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태엽 오렌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2
앤소니 버제스 지음, 박시영 옮김 / 민음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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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읽기모임에 다녀왔다. 엠티 다녀온 직후라 피곤해서 가지말까- 생각도 했었는데, 정말 가길 잘했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이야기 하고 책에 대해 심도 깊은 생각을 나누는 게 즐거웠다. 모르는 사실을 배우는 것도 재밌었다. 세상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고 있구나. 세계가 한층 넓어진 기분이다. 새로운 세계가 짠-하고 나타났다. 이게 모두 <<시계태엽오렌지>> 덕분이다. 어느 정도 내용을 알고 있던 영화 덕분에 모임에 참석하는 걸 결정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책도 재밌고 쉽게 읽혔다. 요새 계속 안 읽히는 책들만 붙들고 있다가 실패하고 쉬운 책들을 읽고 있는데 이 책이 어려웠다면 모임에 참석할 엄두를 내지 못 했을 거다. 건너 건너의 이유로 앤서니 버지스가 고맙다.


소설 시계태엽-과 영화 시계태엽-은 많은 면에서 같기도, 다르기도 하다. 논제문을 늦게 받아서 영화를 보고 오라는 언지를 못 받기도 했지만 설사 받았다 해도 영화를 보지 않았을 것이다.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오렌지가 <<돌이킬 수 없는>>과 비슷한 수준의 충격적인 영상이라는 얘기를 영갤에서 듣고 영화 볼 용기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돌이킬 수 없는>>이 심하게 자극적이기도 했고- 알 수 없는 듯한 영화 포스터도 심한 거부감이 들었다. 소설 시계태엽-을 이야기하며 영화를 빼고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은 세미나를 하며 절실히 느꼈다. 영화가 그다지 잔인하거나 자극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덤으로 알게 되었다. 버지스와 큐브릭 사이의 신경전이나 버지스의 소심한 복수 같은 것도 있었다. 책 한 권에 이렇게 많은 생각과 의견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다른 이와 생각을 공유하고 나니 책에 대해 속속들이 알게 된 느낌이다.


시계태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선을 강제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에 대한 대답이다. 조금 다른 시각에서 보면 인간의 자유의지를 어디까지 존중해줘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도 생겨날 수 있다. 버지스의 대답은 선을 강제할 수 없다,이다. 마지막에 알렉스는 본인 말대로라면 철이 들었고, 가정을 이루는 걸 꿈꾼다. 처음부터 끝까지 악한 것 같았던 알렉스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에 대한 알 수 없는 의문이 불쑥 튀어나오거나 함께 다니는 패거리에 대한 경멸을 갖고 있는 걸 알 수 있다. 100% 악한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알렉스는 루드비코 치료를 받던 도중 자신이 지금까지 했던 행동들이 모두 나쁜 행동이었다는 말도 한다. 물론 그게 입바른 소리였긴 했지만 선과 악에 대한 개념이 학습으로 일정 부분 강제되고 있다는 반증이다.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지라도 다른 사람에게는 이게 선이고 이게 악이다-라는 개념은 머릿속에 박혀 있는 것이다. 어느 정도의 선을 강제하는 것은 사회 질서 유지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선과 악을 선택하는 자유를 빼앗아갈 정도로 선을 강제하는 것은 수단이 목적을 넘어선 행위이다. 일어난 결과에 대한 형벌로 선을 강제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도 회의적인 생각이 든다. 범죄자의 인권은 무엇인가?라는 원론적인 문제가 제기 되었을 때 질서유지가 인간의 자유의지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마지막 결말이 이상하다 느꼈는데 굳이 따지자면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겠다.

1)알렉스가 변했다.

2)알렉스는 변하지 않았다.


1)의 근거는 알렉스가 문득 느꼈던 알 수 없는 감정들이나 패거리에 대한 경멸과 믿기 어렵지만 스스로 철이 들었다고 말하는 마지막 장면이다. 이렇게 보자면 이 소설은 호밀밭의 파수꾼같은 성장소설이 된다. 또 마지막에 무리수를 두었던 작가를 이해할 수도 있다. 인간은 가만히 나둬도 저절로 성장하는 존재니 선을 강제한다느니-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집어치워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선을 강제할 수 없다는 작가의 맥락과도 가장 닿아있다.


2)의 근거는 철이 들었다는 건 외부의 평가로 알 수 있다는 사실이므로 알렉스의 말은 그냥 하는 소리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인지부조화 때문에 자신이 철 들었는지 어쨌는지 모른다. 일상적인 의미의 철이 든다는 이야기는 현실에 얽혀있는 것들과 타협하는 지점에서 시작하는데 알렉스의 행동에서는 그러한 모습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스탠리 큐브릭 영화의 결말과 맞닿는 맥락이다. 인간은 변하기 어렵다. 고로 일정 수준의 선을 강제하는 것은 가능한 이야기라고 결론 내릴 수 있다. -but, 영화에서는 이러한 이야기가 나오는지 알 수 없다; 보지 않고 내용을 듣기만 했으므로-

 

과연 문제작이었다. 책에 19금 딱지가 필요하다고 느꼈다는 말에 공감한다. 15살의 아이들이 이 정도로 비행을 저지르고 다닐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러다 잠깐 중학교 시절을 떠올려보니 소설과 다름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패싸움을 하거나 돈을 뺏고 다니거나 가게에서 물건을 훔치거나 왕따시키던 학생을 때려서 죽인다거나 성매매를 알선하거나. 소설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중학교 아이들 생활에 19금을 붙여줘야 하는 현실인 것이다. 한숨 나오는 현실을 바라보다 소설을 보면 어떤 게 소설이고 어떤 게 현실인지 모르겠다. 요지경 세상이다.


사족.

1. 표지의 인물이 여자라고 생각했다. 눈 밑의 아이라인 때문이었을까 손에 든 칼은 보이지도 않았다. 책을 중반 정도 읽다보니 표지의 인물이 알렉스였고 그가 쥐고 있는 것이 면도칼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옆에 눈알은 뭘 의미하는 건지 모르겠다.

2. 앤서니 버지스는 스탠리 큐브릭이 결말을 바꾼 것을 보고 분개했다고 한다. 곧, 버지스는 동명의 연극을 만들어 큐브릭과 매우 비슷한 외모의 배우를 캐스팅한 후 극 초반 알렉스 일당에게 두드려 맞는 역할을 주었다고 한다. 나름의 소심한 복수였다. 

3. 알렉산더가 쓰고 있는 책의 이름도 시계태엽오렌지이다. 알렉산더의 시계태엽-안에서도 국가가 선을 강제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굳이 말하자면 메타픽션과 비슷하다. 실제로 앤서니 버지스의 부인이 미군에게 성폭행을 당해서 유산을 했다고 한다. 알렉산더가 알렉스-아이러니 하게도 이 둘은 같은 이름이다-에게 강하게 분노하는 것이 사실은 버지스가 미군에게 분노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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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신 -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김영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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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는 진지하게 신(GOD)을 믿었던 적이 있었다. 매일 아침 일어나 QT를 하고 매순간 기도하는 삶을 지향하고, 하루를 마치는 건 반드시 기도로 끝맺음 했던 그런 생활들. 당시는 심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고 무언가 의지할 곳이 필요했다. 궁지에 몰리면 신을 찾게 된다더니 사이비 카톨릭신자였던 나도 어느 순간 간절히 신을 찾고 있었다. 그런데 매주 교회를 나가고 교회 사람들과 교제하는 생활은 딱 1년 뿐 이었다. 1년 내내 신께 드리던 기도 제목 중에 제일 윗 순위를 차지하고 있었던 내 바람. 그 바람이 무참히 깨진 순간 교회도 끝이었다. 나는 사이비 기독교신자가 되었고, 가끔 만나는 교회 사람들에게 신은 없다며 시비를 거는 '탕아'가 되었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들은 가끔 만나는 교회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반박하기 위한 자료를 찾다보니 알게 된 잡지식들의 총체이며- 순전히 신이 없었으면 하는 내 소망이 담겨있는 매우 주관적인 글이다.


보통 절대자의 존재를 부정할 때 많이 애용하는 것이 진화론적 관점이다. 기독교의 창조론과 더불어 이 세상을 만들었다고 말하는 모든 절대자'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인간이 신을 믿는 이유 중 하나가 '전지전능함' 때문인데 이런 절대적인 신의 능력은 인간을 포함한 세상 만물을 만들어 낸 것으로 더욱 완벽해진다. 기독교인들과 대화할 때 답답했던 것 중에 하나가 "너는 어째서 너를 만든 하나님 아버지를 믿지 않는 거니?"라는 질문이었다. 절대자가 나를 만들었다는 증거는 오로지 'bible' 하나라는 사실이 언제나 대화의 맥을 끊었다. 성경에 널려있는 많은 오류들과 성경에서 빠진 외경의 존재는 bible이 절대적인 진리로 가득찬 '성스러운 책'이 아니라는 증거가 될 수 있다고 말하면, 나는 그런 거 모른다-는 투의 반응이었다.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무조건 적인 믿음으로 비종교인인 나를 설득하려 들었다. 각자의 입장이 '성경을 제외한 모든 것'과 '성경'이라는 서로 다른 층위의 기반을 바탕을 두고 이루어지는데 대화가 제대로 이루어질리 만무했다.


세계 종교계를 주름잡고 있는 기독교의 핵심교리인 '창조론'을 부정하는 것으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를 말할 수 있다. 창조론을 부정하는 것은 창조론자들이 말하는 지적 설계론의 헛점을 말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1) 비개연성 논증
2)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


1)과 2)는 유신론자들이 가장 흔히 말하는 창조론의 근거들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나 생명체는 매우 정교하고 복잡해서 미리 계획하고 절차에 맞게 만든 설계자가 없다면 모든 것들은 존재할 수 없다.(환원 불가능한 복잡성)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우연을 통해서는 출현할 수 없다.(비개연성 논증) 예를 들어 '사람'이라는 생명체는 너무 복잡해서 우연을 통해서는 나타날 수 없다. 그러므로 전지전능한 신이 설계를 통해 만들어낸 것이다.라는 말을 창조론자가 했다. 여기에 나타난 모순은 무엇일까? 우선 1)과 관련하여 창조론자는 우연을 통해 나타나는 것.과 설계 없이 나타나는 것.을 동일한 언어로 인식하고 있다. 둘 사이의 관계는 전혀 같은 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설계는 우연의 유일한 대안이 아니며 자연선택에 따른 진화가 더 나은 대안이다. 자연선택은 누적적인 과정이며, 그 과정이 거대한 비개연성이라는 문제를 작은 조각들로 나눈다. 각 조각들은 비개연성을 띄고 있지만 심한 정도는 아니다. 이러한 조각들이 모인 최종 산물들은 우연이 도달할 수 없을 정도로 비개연적이 된다. 창조론자들은 누적적인 과정을 놓치고 마지막 최종 산물들만을 문제 삼는다. 2)는 구성 부분들 중 하나가 빠지면 전체가 제 기능을 다 못하게 된다면 그 기능적 단위를 환원 불가능하게 복잡하다고 본다. 창조론자들이 예를 드는 몇 경우가 있는데 그 또한 현실에서는 중간적인 부분이 존재하는 것을 간과했다. 중간부분이 존재한다는 그건 환원 불가능하게 복잡하지 않다. 우리 신체 또한 환원 불가능하게 복잡하지 않은 것이다.


처음 글을 시작할 때 '신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신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것들 중 세상을 아름답고 행복하게 만드는 일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마더 테레사 수녀라던지,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선행들. 그에 반해 신의 충직한 사도들이 행하는 악행들은 '차라리 신이 없었으면 더 나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까지 들게 만든다. 이스라엘이 시오니즘에 입각해 벌써 십수년째 팔레스타인에 하고 악행들이나-이건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바라보는 게 타당할지도-, 탈레반이 민간인을 상대로 끔찍한 테러를 하는 것들이나 모두 제대로된 신앙의 행동들은 아니다. 잘못된 신앙의 말로는 종교 전쟁이다. 현재도 간간히 물리적인 종교적 충돌이 일어나고 있다. 거기에 덧붙여 선교는 또 다른 차원의 종교 전쟁이다. 무리한 해외 선교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생기는 것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원치 않는 선교는 강도와 다를 바가 없다. 눈에는 보이는 전쟁과 보이지 않는 전쟁이 합을 맞춰가며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신을 바탕으로 하는 종교가 없다면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어줍잖은 회의주의적 무신론보다는 성실한 종교적 교리가 더 나을지도 모른다. 종교의 폐단으로 인해 발생하는 소모적인 일들은 종교적 교리와는 무관한 인간의 악함에서 나오는 것임을 안다. 그렇기에 신이 존재하가? 존재하지 않는가?는 내가 결론내릴 수 없는 차원의 담론이다. 양시론적 결론은 논증에서 옳지 않지만, 내 결론은 이렇다. 레닌이 지적한대로 원시종교는 인간으로서는 제압할 수 없는 자연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려는 인간 집단의 의지에서 출발하는 것이었다. 현재 종교의 역할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 당장은 신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언제든 불가항력적인 상황에 처하면 다시 신에 귀의할 것이다.


이 앞까지는 학교에 제출해야 될 내용. 생각해보면 내가 무신론자로 돌아서게 된 이유가 신이 있다, 없다와 관련된 것이 아닌 그 외적인 부분들 때문이라 신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충실한 대답을 하지 못한 것 같다. 제대로 된 책 한권 읽지 않고 신이 있네 없네 떠드는 것도 웃기지만- 어쩌겠는가. 레포트는 내야 하는 것을. 다행스럽게도 '만들어진 신'은 두꺼운 책 분량과 발번역에도 불구하고 내용이 흥미로워서 쭉쭉 읽었는데 너무 한편으로 기운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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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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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지글러는 내가 존경하는 사회학자이며, 활동가이며 전문가다. 넌 나중에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니? 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일말의 주저도 없이 "한비야와 장지글러"라고 대답할 수 있는 이유. 한비야와 장 지글러 사이에는 어떤 연결고리가 있기에 롤 모델로 저 두 사람이 된 것일까. 일단은 두 명 다 최전선에서 활동하고 있는 활동가 들이다. 내가 언제나 꿈꾸는 삶은- 사무실이나 방구석에 처박혀서 책이나 떠들어보는 책상 위의 생각'만'하는 삶 말고, 생각을 현실화 하려 움직이는 부단히 현장에서 뛰는 삶이다. 활동가라는 이유 말고도 두 사람이 내게 위인이 된 이유는 또 있다. 앞의 이유와 모순되게도 저들은 언제나 공부한다. 많은 책을 보고, 더 많은 책을 쓴다. '냉철한 머리와 뜨거운 가슴'이라는 캐치가 정말 잘 어울리는 두 사람이다. 나는 두 사람의 책을 보며 자랐고, 앞으로 더 많이 크려고 애쓰는 중이다. 오늘은 내가 정말 좋아하는 두 사람 중 한사람인 장 지글러의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라는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굳이 책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책 내용이 훤히 보이는, 적나라할 정도로 확실한 제목이다. 책은 제목에 대한 답변이 내용의 전부다. 책을 대충 훑어보면 해제, 한국어판 서문, 책 본문, 에필로그, 후기, 부록, 옮긴이의 말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해제, 에필로그, 후기, 부록 4가지이다. 책의 1/4를 차지하고 있는 이 내용들은 어느 하나 빠뜨릴 것이 없으며 본문보다 더 중요하다 말 할 수 있다.


책 제목의 질문에 대한 방법으로 제시하는 것은 에필로그에 보면 나와 있는데

1) 인도적 지원의 효율화
2) 원조보다는 개혁이 먼저
3) 인프라 정비

1)은 도움을 줄 나라의 사정이 어떤지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무턱대로 지원 하는 것은 오히려 그 나라의 사정을 악화시킬 수 있으므로 모든 지원을 하기에 앞서 나라의 정황부터 살펴야 한다. 그래야 나라의 수뇌부가 돈을 가로채서 개인의 안위를 위해 사용하는 일이 없어진다. 대다수의 아프리카 나라들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제이다. 2)는 1)의 문제 상황을 보다 근본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이다. 가까운 예를 들어 북한에 수많은 지원금이 들어가지만 북한 주민들의 생활은 전혀 나아지지 않는다. 북한 집권층의 부패는 이미 세계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도움을 주는 기구에서는 북한 집권세력의 청렴을 믿고 그들에게 지원금을 맡길 수밖에 없다. 이러한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는 북한 주민들 자발적으로 악의 근원을 끊는 게 제일 근본적인 방법이다. 북한의 예를 들다보니 정말 까마득한 방법인 것 같지만 원조보다는 나라 안에서 주민을 계몽해 개혁을 일으켜 부패한 정권을 몰아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아프리가 몇 몇 나라에서 성공할 뻔 한 사례가 있다. 모두 다국적 기업과 어떤 나라의 방해로 수포로 돌아갔지만. 3) 기아 문제가 있는 모든 나라들의 인프라는 엉망이다. 이러한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이 급선무이며, 구축 후에는 지금 보다 훨씬 효율적인 방법으로 기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책을 끝까지 읽고 나면 이 모든 게 생산과 분배의 문제라는 걸 알 수 있다. 세계인구가 모두 먹고도 남을 만큼의 식량이 넘쳐나고 있는데 한 쪽에서는 기아로 하루에 10만명의 사람이 죽는다. 남는 식량을 부족한 쪽에 가져다주면 되지 않느냐?란 질문에 토머스 맬서스의 자연도태론을 들먹거리며 이런 현상은 자연의 정화작용이니 먹을 게 없어 굶어 죽는 건 자연스러운 거야-라는 식의 대답은 정말 아연실색하게 한다. 지글러도 한 때는 기아는 '부드러운 죽음'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점차 쇠약해지다가 마지막에는 고통 없는 상태로 평안히 잠드는 것 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기아로 죽어가는 사람들은 말 못할 고통 속에서 죽을 날 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모두 연대하는 법을 상기하자. 기아의 문제는 모든 나라의 연대로 간단히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이다. 지글러는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낄 줄 아는 유일한 생명체인 인간의 의식 변화에 희망이 있다."고 말한다. 우리의 의식 변화만이 매일매일 죽는 10만 명을 살릴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이다.


우석훈씨가 남긴 해제는 책의 3/4를 차지하고 있는 본문의 요약판이며 책을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을 되돌아보고 끊임없이 질문하는 태도를 견지하라고 말한다. 전쟁보다 더 많은 사상자를 내고 있는 것이 바로 '기아'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이들이 오늘도 굶어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tv에서 말라비틀어진 아이들의 팔 다리를 보고 눈물을 흘렸던 것도 김혜자씨가 쓴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를 읽고 눈물을 찍어 냈던 것도 그 때 뿐이었다. 만성적인 기아문제는 우리를 무감각하게 만들었다. 무감각한 신경을 되살리기 위해선 끊임없이 질문해야 된다. 저 아이들은 가난한 나라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굶어죽는 게 당연한 것인가? 하루 10만 명이란 숫자가 지구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우리나라 안에서만 따지면 어지간한 중소도시 인구 절반씩 사라지는 것이다. 이게 과연 합당한가? 죽음에 무게가 있을 수 있을까? 어느 날 갑자기 무감각한 신경이 되살아나면 그 때 다시 되묻는 거다. "내가 과연 뭘 할 수 있을까?"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가장 간편한 방법으로는 월드비전이나 컴패션 사이트에 가서 후원결연을 맺는 걸 추천한다. 결연을 맺은 아이의 사진도 받아 볼 수 있고, 아이가 직접 만든 열쇠고리나 수공예품 같은 것들이 편지와 함께 오기도 한다. - 나도 반은 부모님의 지원으로 반은 자비로 한 명의 아이를 후원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로 당신은 연대에 직접 참여할 수 있게 되고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연대가 무엇인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기타
주경복씨가 쓴 부록은 신자유주의가 어떤 것인지 명쾌하게 설명해준다. 복잡했던 머릿속을 뻥하니 뚫어줬다. 혹시나 신자유주의에 관심이 있다면 강상구씨가 쓴 신자유주의의 역사와 진실이라는 책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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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좌파 - 김규항 칼럼집
김규항 지음 / 야간비행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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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은 읽을 책을 고를 때 신중히 생각해서 고르기보다, 준비하고 나가기 직전에 조급한 마음으로 책장 앞에 서서 눈에 띄는 책을 고른다. 들고 다닐 수 없는 두꺼운 책들은 당연히 패스, 책 두께도 적당하고 제목이 눈에 띄면 그 책이 '오늘의 읽을 책'으로 선정 된다. B급 좌파도 '그냥' 그 날 눈에 띄어서 읽기 시작했다. 책을 추천해 줬던 친구가 내용이 쉽고 읽기 편하다고 미리 언급해준 것도 선택에 영향을 줬겠지. 책 두께가 얇은 감이 아닌데 비해 안에 활자 수가 턱없이 적었다. 매 회 들어있는 삽화가 차지하는 공간까지 따지면 순수한 활자 수가 적었다. 내용도 쉬이 읽혀서 정말 빠르게 읽었다. 김규항씨가 씨네 21에 썼던 칼럼을 모은 칼럼집. 얼마 전에 읽은 시칠리아의 암소가 떠올랐다. 마침 시기도 비슷했다. 1999년부터 2000년 사이. 하지만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B급 좌파가 훨씬 대중적이었다. 시칠리아 보다는 B급이 내게 더 잘 맞았다. 한줌의 비속어들과 전문적이지만 비전문적인 분위기가 좋았다. 혹시 내가 A급 보다는 B급을 좋아해서 그런가? 그래서 학점도 A는 없고 B들만.........


 모두 다른 주제의 칼럼 모음집을 읽고 그 책에 대해 논한다는 것은 주제를 정하는 것부터 쉽지 않다. 그나마 책이 쉽게 쓰인 덕분에 책 전부를 이해할 수 있었고 몇 가지 주제로 묶어보려는 시도도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주제로 묶은 것은 순전히 나의 생각이며 필자의 견해와는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계급


우리나라에는 헌법으로 보장된 평등이 있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며.." 과연 그럴까? 우리는 정말 어떠한 계급적 차별이나 불평등을 느끼지 않고 살아가는 걸까? 홍세화씨가 말하는 '사회귀족'은 존재한다. 귀족들은 그들만의 성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 안간힘 중에 하나가 '교육'이다. 교육은 학벌사회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있다. 그들은 남과 다른 귀족으로 살아가기 위해 SKY에 들어가려 애쓰고, 현실도 부모의 재산 차이가 학벌을 결정하는 시대로 가고 있다. 개천에서 용 나는 이야기는 이제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학벌 사회와 연계한 대학 입시는 계급 결정시험이 되버렸다. 0.1%의 성공한 사람들 이야기는 '나도 혹은 내 자식은 저런 성공 신화를 쓸 수 있겠지'라는 헛된 희망을 심어준다. 그러한 희망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입시체제를 유지시키는 힘이다. 이런 성공 신화를 심어준 것은 과연 누구인가? 또 다른 층위의 계급이야기도 있다. 우리나라의 노동자들은 서로 연대하지 않는다. 1%의 사용자와 대략 30%의 자영업자를 제외한 69%의 사람들이 모두 '노동자'인데 노동자 스스로 노동자라 불리는 걸 거부한다. 사용자는 철저히 노동자들이 연대하는 걸 막는다. 비정규직과 연대하지 않는 정규직 노동자의 이면에는, 비정규직과 정규직을 철저히 차별, 분리시키는 사용자들이 있다. 파업을 보는 우리의 시선이 매번 곱지만은 않은 것도 우리 스스로 노동자라는 자각이 부족해서인 측면도 있다. 책에는 계급과 민족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민족적 파시즘은 계급을 가려 연대를 방해한다. '우리는 모두 한민족이니 그 안의 계급이 무슨 소용이겠어?'라는 말에 우리는 언제나 속는다. 책에 나온 스크린 쿼터 축소 반대 시위는 민족적 파시즘의 전형이다. 우리가 당시에 스크린 쿼터를 보호해야 했던 이유-지금은 어느 정도 스크린 쿼터가 축소되었지만-는 민족주의적 측면에서 찾아야 될 형질의 것이 아니었다. 당시에 거리에 나왔던 영화인들은 평상시에도 민족적 연대를 느끼며 살아온 사람들인가? 그렇다면 당시나 지금이나 최악인 영화판 스탭들의 처우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오히려 계급의식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이 태반인 것으로 아는데- 한국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생겨나는 것은 모두 민족적인 것이고 보호할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파시즘을 부른다.




진보 지식인


나는 진보 '지식인'은 아니다. B급 좌파도 아니다. 급수를 따지자면 B급 좌파 지식인 지망생 쯤 되려나.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많이 고민하는 요즘이다. 그러다 마음에 박힌 말이 '이념의 진보성과 삶의 보수성'이다. 조지 레이코프가 말했듯이 진보주의자라 자칭하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이념은 진보적이되 생활은 보수적인 사람들인 것이다. 당장 나만해도 그렇다. 반연령주의를 외치며 살지만 그건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만 적용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나보다 어린 친구들에게는 나도 모르게 '예의'를 생각하곤 한다. 그런 상황을 발견하면 꽤나 씁쓸하다. 이 세상에서 좌파로 살기 어려운 이유가 우파는 자신의 양심을 건사하는 일만으로도 건전할 수 있지만, 좌파는 다른 이의 양심까지 지켜내야 건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최소한의 내 양심을 지키는 일조차 버겁다. 1월 초 나는 정말 오래간만에 사경을 헤맬 정도로 아팠다. 혼자 사는 까닭에 주변에 아무도 없었고 1월1일에 근처에 문을 연 병원이 없어 병이 더 커졌다. 꼬박 2박3일 동안 정신을 못 차리고 아프면서 정말 '다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아프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나와 아무 상관없다. 그때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일단은 '내'가 우선이고 나머지는 그 차선이 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그게 아니었다. 내가 공부했던 생각했던 것들 중에는-필자는 이걸 '지성'이라 말했다- 죽음을 포함한 모든 절박함이 들어있었다. 내가 편안하고 먹고 살만한 시절에는 지성이 사고의 축이 되다가 절박해지자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공부해온 것일까. 앞으로 할 공부들은 이런 모순들을 없애주는 것들이길.




사회


나는 전라도 출신 사람이다. 어디에 살고 있냐는 질문을 받으면 레드 콤플렉스에 사로잡힌 인간들을 피하기 위해 가급적 현 거주지인 서울을 대지만, 그래도 거의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전라도에 살았다. 고향 친구들이나 어른들 대다수가 민주당을 지지하고-지지하는 이유는 불분명하다- 그게 실제로 투표에 반영되는 것도 보아왔다. 대학도 잠시 동안이었지만 5.18 대학을 다녔다. 그런 나는 29년 전 광주를 잊어 간다. 강풀의 만화 26년과 영화 화려한 휴가가 아니었다면 잊어간다는 생각조차 못하고 살 뻔 했다. -26년이 꼭 영화화되길 바랐는데 무산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 아쉽다.- 29년 전 광주엔 내 아버지도 있었다. 아버지는 당시 군인으로 광주에 있었는데, 직접 투입된 건 아니었고 비행장에서 계속 대기하고 있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화려한 휴가를 보며 참 많이 우셨다고도 했다. 그런 우리는 5월 18일을 잊어 간다. 매 년 5월이면 나오는 이야기지만 우리는 모두 그날의 공범들이다. 대략 학살범을 제대로 처벌하지 못했고 학살 공범을 대통령에 올렸으며 심지어 지금 그 사실을 잊어가기까지 한다. 매번 이상한 쪽으로 관용을 베푸는 '우리'가 있는데 지금의 대통령이라고 무서울 게 무엇일까.


기타


이 책은 헌 책으로 구입했는데 상현이라는 분이 나나라는 분에게 선물하는 책이었다. 한 페이지 빼곡히 편지가 쓰여 있었는데, 무척이나 인상 깊은 구절이 보여 옮긴다.

"우리가 만나게 된 것은 단지 '우연'이지만, 그러한 우리가 앞으로 해나갈 수 있는 것들은 그 우연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커다란 그 무엇이라 생각해. 그래서 나나와 더욱 많은 것 경험하고 더욱 많은 것 느끼고도 싶다. 두학번 위의 선배지만, 아직 부족한 것이 많다. 나나로부터 많은 것 배우고도 싶고 내가 조금이라도 더 알고 있는 게 있다면 가르쳐 주고도 싶다. 무엇보다, 솔직하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부디 서로가 더욱 솔직하게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게 되기를, 그리하여 서로의 삶이 더욱 행복해 질 수 있기를."
03년 3월 9일 상현 선배가-

읽고 나서 마음이 짜르르했다. 이런 게 헌 책의 묘미 중 하나겠지. 올 한 해 내가 있는 동아리나 학과에 이 구절을 적어서 책을 선물할 수 있는 후배가 들어오기를, 들어와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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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처음에 간단한 시놉시스를 보고 이 영화를 꼭 봐야 겠다고 결심했다. 일생이 거꾸로 간다는 벤자민의 출생과 죽음이 어떻게 될지, 나의 굳어버린 머리로 아무리 상상해도 일말의 생각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어떤식으로 탄생과 소멸을 표현했을까? 그게 제일 궁금했다. 혼자 열심히 머리를 굴려 생각해 낸 결과물들이 정말 말하기 창피할 정도로 말도 안되는 이야기인데, 시놉대로 벤자민이 노인의 모습으로 태어난다면 아무리 작아도 40kg은 넘어갈 것이고 그걸 산모가 어떻게 감당했을까? 죽을 때는 다시 태아로 돌아가는 건가? 이건 뭐 나비효과인데- 이런 시덥잖은 생각들만 머리속에서 산발적으로 떠올랐다. 이런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봐야지 봐야지 하다가 오늘에서야 봤다. 그런데 아뿔싸! 이 영화 러닝타임이 3시간 이었다. 한 2시간 정도로 생각하고 곧바로 이어지는 회차에 체인질링을 예매해 뒀는데 아아아- 영화 재미없으면 정말 고문이겠구나 싶었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영화는 정말 재밌었다. 발렌타인 특수였는지는 몰라도 꽤 넓어 보이는 관객석도 가득 찼다. 3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집중하며 봤다- 옆자리에서는 크레딧 올라갈 때 영화가 왜 이렇게 기냐며 궁시렁 거리는 것 같았지만-. 내가 궁금해 했던 것들은 예상 외로 너무 당연하게 해소되었다. 저렇게 태어나고 저렇게 죽는 게 당연한 이치인데 나 혼자 SF소설을 쓰고 있었다. 벤자민은 자연스럽게 태어나서 조금은 특별한 삶을 살다가 다시 자연스럽게 죽었다.


영화는 액자구조로 진행된다. 캐롤라인과 데이지의 현재 진행형 이야기가 액자 바깥 구조, 벤자민의 일기로 나오는 과거의 상황들이 액자 안 구조다. 액자 안과 바깥은 별개의 세상이 아니라 서로 긴밀하게 얽혀져 있는데, 이와 관련해 나중에 밝혀지는 사실들이 있다. 액자 구조 시점이 다 그렇지만 벤자민 이야기는 캐롤라인의 나레이션과 벤자민의 나레이션이 오버랩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상당히 많은 나레이션이 등장하지만 그게 어색하거나 거북하지 않았다. 다만 너무 많이 액자 안팎을 넘나들어 영화 흐름이 끊기는 부분도 있었고, 더 이상 설명해주지 않고 이런 식으로 쉽게 건너뛰는구나-싶은 장면들도 있었다. 러닝타임이 평균 영화 상영시간보다 1시간이나 긴 3시간인데도 지루하지 않게 볼 수 있었던 이유가 수많은 에피소드를 도식적으로 보여줘서 였는데, 역설적으로 에피 하나하나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못하고 건너뛰어서 제작자로선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겠지만 내게는 좀 아쉬웠다.


이 영화에서 벤자민 역할은 정말 중요하다. 주인공 이름이 영화 제목 한편을 차지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벤자민을 맡은 배우의 연기력이 굉장히 중요했는데, 피트가 아주 훌륭하게 소화해냈다. 대략 80대로 추정되는 할아버지부터 20대 솜털 보송보송한 청년에 이르기까지- 분장의 힘이 50%였다면 피트의 연기력이 나머지 반을 메웠다. 괜히 비싼 개런티 받는 게 아니구나-  여자 주인공인 케이트 블란쳇도 정말 연기 잘했다. 발레 장면 나올 때마다 감탄하며 봤다. 전공이 발레인줄 알았다. 연기를 잘하는 건지 춤을 잘 추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영화를 보며 혼자 흥분했던 장면이 몇 가지 있는데 정리를 해보면

  1) 캐롤라인이 데이지에게 죽음이 두렵냐고 질문하는 장면
  2) 데이지가 벤자민에게 시간을 낭비했다고 말하는 장면
  3) 벤자민이 딸에게 써준 엽서를 캐롤라인이 읽는 모습


이 세 가지 장면에 영화가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모든 게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1) 죽음이 두려워요? 아니- 궁금해 죽음 뒤에는 어떤 상황이 펼쳐질까. 결국에는 모두가 죽는다. 누구에게나 주어진다고 해서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죽음 앞에서 의연해질 수 있는 한 가지 이유를 데이지에게서 봤다. 2), 3) '무엇인가 할 수 있을 때가 저절로 찾아 올 거라 생각하고 인생을 낭비했어.' 저절로 찾아오는 순간이란 없다. 엘리자베스의 후회는 해협을 횡단한 최고령자로 기네스에 올라가면서 사라졌을 것이고, 데이지의 후회는 벤자민을 다시 만나며 사라진다. 벤자민이 딸에게 쓴 엽서에도 마찬가지 이야기가 적혀있다. 후회하지 마라, 뭔가 잘 못 되었다고 생각하면 지금 다시 시작해라. 나는 그렇게 살고 있는가? 한 번 사는 인생이라 생각하고 마음먹은 대로 행동하고 살아가려 하지만 너무 자주 결심이 무너진다. 나는 언제나 다시 시작할 용기가 있는가?


늙은 겉모습으로 태어나 젊어지는 상황에서 당연히 벌어질 수밖에 없는 일들이 그대로 표현되었다. 영화라고 포장하거나 꾸미지 않았다. 데이지가 젊었을 때는 벤자민이 늙은 자신의 모습에 주저하고 반대의 상황에선 데이지가 주저한다. 그들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라 말하는 시점은 둘의 나이가 교차했던 40대일 때뿐이었다. 그 전, 후로 둘이 함께 행복했던 시절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벤자민이 젊어지는 설정 빼고 나머지가 무척 현실적이어서 잠시 슬퍼졌다.그래도 금세 회복할 수 있었던 건 오늘 영화를 함께 본 지인이 보낸 문자를 받고 나서. "벤자민 버튼은 마지막까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해서 행복했던 사람인 거 같아요." 이 문자를 보며 영화 결말과 상관없이 해피엔딩이 될 수 있겠구나- 했다. 


사족.
영화에 샤일로가 나온다는 소리를 얼핏 들은 거 같아서 아기가 나올 때마다 눈을 부릅뜨고 봤다. 내가 샤일로다! 라고 생각했던 아기는 캐롤라인 어릴적 모습이었는데 역시나 맞았다. 샤일로야 사진으로만 보다가 영상에서 보니까 나 혼자 반가웠다 :) 굿나잇, 샤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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