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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무슨 책 읽고 계세요?
금융회사가 당신에게 알려주지 않는 진실
송승용 지음 / 엘도라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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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명언이 떠오른다.
하지만 '할 많은 일다운 일'들은 선택받은 자에게 돌아가고 다수는 일이 없어 경제적 상실감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것이 요즘의 현실이다. 그러니 '할 일이 많다'라기보다  차라리 '알아야 할 게 많다'고 해야 함이 맞는 것 같다.
코스피 지수가 꿈의 수치인 2000포인트 대로 진입하니 참여하지 않으면 마치 사회의 낙오자라도 되는 양, 재테크의 문외한들까지 막장타고 너나 없이 꼬리를 물고 진입한다.                            모두 꿈에 부푼 개미, 서민들...
지난 주, 나도 이래저래 쌈지돈 긁어모아 소개받은 모 <베트남 *** 펀드> 가입 상담차 금융회사를 찾은 적이 있었으니 나 역시 이래저래 덩달아 헛꿈만 꾸고 있는 소시민일 뿐이다.
여태껏 재테크 공부를 나름대로 해 볼 거라고 수선은 떨었지만 제대로 한 적이 없는 지라 그저 직원의 말을 하나하나 놓치지 않으려고 열심히 귀를 쫑긋 세웠으나 휴~ 알쏭달쏭하기만 하다. 어려운 경제전문용어들을 구사하는 직원 앞에서 주눅이 들어 더 쉽게 설명해 달라는 말이 목구멍속으로 잠겨버린다.
어쩌면 책의 내용이 나의 경우와 똑 같은지...   결국 나도 금융회사의 밥(?)이었다.
물어 보는 이야기의 70%는 잘 이해가 안가고, 빨리 처리할 것 처리하고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모르니까 전문가인 증권회사와 금융회사 직원들이 어련히 알아서 잘해주겠지하며 기대고자하는 일반인들의 믿음이 유발되는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그런 흐름에 편승하여 흘러가는 것이 아무래도 타성에 젖어버릴 것같아 공부좀 하여 다시 찾아 와야겠노라며 속으로 다짐하며 돌아 섰다.    
그리고 사서 든 이 한 권의 책!
진작 나왔어야 하며 이게 바로 돈되는 책이란 것을 몇 장 읽은 순간 깨닫게 된다.
책을 읽어 내려가면서  고개를 저으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국내 굴지의 종금사와 증권사를 거치며 개인투자자 대상 영업에 잔뼈가 굵은 저자의 단호한 ‘노!'의 역설.
개인이 자기의 자산을 불리기 위해 순진하게 금융회사에 의지하는 동안 금융회사는 그들의 자산만을 불리기 위해 치밀하게 주판알을 놀리고 있다는 것. 그들의 아침회의 주요내용은 증시의 흐름이 아닌 판매수수료 높은 상품 판매전략, 할당 계좌수와 목표금액 등이 주를 이룬다. 주식이 내리면 내리는 대로 오르면 오르는 대로 오로지 자자 이익만을 위한 판매 전략을 세운다.
아침 신문에 그 아무리 부정적인 기사가 나오더라도 적합한 판매전략을 만들어 어떻게든 목표치를 채운다.
펀드에 손실이 나도 그들은 수수료와 보수를 고스란히 챙긴다.
금융회사가 VIP 고객들에게조차 절대로 말하지 않는 금융상품의 진실을 명쾌하게 설명하는이 책은 금융의 숨겨진 저들만의 ABC를 적나라하게 밝히고 있다.
이 책 읽기를 끝낼 무렵, 나는 금융회사의 운영메커니즘과 지극히 수익만 추구하는 가변적인 속성을 알게 되었다.
할 일,즉 재테크에 뛰어드는 것보다 먼저 알고나서 그 일에 뛰어 들어야 억울하지 않을 것이요, 손해 또한 최대한 줄일 수 있다는 금융정글의 진리도 깨닫게 되었다.
소비자 편에서 금융상품들의 면면과 실전 지침을 정확하게 설명하고 속속들이 밝혀내 재테크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갖도록 해준 이 한 권의 책에 찬사를 보내며 이 땅의 소시민들에게 널리 추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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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류 (상) 범우 사르비아 총서 315
채만식 지음 / 범우사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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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탁류는배경의 설정과 작가의 탁월한 문장력으로  시대적 배경에 따른  낯선 어휘들로 인해 많은 언어 의미적 고찰을 갖게하여 몰입하기가 다소 용이하진 않으나 식민지 자본주의의 아래에서 세속화되어가는 인간 군상과 그것을 이겨내려고 하는 사람들의 의지를 비극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는 수준높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금강의 탁류는 넓은 관점에서 민족의 피땀과 희망을 앗아가는 일제의 수탈을 내포하고 있다. 맑던 금강이 탁류로 변하면서 정주사의 몰락과 그의 딸 초봉이의 비극적인생을 물살되어 흐르게 한다. 그런가하면‘백제 흥망의 꿈자취를 더듬어 피지배민족의 역사적 한도 담고 있다.
‘미두장’은 미곡을 수탈하려는 일제의 제도적 수탈소였기 때문에 작가는 그 ‘미두장’ 에 초점을 맞추어 민족적 한과 수난을 그려 나가고자 했다.

주인공들의 삶은 일본인들이 사는 거리와 조선 민족이 사는 거리가 지배와 피지배로 대별되는 어지럽고 탁한 시대속에서 시작된다.
신구지식을 습득해 군청서기로 일하다가 미두장 하바꾼으로 전락한 몰락한 양반의 후예인 정주사는 약국의 여점원으로 있던 그의 딸 초봉이를 망해가는 집안을 구하기 위한 방편으로 고태수와 결혼을 시킨다. 그러나 고태수는 파산한 인물로 후에 이웃집 여자와 간통을 하고 맞아 죽게 된다. 그리고 초봉이는 고태수 옆에 항상 있던 장형보에게 겁탈을 당하고 만다. 그렇게 지내던 초봉이는 서울로 올라가 약방주인이었던 박제호를 만나게 되고, 예전부터 초봉이를 맘에 둔 박제호는 그녀를 첩으로 삼는다. 하지만 박제호에게도 버림을 받은 초봉이는 꼽추 장형보의 아내가 되지만 딸을 구박하는 그를 죽이고서 살인자가 되는 비극을 맞는다.

‘탁류’에서 탁류를 일으키는 가장 큰 원인은 바로 그 당시의 지독한 궁핌함과 그 속에서 갈등을 빚는 가치관과 도덕적 혼란이다.
시대가 다르고 세상이 다르다고해서 인간삶의 궁극적인 가치는 변할 수 없다. 기족이란 울타리속에서 건강하고 건전한 가치관을 추구하며 나아갈 때 사회도 건전하고 건강해져 비로소 비극을 최소화시킬 수 있는 장치이자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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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월드컵 대회가 한창이던 작년 6월 중순의 어느 날, 나와 동료는 프랑스 영사관에 들러 볼 일을 마친 후 시장기를 해결하러 근처 식당을 찾았다. 음식 주문을 하고 있는데 건너편 테이블에 앉아있는 한 무리의 대학생들이 "문화의 상대성도 모르는 놈들..." 운운하면서 표정이 상기된 채 씩씩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 나라의 보신탕 문화에 대한 비판의 글이 적힌 프랑스어 안내책자를 서로 돌려 보면서 손가락질하며 '애국심'을 발휘하고 있었다.

지난 한일 월드컵 때, 국제 축구연맹(FIFA)도 공식 서한을 통해 우리 나라의 개고기 식용을 문제삼은 적이 있었던터라 대학생들이 "**놈들, 축구하고 보신탕하고 무슨 상관관계가 있노?"하며 열을 올리고 있는 분위기에 우리도 쉽게 동조되어갔다.

아닌게 아니라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에는 아직도 철지난 백인 우월주의 의식과 서구문화 우월주의에 빠져있음이 역력하였다.

은연중에 우리 집 강아지가 떠올랐다. '토이 푸들'種子로 식구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애완견이다.

심심하면 아이들에게 "만일 전쟁이 일어나 우리집 식량이 떨어지면  "이삐'(강아지 이름)는 아빠의 든든한 비상식량이 될 것이야!" 하며 아이들을 골려먹이는 그 주인공이다.

그럴 때마다 아이들은 표정이 일그러지며 울상짓는다.

물론 나는 개고기를 먹지 않는다. 어떤 음식이든 가리지 않고 다 잘 먹는 식성으로 정평이 나 있지만 개고기는 먹으면 절대 안되는 우리 집 차남의 금기사항이라는 어머니의 유훈(遺訓)을 받들어 이 날까지 입에 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오늘은 우리 집 강아지가 들으면 섭할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고기 즉, 음식으로써 먹는 개고기는 사람들이 왈가왈부(曰可曰否)할 일이 아닌 것이라는 사실을.
고려 중기의 대문장가,이규보(李奎報)의 슬견설(?犬說)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어떤 손[客]이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어제 저녁엔 아주 처참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어떤 불량한 사람이 큰 몽둥이로 돌아다니는 개를 쳐서 죽이는데, 보기에도 너무 참혹하여 실로 마음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맹세코 개나 돼지의 고기를 먹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어떤 사람이 불이 이글이글하는 화로를 끼고 앉아서, 이를 잡아서 그 불 속에 넣어 태워 죽이는 것을 보고, 나는 마음이 아파서 다시는 이를 잡지 않기로 맹세했습니다.”

손이 실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이는 미물이 아닙니까? 나는 덩그렇게 크고 육중한 짐승이 죽는 것을 보고 불쌍히 여겨서 하는 말인데, 당신은 구태여 이를 예로 들어서 대꾸하니, 이는 필연코 나를 놀리는 것이 아닙니까?“

하고 대들었다. 나는 좀 구체적으로 설명할 필요를 느꼈다.

“무릇 피[血]와 기운[氣]이 있는 것은 사람으로부터 소, 말, 돼지, 양, 벌레, 개미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한결같이 살기를 원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어찌 큰 놈만 죽기를 싫어하고, 작은 놈만 죽기를 좋아하겠습니까? 그런즉, 개와 이의 죽음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서 큰 놈과 작은 놈을 적절히 대조한 것이지, 당신을 놀리기 위해서 한 말은 아닙니다. 당신이 내 말을 믿지 못하겠으면 당신의 열 손가락을 깨물어 보십시오. 엄지 손가락만이 아프고 그 나머지는 아프지 않습니까? 한 몸에 붙어 있는 큰 지절(支節)과 작은 부분이 골고루 피와 고기가 있으니, 그 아픔은 같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물며, 각기 기운과 숨을 받은 자로서 어찌 저놈은 죽음을 싫어하고 이놈은 좋아할 턱이 있겠습니까? 당신은 물러가서 눈 감고 고요히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하여 달팽이의 뿔을 쇠뿔과 같이 보고, 메추리를 대붕(大鵬)과 동일시하도록 해 보십시오. 연후에 나는 당신과 함께 도를 이야기하겠습니다.” 라고 했다.                      
 

개고기 식용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드는 첫번째 이유가 '생명존중'이다.                                   그러나 다른 동식물의 생명도 역시 소중하다. 따라서 개잡는 것만 시비걸 수 없다.                    생명체는 사람에게 유익하게 보이던 유익하게 보이지 않던, 사람을 따르건 따르지 않건 모두 나름대로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생명존중 사상'이다.                                                        모든 생명체는 단백질, 지방질, 탄수화물로 구성되고, 유전자는 DNA이다. 그러므로, 생명존중을 외치려면 개는 물론 소, 돼지, 야채, 과일, 곡식, 나무열매도 먹지 말아야 한다.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같은 조상에서 갈린 형제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유전자와 개, 돼 및 소의 유전자는 5% 정도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개를 잡아먹지 말자고 하려면 같은 촌수인 소와 돼지도 잡아 먹지 말아야 한다.

 
개고기식용 반대론자들은 사람에게 인권이 있듯이 개에게도 권리가 있다고 하여 견권(犬權)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러나, 개가 어떻게 사람과 같을 수 있는가? 그리고, 개를 반려동물이라고 하는데, 반려자란 배우자를 의미한다. 개가 어떻게 사람의 배우자인가? 개는 사람의 친구이므로 잡아먹으면 안 된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개를 사람으로 보았을 때만 가능한 극단적인 허구적 비논리이다. 말이나 생각은 만인이 이해할 수 있는 보편타당성을 가져야 하는데, 비교 대상이 아닌 것들을 비교하므로 사회 일반에 통용될 수도 없고, 이해를 얻을 수도 없다. 생물은 수십억년 동안 적자생존의 법칙과 약육강식의 법칙에 따라서 강한 것은 살아남고 약한 것은 도태되면서 진화되어 왔다. 사람이 개를 잡아먹는 것도 약육강식의 법칙이므로 시비걸 일이 아니다 .
개가 인간을 따르기 때문에, 사람과 친하기 때문에 개만 보호해야 한다는 것은 잘못으로, 개를 보호하자고 하려면 다른 동식물도 같이 보호해야 공정한 것이다.

 
투우에서 그들의 동양문화에 대한 무시와 서양문화에 대한 우월주의를 볼 수 있다. 투우는 소의 신경을 건드려서 사람을 공격하게 한 다음 숨이 뜮어질 때까지 여러 개의 칼을 꽂아 고슴도치같이 만들어 피를 철철 흘리며 오랜 고통 속에 죽게 한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면서 좋다고 환호하고 박수친다.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이보다 더 무자비하고 야만적인 동물학대는 없다. 그러나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서양인이 하는 것은 문화적이라는 편견과 우월의식 때문이다. 잔인하게 여기지만 우리도 그들의 문화로 존중하해주고 있다. 만일 투우가 우리 것이었다면 그들은 한국을 야만적인 나라라 하며 한국상품 불매와 월드컵 보이콧 등으로 난리를 쳤을 것이다.

 

우리는 농경 정착민족으로 식물성 위주의 식사를 하며 온순한 반면, 서양인은 수렵목축 이동 민족으로 동물성 위주의 식사를 하며 호전적이다.
서양인들의 상징적 문화는 나이프와 포크로 대변된다. 사람과 동물을 죽이던 칼과 삼지창으로 식사 때 고기를 베어서 찍어먹다가 만들어진 문화유산이다. 칼과 삼지창으로 수많은 동물을 잡아 먹어 왔으면서 어쩌다 먹는 남의 나라 개고기를 시비 거는 것은 칼과 삼지창의 무력을 앞세운 서양문화가 동양문화에 대해 저지르는 개념없는 공격과 다름없다.

단백질 식품으로 서양에는 치즈가 있고, 동양에는 두부가 있다. 치즈는 우유 단백질을 뽑아내어 발효시킨 것이고, 두부는 콩의 단백질을 뽑아 낸 것이다. 치즈 만들 때 우유 단백질을 침전시키려고 송아지 위(胃)의 레닌(rennin, chymosin)이라는 효소를 얻기 위해 서양에서는 연간 2천만 마리의 송아지를 도살하고 있다. 반면, 우리 나라는 바닷물에서 얻는 간수로 콩단백질을 간단히 침전시켜서 두부를 얻고 있다. 어느 것이 더 인간적인가?


서양인들이 자기들 시각이나, 가치관과 풍습과 다르다 하여 공격하고, 자기들 방식 대로 따르라는 강요하는 것은 우리 문화를 자기들 문화에 종속내지 동화시키라는 것이다. 이것은 아직도 세상을 자기들 방식대로 지배해야겠다는 침략적 사고의 발상이다.

 

파리에서 버리는 개의 숫자는 일년에 10만 마리 정도라고 한다. 미국도 20년전까지 버린 개가 연간 1,800만 마리였고, 이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하기 위해 매년 1억2천만 달러를 소비하였다. 지금은 연간 300만마리에서 7,500만마리로, 안락사시켜서 일부 매장하거나 동물 사료로 만든다. 광우병 파동은 개등을 잡아서 만든 사료를 소에게 주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일본은 집없는 개가 연간 26만 마리라고 하며 잡아서 주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태워서 없앤다고 한다.

대만의 집없는 개는 연간 200만마리, 루마니아도 200만마리, 이탈리아는 80만마리라 한다. 구미의 다른 나라의 사정도 비슷할 것이다. 이런 개들은 기르다 주인이 싫어서 대부분 버린 것들로, 돌아다니며 쓰레기 뒤지고, 아무 데나 똥오줌싸고, 더러운 곳에서 생활하여 병을 옮기게 되므로 잡아서 박멸하게 된다.
기르던 개를 버려서 굶겨 죽이는 것처럼 고통스럽고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인 일은 없다. 그러면서도 남의 나라 개고기 식용문화를 시비걸고 나오는 것처럼 오만한 일도 없다. 개를 버리는 것보다 신속히 도살하여 고통을 없애고, 고기는 먹는 것이 훨씬 환경친화적이고, 식량확보에 도움되고, 인간적인 일이다.

 

동물보호론자들은 한국에서 개를 잡는 것은 학살이고, 서양에서 안락사시키는 것은 영생의 평안함을 가져다 주는 인도적인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미국에서 연간 수천만마리씩 개를 잡아서 개의 사료등으로 만들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없다. 오히려 안락사는 당연하다는 태도이다. 그러나, 죽이는 방법에 따라 어떤 것은 학살이고, 어떤 것은 인도적이라는 것은 웃기는 얘기이다. 스스로 죽기를 원하는 개가 어디에 있는가? 사람을 강제로 죽이고서 안락사시켰다고 살인이 아니라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리고, 자기들 편한 대로 학살과 안락사를 구분지어 놓고 안락사는 얼마든지 시켜도 되는 정당하고 인도적이라는 것은 동물의 생사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신이라는 것과 다름 없다. 여기서도 서양인들의 우월주의와 독선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자기네 나라 타히티섬 주민이 개잡아 먹는 것은 가만히 놔 두고 남의 나라 개잡아 먹는 것을 시비거는 프랑스의 브리지도 바르도의 오만과 독선은 어떤가.

 

세계에는 굶어죽는 사람, 전쟁으로 죽는 사람, 학대받는 사람, 고통받는 사람이 무수하다. 1998년도는 세계에서 8억의 인구가 영양실조에 걸렸고, 1800만명이 굶어죽었다고 한다. 미국만 하여도 9명중 하나는 끼니를 거른다고 한다. 북한 주민도 굶주려서 죽어가는 사람이 많다. 우리나라도 굶주리는 사람이 많다. 순리 대로라면 인간을 먼저 도와야 한다. 개를 걱정할 일이 아닌 것이다.
서양에서 버리는 개는 한국에서 식용하는 개보다 많고, 기르던 개를 버리는 것처럼 악랄한 일은 없다. 굶어 죽어가는 절박한 사람들을 외면하고, 자기들은 기르던 개를 버리면서 남의 나라 개고기 음식을 비판하는 동물보호란 사이비이며, 비인간적이다. 그것이야 말로 개와 관련된 속담 '똥묻은 개가 겨묻은 개 나무란다'로 비유될 것이다.
외국 동물보호단체들이 개고기 식용을 공격하는 데 가장 앞세우는 이유는 한국인이 개를 때려서 잡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새빨간 거짓말이다.
한국의 개고기 식용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개를 잔학하게 때려 죽이기 때문이라지만 조사결과에 따르면 개는 대부분 전기로 순식간에 도살하여 고통을 주지 않고 있다. 
출처를 알기 힘든 개잡는 사진 몇 장만 가지고 한국은 개를 고통을 주면서 때려잡는 야만국가라고 전세계에 선전을 하고 있다. 그러나, 개를 고통을 주면서 때려잡으려면 한 마리 한 마리 철망 안에서 끄집어내느라 실랑이하고, 매다느라 실랑이하고, 그러다가 물릴 위험성도 있고, 식용견은 커서 목을 매 달기도 쉽지 않다. 시간이 적쟎게 소요되고 인건비도 많이 들어서 타산이 안맞아 때려 잡을 수 없다. 그래서 대부분 전기도살 방법을 사용한다, 전기도살은 철망 안에 있는 개 서너 마리를 일 이분 내에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개고기 산업 관련자들은 반대론자들의 공격에 대하여  참고 있다. 그래서 국민들은 극성인 반대론자보다 보신탕집 주인 편이 많다. 불교와 기독교는 교리상 서로 양립하기 힘들지만 비방이나 공격을 자제하고 있다. 세상은 혼자 만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서로의 생각과 주장 그리고 문화를 존중해야 한다. 공존은 그런 후에라야 진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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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나기를 위한 시원한 책읽기!

법정스님의 어록






나 자신의 인간 가치를 결정짓는 것은
내가 얼마나 높은 사회적 지위나 명예 또는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나 자신의 영혼과 얼마나 일치되어 있는가이다.


     [홀로 사는 즐거움] 에서




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영원한 것이 어디 있는가.
모두가 한때일 뿐,
그러나 그 한때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삶은 놀라운 신비요,아름다움이다


     [버리고 떠나기] 에서





내 소망은 단순하게 사는 일이다.
그리고 평범하게 사는 일이다.
느낌과 의지대로 자연스럽게 살고 싶다.
그 누구도,내 삶을 대신해서 살아줄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나 답게 살고 싶다


     [오두막 편지] 에서





빈마음, 그것을 무심이라고 한다.
빈마음이 곧 우리들의 본 마음이다.
무엇인가 채워져 있으면 본 마음이 아니다.
텅 비우고 있어야 거기 울림이 있다.
울림이 있어야 삶이 신선하고 활기 있는 것이다.


     [물소리 바람소리] 에서





버리고 비우는 일은 결코 소극적인 삶이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다.
버리고 비우지 않고는 새것이 들어설 수 없다.
공간이나 여백은 그저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과 여백이 본질과 실상을 떠받쳐주고 있다.


     [버리고 떠나기] 에서





가슴은 존재의 핵심이고 중심이다.
가슴 없이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다.
생명의 신비인 사람도,다정한 눈빛도,
정겨운 음성도 가슴에서 싹이 튼다.
가슴은 이렇듯 생명의 중심이다.
   

     [오두막 편지] 에서





나는 누구인가.스스로 물으라.
자신의 속얼굴이 드러나 보일 때까지
묻고 묻고 물어야 한다.
건성으로 묻지말고 목소리 속의 목소리로
귀 속의 귀에 대고 간절하게 물어야 한다.
해답은 그 물음 속에 있다.
     

     [산에는 꽃이 피네] 에서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
 

     [산에는 꽃이피네]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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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큰 어른이 읽는 아이들 책

학교와 친구등 외부와의 접촉을 피하고 자신만의 공간에서 폐쇄적으로 생활하는 청소년을   일컫는 '10대 은둔형 외톨이'등 사회 부적응 청소년문제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된 지 오래다.

 

 국내에서는 아직 정확한 규모와 그 실태가 파악되지 않고 있지만 2006년 초, 청소년위원회가 내놓은  자료에  따르면 방에 틀어박혀 컴퓨터만 하며 밤낮이 뒤바뀐 생활을 하는 '은둔형 외톨이 위험군' 고교생의 수가  43.000여 명에  이른다고 하였다. 이들중 학업까지 포기한 고위험군은 5000여 명 이상되는 것으로 추정했다.

 

그 원인으로 먼저 '대입 만능주의'로 대변되는 교육현장의 과도한 경쟁과 갈등을 들 수 있으며 거기에다  IT매체의 발달에 따라 인터넷과 인터넷 게임의 급속한 보급, 집단 따돌림, 부모의 무관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이러한 청소년들을 양산하였다고.

 

일부에서는 산업과 과학의 고도발달에 따라 생활의 양적향상은 이루어 졌을 지 모르나 그 이면의 폐해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는 반증이라고 본다.

 

문제는 이들 청소년들이 학업결손등으로 향후 '반사회적'  내지 '비사회적' 인 성인으로 고착될 수 있는 데다 자살등의 극단적인 선택을 할 가능성이 클 뿐만 아니라 죄의식이 없이 범죄의 길로도 쉽게 빠질 수 있어 교육당국의 관심과 대책이 시급한 실정이다. 

 

일본에서도 1990년대 후반 이후부터 '히키코모리'라 불리운 은둔형 청소년이 커다란 사회문제가 되어 왔는데 아직도 히키코모리는 130여 만명 이상에 이른다고 한다.

 

개인적, 가정적, 교육적, 사회적 요인들에 의해 복합적인 영향을 받는 은둔형 외톨이는 짧은 기간에 그 해결 방안과 대처책을 찾기란 어렵다.

 

쉽진 않지만 먼저 가족과 사회, 교육현장등에서 이들이 가족과 단체, 그리고 우리가 속해있는 사회의 구성원임을 인식하고 대하는 태도가 우선되어야 한다. 그리고 인내를 갖고서 꾸준히 애정과 관심을 기울여 폐쇄의 울타리밖으로 나오도록 해야할 것이다.

 

즉, 이들 청소년들에게  '이해할 수 없다' 라며 청소년기의 불안하고 흔들리기 쉬운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단견으로 질책하고 배제시키기 보다 긍정적인 시각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다만 무조건 기존학교나 사회의 틀에 끌어 들이기 보다 자연스럽게 사회성을 익혀 나가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여리고 깨지기 쉬운 심성을 가진 이들 은둔형 청소년들에게 가족 구성원과 우리 사회 기성세대는 '가족과 사회는 너희들을 버리지 않았다'는 식의 지속적인 관심과 사랑을 보여 주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고 중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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