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0년경에는 도시 주민의 거의 3분의 1이 아일랜드인이었다. 아일랜드인들은 자기들만의 학교를 세울 수 있는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신교고들의 공립학교 동맹과 투쟁했다. 그들은 맨해튼의 타락한 민주당원들이 결성하여 정치와 재정을 부패시킨 기구인 ‘태머니파‘에 합류하기도 했다. 다른 당들은 모두 그들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젠틀맨‘, 다시 말해 은행가나 부유한 상인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가장 야비한 직업인 정치가가 되거나 공무원이 되었다. 그 결과 19세기의 후반기와 20세기의 상당 기간 동안 아일랜드인들이 뉴욕을 통치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 P32
뉴욕주의 죄수들 가운데 85% 이상이 흑인이거나 히스패닉계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지만 에디 엘리스가 처음으로 밝힌 것은 그중 75%가 뉴욕 시티의 100여 개가 넘는 구역 중에서도 특히 서로 이웃한 다음 7개 구역 출신이라는 것이었다. 할렘, 로어이스트사이드(맨해튼), 사우스 브링크스, 사우스 자메이카(퀸스), 이스트뉴욕, 브라운스빌,배드퍼드스 투이베산트(브루클린). 그전까지는 어떤 경찰이나 범죄학 전문가도 ‘죄수 4명 중 3명이 이 7개 구역에서 태어나 범죄를 저지르고 결국은 이곳으로 돌아온다‘는 것, 그리고 이 구역들이 감옥과 마찬가지로 범죄의 출입구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 P68
1900년 시청에서 맨해튼의 하류 지역을 할렘의 주거지역과 연결하는 지하철을 레녹스가에 건설할 예정임을 공고하면서 한 가지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건설 과역 현상이 빚어지면서 부동산 개발업자들이 할렘의 지하철 노선과 그 노선이 끌어들일 주민들의 수를 예측하고 호화로운 임대 아파트를 지었다. 그런데 지하철 개통과 함께 엄청난 경기 침체 바람이 몰아쳤다. 지나치게 많은 건물이 세워진 할렘은 순식간에 겉만 번지르르한 유령도시로 변모했다. 부동산 개발업자들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백인들이라면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턱없이 높은 임대료를 받고 흑인들에게 세를 놓기 시작했다. 그 결과 할렘은 맨해튼의 ‘그늘진 도시‘가 되었다. (중략) 흑인들이 장악한 건물들이 여기저기 늘어나자 백인들은 할렘 밖으로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 P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