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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처음에 간단한 시놉시스를 보고 이 영화를 꼭 봐야 겠다고 결심했다. 일생이 거꾸로 간다는 벤자민의 출생과 죽음이 어떻게 될지, 나의 굳어버린 머리로 아무리 상상해도 일말의 생각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어떤식으로 탄생과 소멸을 표현했을까? 그게 제일 궁금했다. 혼자 열심히 머리를 굴려 생각해 낸 결과물들이 정말 말하기 창피할 정도로 말도 안되는 이야기인데, 시놉대로 벤자민이 노인의 모습으로 태어난다면 아무리 작아도 40kg은 넘어갈 것이고 그걸 산모가 어떻게 감당했을까? 죽을 때는 다시 태아로 돌아가는 건가? 이건 뭐 나비효과인데- 이런 시덥잖은 생각들만 머리속에서 산발적으로 떠올랐다. 이런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봐야지 봐야지 하다가 오늘에서야 봤다. 그런데 아뿔싸! 이 영화 러닝타임이 3시간 이었다. 한 2시간 정도로 생각하고 곧바로 이어지는 회차에 체인질링을 예매해 뒀는데 아아아- 영화 재미없으면 정말 고문이겠구나 싶었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영화는 정말 재밌었다. 발렌타인 특수였는지는 몰라도 꽤 넓어 보이는 관객석도 가득 찼다. 3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집중하며 봤다- 옆자리에서는 크레딧 올라갈 때 영화가 왜 이렇게 기냐며 궁시렁 거리는 것 같았지만-. 내가 궁금해 했던 것들은 예상 외로 너무 당연하게 해소되었다. 저렇게 태어나고 저렇게 죽는 게 당연한 이치인데 나 혼자 SF소설을 쓰고 있었다. 벤자민은 자연스럽게 태어나서 조금은 특별한 삶을 살다가 다시 자연스럽게 죽었다.
영화는 액자구조로 진행된다. 캐롤라인과 데이지의 현재 진행형 이야기가 액자 바깥 구조, 벤자민의 일기로 나오는 과거의 상황들이 액자 안 구조다. 액자 안과 바깥은 별개의 세상이 아니라 서로 긴밀하게 얽혀져 있는데, 이와 관련해 나중에 밝혀지는 사실들이 있다. 액자 구조 시점이 다 그렇지만 벤자민 이야기는 캐롤라인의 나레이션과 벤자민의 나레이션이 오버랩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상당히 많은 나레이션이 등장하지만 그게 어색하거나 거북하지 않았다. 다만 너무 많이 액자 안팎을 넘나들어 영화 흐름이 끊기는 부분도 있었고, 더 이상 설명해주지 않고 이런 식으로 쉽게 건너뛰는구나-싶은 장면들도 있었다. 러닝타임이 평균 영화 상영시간보다 1시간이나 긴 3시간인데도 지루하지 않게 볼 수 있었던 이유가 수많은 에피소드를 도식적으로 보여줘서 였는데, 역설적으로 에피 하나하나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못하고 건너뛰어서 제작자로선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겠지만 내게는 좀 아쉬웠다.
이 영화에서 벤자민 역할은 정말 중요하다. 주인공 이름이 영화 제목 한편을 차지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벤자민을 맡은 배우의 연기력이 굉장히 중요했는데, 피트가 아주 훌륭하게 소화해냈다. 대략 80대로 추정되는 할아버지부터 20대 솜털 보송보송한 청년에 이르기까지- 분장의 힘이 50%였다면 피트의 연기력이 나머지 반을 메웠다. 괜히 비싼 개런티 받는 게 아니구나- 여자 주인공인 케이트 블란쳇도 정말 연기 잘했다. 발레 장면 나올 때마다 감탄하며 봤다. 전공이 발레인줄 알았다. 연기를 잘하는 건지 춤을 잘 추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영화를 보며 혼자 흥분했던 장면이 몇 가지 있는데 정리를 해보면
1) 캐롤라인이 데이지에게 죽음이 두렵냐고 질문하는 장면
2) 데이지가 벤자민에게 시간을 낭비했다고 말하는 장면
3) 벤자민이 딸에게 써준 엽서를 캐롤라인이 읽는 모습
이 세 가지 장면에 영화가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모든 게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1) 죽음이 두려워요? 아니- 궁금해 죽음 뒤에는 어떤 상황이 펼쳐질까. 결국에는 모두가 죽는다. 누구에게나 주어진다고 해서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죽음 앞에서 의연해질 수 있는 한 가지 이유를 데이지에게서 봤다. 2), 3) '무엇인가 할 수 있을 때가 저절로 찾아 올 거라 생각하고 인생을 낭비했어.' 저절로 찾아오는 순간이란 없다. 엘리자베스의 후회는 해협을 횡단한 최고령자로 기네스에 올라가면서 사라졌을 것이고, 데이지의 후회는 벤자민을 다시 만나며 사라진다. 벤자민이 딸에게 쓴 엽서에도 마찬가지 이야기가 적혀있다. 후회하지 마라, 뭔가 잘 못 되었다고 생각하면 지금 다시 시작해라. 나는 그렇게 살고 있는가? 한 번 사는 인생이라 생각하고 마음먹은 대로 행동하고 살아가려 하지만 너무 자주 결심이 무너진다. 나는 언제나 다시 시작할 용기가 있는가?
늙은 겉모습으로 태어나 젊어지는 상황에서 당연히 벌어질 수밖에 없는 일들이 그대로 표현되었다. 영화라고 포장하거나 꾸미지 않았다. 데이지가 젊었을 때는 벤자민이 늙은 자신의 모습에 주저하고 반대의 상황에선 데이지가 주저한다. 그들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라 말하는 시점은 둘의 나이가 교차했던 40대일 때뿐이었다. 그 전, 후로 둘이 함께 행복했던 시절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벤자민이 젊어지는 설정 빼고 나머지가 무척 현실적이어서 잠시 슬퍼졌다.그래도 금세 회복할 수 있었던 건 오늘 영화를 함께 본 지인이 보낸 문자를 받고 나서. "벤자민 버튼은 마지막까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해서 행복했던 사람인 거 같아요." 이 문자를 보며 영화 결말과 상관없이 해피엔딩이 될 수 있겠구나- 했다.
사족.
영화에 샤일로가 나온다는 소리를 얼핏 들은 거 같아서 아기가 나올 때마다 눈을 부릅뜨고 봤다. 내가 샤일로다! 라고 생각했던 아기는 캐롤라인 어릴적 모습이었는데 역시나 맞았다. 샤일로야 사진으로만 보다가 영상에서 보니까 나 혼자 반가웠다 :) 굿나잇, 샤일로