오를 저지르는 것이 인간의 비극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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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68
윌리엄 S. 버로스 지음, 조동섭 옮김 / 민음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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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이라는 단어는 국어사전에서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세상에 홀로 떨어져 있는 듯 매우 쓸쓸함’. ‘홀로 떨어져 있음이라는 풀이에서 알 수 있듯 고독의 전제는 단절이다.

 

단절의 상보반의어는 연결이다.

정말 혼자인 사람은 아무도 없어. 누구나 살아 있는 것 모든 것의 일부야. 문제는 너는 나의 일부라고 다른 사람을 설득하기가 어렵다는 거야.”

 

우리 모두는 항상 관계 속에서 증명(설득)’하려 한다. 너와 내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그 연결이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비록 그것이 외부의 시선에서 볼 때 허약한 관계라 할지라도.

 

속되게 말하면 추잡스러울 정도로 앨러턴에게 이 증명에 집착한다. 이런 식의 애정 서사는 요즘의 관점에서 정말 별로지만, 이 소설이 해부하고자 했던 건 그런 애정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영원한 과업과도 같은 고독감일 것이다.

 

학교에서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는 것은 연결감에 기인한 것일테다. 부족한 인간이지만 그래도 따르는 아이들이 있고, 또 내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래서 학교에서 이어폰이 쓰일 일은 없다(일은 잔뜩 있는데 교무실이 너무 시끄러우면 가끔 꺼냅니다).

 

어쨌든 의 황당한 야헤(텔레파시를 가능케 한다는 식물)’ 탐험은 이 소설의 역설적인 절정이다. 텔레파시를 통해 앨러턴의 마음을 보고 싶어하는 그는 야헤가 상대의 마음을 투명하게 비춰주는 유리벽처럼 생각한 모양이다. 그런데, 그 유리벽 뒤에는 검은 칠이 되어 있었다. 한 면이 검게 칠해진 유리벽은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가 목격한 자신의 모습은 자명하다. 갈구하는 상대의 마음을 보고자 했던 이 행동이 자신의 사무친 고독과 마주하는 행위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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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여인의 키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7
마누엘 푸익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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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들은 함께 한곳을 보는 사람들이라고 했던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아가는 그 길을 종적으로 보면 그럴 테지. 하지만 난 두 사람 사이의 횡적인 틈새에 더 풍부한 이야기와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애정의 서사는 두 사람이 구성해나가는 것이니까.

 

<거미여인의 키스>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두 사람 사이의 교호성이다.

 

발렌틴과 몰리나의 대화는 두 사람의 발화가 얽히고설킨 대화체 형식으로 되어있다. 두 사람의 발화 사이에는 제3자적 위치에서 작중 사건을 정리해줄 서술자의 개입이 없다. 하여 독자로서는 종종 대화의 흐름을 놓치면 지금 이 말을 누가 하고 있는 것인지 아리송할 때가 있다. 물론 발렌틴이 한마디 하면 몰리나가 다시 한마디하고 다시 발렌틴이 한마디를 하는 식으로 너 한마디 하면 나 한마디 홀짝홀짝의 규칙(?)을 잘 지키며 대화가 이뤄지고 있기 때문에 흐름을 놓쳤으면 거꾸로 올라가서 이게 누구의 말인지 카운트해 보면 된다.

 

발렌틴과 몰리나가 서로에게 던지는 발화는 상대의 다음 발화에 영향을 미친다. 두 사람의 얽히고설킨 대화는 새로운 의미를 만든다. 그래서 몰리나의 영화 이야기는 흥미롭다. 이미 의미가 기정된, 기성품인 영화의 이야기는 발렌틴과 몰리나의 대화 속에서 미묘하게 편집되거나, 재구성되거나, 나아가 재창작된다. 그렇게 새롭게 구성된 의미는 서로에게 침윤된다. 그 결과 두 사람은 상대화()된다. 즉 발렌틴은 몰리나화되고, 몰리나도 발렌틴화된다.

 

대의명분에 대한 강박으로 세상을 거시적으로만 바라보던 발렌틴에게는 미시적인 세상을 심미적으로 관조할 수 있는 눈을 상실했다. 그 결과 차가운 이성만 있고 따뜻한 감성은 결여된 속칭 재수 없는 인간이었다. 몰리나는 정확히 그 반대지점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수동적인 여성성을 답습하고 있는 답답한 인간이었다. 종국에 이르러 발렌틴이 (그토록 혐오하던 감성적인) 자신만의 영화를 만들고, 몰리나가 대담한 선택을 한 것은 사랑의 결과이다.

 

애정의 서사는 두 사람의 소통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만드는 교호의 과정이다. 사랑의 서사에서 두 사람은 아름다운 공저자가 된다.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 닮는다는 말도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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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44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김인환 옮김 / 민음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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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본다. ‘서로 사랑하는 관계에 있는 두 사람. 그 각각을 지칭하기도 하고, 두 사람을 아울러 지칭하기도 한다.’ 연인의 의미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두 사람이 필요하다. 즉 한쪽이 부재한다면 연인은 성립할 수 없다. 물론 두 사람이 물리적으로만 존재한다 해서 연인은 성립할 수 없다. 현존하는 두 사람의 관계가 서로 사랑하는관계여야 한다.

 

그렇다면 이 소설에는 그 어떤 연인도 존재하지 않는다. 내게 이 작품은 부재 하는 대상을 작품의 제목으로 삼는 반어적 기법을 쓴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와 중국인 남자는 연인이 아니란 말인가. 내가 보기엔 가 가장 사랑하고자 했던 대상은 어머니에 가깝다. ‘(모든 유년의 자식들이 그러하듯)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하지만, 어머니는 망나니 같은 큰오빠만 사랑한다. 그렇다면 큰오빠는 어머니를 사랑하는가. 그렇지 않아 보인다. 그가 사랑하는 것은 순간 순간의 쾌락일 뿐이다.

 

가난이 우리 집의 사면 벽을 허물어뜨려버렸기 때문에 모두들 밖에서 맴돌았다고, 각자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면서 떠돌았다고 대답한다. 우리는 방탕아들이었어요. 그래서 내가 당신과 함께 있는 거예요.”

 

방탕아처럼 떠돌았던 는 중국인 남자와의 성애로 도피한 것뿐이다. 갈구했던 애정의 좌절. 그 결핍을 즉각적인 성애로만 채우려는 소녀의 기근이 가슴을 아프게 한다. 그래서 는 중국인 남자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중국인 남자의 진심은 어떤가? 그는 에게 사랑의 표현을 자주하지만, 이것은 공허한 말뿐인 것 같다.

 

그의 영웅심, 그것은 바로 나이고, 그의 노예근성, 그것은 그의 아버지의 재산이다.”

 

그에겐 행동이 말을 뒷받침해줄 실천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의 노예근성이 그의 실천 의지를 주저앉혔다. 사랑한다면 주저앉아선 안 된다.

 

사랑의 형식만을 취한다고 하여 두 사람이 연인이 될 순 없다. 그래서 어쩌면 사랑의 내용만이 연인의 진정한 필수 조건처럼 여겨진다. ‘와 중국인 남자가 연인이 될 수 없었던 것은 단순히 연상 연하의 커플, 다른 인종의 커플과 같은 사랑의 형식이 문제가 된 것이 아니었다. 서로가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사랑하는 관계가 아닌데, 어떻게 연인이 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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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꾸었다고 말했다 - 2018년 제42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손홍규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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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흥미로운 점은 작품의 에센스가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는 서술형의 문장에 모두 담겨있다는 것이다.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는 간접 인용절을 안은 문장인데, 간접 인용절은 직접 인용절과 확연한 구분점을 갖는다.

 

그것은 직접 인용절이 원 발화자의 개성이 담긴 문말 억양을 훼손하지 않고 그대로 인용한 것에 비해 간접 인용절은 원 발화자의 문말 억양을 중화시켜 인용한다는 것이다. 즉 원 발화자가 꿈을 꾸었어요’, ‘꿈을 꿨어!’와 같이 말해도 간접 인용절로 전환될 때는 다소 중립적인 느낌마저도 드는 꿈을 꾸었다는 중화된 표현으로 전환된다.

 

중화된 표현은 중립적인 느낌을 주면서도 일종의 진리나 보편타당한 사실을 단순하게 진술하는 느낌을 준다. 즉 간접 인용절에 담긴 사실은 그 누구에게나 보편타당하게 경험될 수 있는 진리처럼 느껴진다.

 

다시 말해 인간은 그 누구나 꿈을 꿀 수 있다는 말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꾼다도 아니고 꾸었다는 인용절의 서술어에 확인할 수 있듯 꿈은 현재와 현저히 단절된 과거에 존재했거나, 이미 완료된 것으로 해석된다. 하여, 인간 누구에게나 은 한때에는 존재했었지만 현재에는 단절되어 있는 그 무엇이다라는 의미가 함의된 것처럼 읽혔다.

 

그렇다면 그 ''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이라는 개념 안에는 현실성이 배제되어 있다. 즉 꿈은 현실에 반대편에 서 있는 비현실성을 함의한다. 작품 속에서 말하는 이란 훼손되어 버려서 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순수한 인간성을 이른다.

 

작품에 등장하는 두 인물은 작품이 시작하는 시점에서부터 무너져버린 가정의 폐허 위에서 방황하는 부부이다.

 

누가 이 가정을 폐허로 만들었는가. 겉으로 보기엔 폭력’, ‘소통의 단절과 같은 인간성의 상실이 원인인 것처럼 보이지만 엄밀하게 원인을 짚으려 한다면 사실 그 누구도 의도적으로 이 가정을 폐허로 만들지 않았다.

 

심지어 이 부부는 폐허 위를 전전하는 비루한 삶 속에서도 순간 순간 잃어버린 줄 알았던 순수한 인간성을 드러낸다.

 

남자는 상실의 슬픔으로 방황하는 청년을 위해 수고스러움을 마다하지 않고

 

여자는 굴욕감 앞에 절망하는 한 청년을 위해 대신 추문의 대상이 되어준다.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처럼 이 작품의 마지막 장은 이 부부가 처음 만났던 때로 회귀한다.

 

마치 꿈과 같이 그려지는 그때는 오로지 무조건적인 상대를 향한 애정과 귀 기울임만이 존재한다. 작품이 규정하는 순수한 인간성이란 어떤 댓가를 바라지 않고 건내는 상대를 향한 헌신과 위로, 그리고 같은 인간으로서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기 위한 소통의 노력을 함의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그것이 왜 현실과 대척하는 이자 꾸었다는 단절된 과거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것일까.

 

그것은 순수한 인간성이 성립할 수 없는 현실의 여건 때문이다.

 

경제적 불평등과 이를 뒷받침하는 노동시장의 왜곡된 구조, 빈곤, 개인화, 심적인 여유마저 박탈하는 효율 제일주의 등등

 

모순으로 가득 찬 현실의 여건들이 모두가 자연히 타고났을 인간성을 마치 저 멀리에 있는 아득한 꿈처럼 만들어버린다. 그래서 이 작품이 찬 물처럼 시리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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