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다’는 자동사로 필수적 부사어나 보어를 요구하지 않는다. 즉 ‘오다’는 자동사이기 때문에 부사어가 없어도 그 자체로 자족할 수 있는 문장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오다’ 앞에 부사어를 넣을 때 구체적인 의미를 드러낼 수 있다. 따라서 ‘소년이 온다’는 비문은 아니지만, ‘소년이 ( ) 온다’와 같이 독자로 하여금 빈칸에 들어갈 수 있는 부사어를 마음껏 넣어볼 여지를 준다. 이때 ‘오다’가 갖는 의미적 특성에 호응할 수 있는 부사어를 넣을 때 문장이 자연스러워진다. 따라서 크게 두 가지 의미 부류의 부사어를 넣을 수 있다.
우선 의도나 목적의 의미를 갖는 어미 ‘-러’를 갖는 부사어이다. 이 부사어를 넣으면 소년이 의도(혹은 의도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를 가진 행위를 하기 위해 ‘온다’는 문장을 만들 수 있다. 그것은 소설의 첫 번째 장인 ‘어린 새’에서 확인할 수 있듯 ‘애도’의 행위를 하기 위해 온 것이다. 즉 ‘소년이 애도하러 온다’와 같은 문장을 떠올릴 수 있다.
소년의 ‘애도’는 한림원의 선정 이유에서도 언급된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떠올리게 한다. 소년이 도청에서 몰두한 염은 안티고네가 오라버니의 시신을 수습하고 먼지를 덮어 한 장례를 떠올리게 한다. 이 행위들은 망자에 대한 ‘애도’의 의미를 갖는다. 애도는 망자를 잘 보내주고 싶은 예우와 존중의 의미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애정하는 대상을 영원히 잊고 싶지 않아하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문제는 이러한 애도를 가로막는 부당한 억압이 이 세계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안티고네’의 오라버니인 폴뤼네이케스는 반역자로 규정되어 있다. 반역자의 시신을 수습하지 않고 길거리의 새나 개에게 뜯어 먹히도록 방치하는 것이 테베의 법이다. 즉 테베의 참주인 크레온이 지엄한 명령으로 제정한 법률이다. 안티고네가 크레온에게 맞선 근거는 애도 행위가 신이 부여한 의무라는 것이다. 즉 신이 인간에게 부여하여 자연스럽게 생겨난 천성과도 같은 것이다. 안티고네는 인간이 제정한 법과 신(자연)으로부터 부여받은 천성의 불문율이 충돌할 때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묻는다.
인간이 제정한 실질법은 외부의 힘에 의해 강제적으로 혹은 의무적으로 부과된 법이다. 하지만 천성의 불문율은 인간의 내부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입 밖으로 표현되지 않는 양심이 부과한 법이다. 전자가 후자를 반영하면 그것이 진정한 정의라고 할 수 있지만, 양자 간의 괴리가 생길 때 우리는 종종 불의를 목격하게 된다.
안티고네에서 애도는 ‘경건한 범행’으로 표현되는데, 소년이 반역자로 규정된 시민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염하는 행위 역시 ‘경건한 범행’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소년이 온다’가 반영하는 역사적 사건의 비극은 반역자가 무고한 시민을 반역자로 규정한다는 데 있다. 따라서 소년의 애도는 양심이 부과한 의무를 다하는 행위이지만, 한편으로는 사회적·역사적 모순을 바로잡고자 하는 경건하면서도 숭고한 행위이다.
한편 ‘오다’는 이동동사이기 때문에 그 앞에 방향성의 의미를 갖는 부사어를 삽입할 수 있다. 따라서 ‘이쪽으로’라는 부사어를 삽입할 수 있다. 이는 ‘오다’가 이동동사로서 갖는 의미적 특성 때문에 생기는 부사어의 선택 제약과도 관련이 있다. 즉 ‘오다’ 앞에 방향성의 의미를 갖는 부사어를 삽입하려면 ‘이쪽으로’는 가능하지만, ‘저쪽으로’는 불가능한 제약이 존재한다.
‘이쪽’은 화자나 독자에게 가까운 쪽을 의미한다. 이에 반해 ‘저쪽’은 화자나 독자로부터 멀리 떨어진 쪽을 의미한다. 따라서 소년은 독자에게 ‘다가오는’ 주체이다.
‘소년’은 첫 번째 장 이후로는 등장하지 않는 망자이기 때문에 그가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독자의 머릿속에서 재구성된 의미로서 다가온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소년이 남긴 잔해와도 같은 유산을 통해 그의 존재 의의를 되새긴다. 그리고 그러한 ‘소년들’을 만든 역사적 사건의 의미를 되묻게 된다. 따라서 독자 가까운 쪽으로 온 소년은 독자의 마음 속에서 재구성됨으로써 독자에게 기억의 의무를 지운다.
‘소년이 온다’의 영제목은 ‘Human Acts’이다. 의미적으로 신이 하신(부과한) 일이라는 의미의 ‘Divine Acts’와 대응되는 의미의 제목이라고 한다. 신이 부여한 일은 앞서 밝힌 것처럼 내면의 양심의 목소리에 대응될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신성하면서도 단면적인 속성을 지닌 ‘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한 일을 양면성을 지닌다. 무고한 인간을 짓밟고 죽이는 '일'도, 그리고 신(자연)이 부과한 양심을 실천한 행위도 모두 인간의 '일'이다. 어떤 일을 실천해야하는지 자명함에도 같은 실수와 과오를 저지르는 것이 인간의 비극이라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